•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6. 수산업
  • 4) 수산양식업과 수산제조업
  • (1) 수산양식업

(1) 수산양식업

수산업을 업태별로 분류하면 어업, 수산양식업 및 수산제조업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어업의 비중이 크고 나머지 두 가지의 비중은 작다. 이는 자금과 기술면의 제약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 필요성이 크지 않아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발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어구만 개발하면 많이 잡을 수 있는 상황하에서 어류양식같은 것은 발달하기 어렵다. 그러나 특정 수산물에 대한 수요가 많고 그 양식이 용이한 경우에는 양식업이 개발될 수도 있다.

태종대에 담수어 양식에 눈을 뜬 사람이 있어서 제언을 축조하여 養魚를 할 것을 왕에게 계청한 일이 있었다. 즉 原州牧使를 지낸 일이 있었던 禹希烈은 태종 9년(1409)에 적지를 택하여 한발에 대비하기 위한 제언을 축조하여 관개시설을 갖추는 동시에 灌漑池에서 양어를 하여 일거양득의 이익을 얻도록 할 것을 계청하였다. 그 방법은 中軍으로 하여금 司宰監과 더불어 못을 축조케 하여 양어를 함으로써 供上에 대비하고, 좌군으로 하여금 典農寺와 더불어 또 하나의 못을 축조케 하여 양어함으로써 제사에 쓰며, 우군으로 하여금 禮賓寺와 더불어 역시 그와 같이 하여 賓客접대용으로 쓰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都監을 설치하여 제언 축조 및 수축, 양어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자고 하였다. 왕은 이 제의를 좇아 우희열을 提調로 삼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0717)≪太宗實錄≫권 17, 태종 9년 3월 을축.

그 뒤 이것이 실천에 옮겨지고 잉어나 붕어같은 어류를 많이 양식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말기까지도 양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초기에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관상용의 池中養魚는 더러 있었음이≪태종실록≫에 보인다. 즉 태종 13년의 기록에 의하면 본궁 연못의 물고기가 모두 죽어서 떠올랐으므로 廣延樓로 옮기고, 解慍亭 앞 연못의 물고기는 慶會樓 밑 큰 못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는 것이다.0718)≪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4월 경신. 그리고 동년이 기록에는 慕華樓의 남쪽 연못에서 묵은 쌀을 먹여 양어를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보인다.0719)≪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6월 정묘.

조선시대에 있어서 유일한 수산양식업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藻類養殖에 속하는 김 양식뿐이었다. 그 기원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늦어도 17세기 경까지 소급된다는 것이 신빙성 있는 자료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김 양식의 역사가 조선 초기까지 소급된다는 견해도 있다. 김을 일찍부터 식용으로 이용하고 있었음은≪慶尙道地理志≫의 여러 지방 토산조나 토공조에 海衣라는 이름으로 김이 올라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뒤에 편찬된 지리서들에 의하면 해의의 산지가 여러 도에 걸쳐 있다. 그런데 전라도 光陽縣의 토산에도 해의가 들어 있어 그것이 양식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양만에는 자연산 김인 돌김[岩海苔]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만에서는 한 말에 성행되고 있었던 一本篊(섶)에 의한 김 양식을 조선 초기부터 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0720)鄭文基,<朝鮮海苔>(≪朝鮮之水産≫144, 1939). 一本篊建 김 양식은 가지가 붙은 대나 다른 나무를 꽂아 김을 착생시키는 간단한 원시적 김 양식 방법이다. 그러한 양식법은 기술적으로는 일찍부터 개발될 수 있다. 김에 대한 수요가 많고 자연산 김만으로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울 때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인공적 양식을 시도할 것이다. 조선 초기에 김의 사회적 수요가 많았다면 그 때 이미 김 양식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도 단정적으로 확언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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