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6. 수산업
  • 6) 어업 경영형태

6) 어업 경영형태

조선 초기의 어업경영에 관한 자료는 극히 희소하기 때문에 이를 상세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의 어업은 지방에 따라 전업적 어업자에 의하여 경영된 것도 볼 수 있겠지만 어업이 주로 농민에 의하여 경영되고 있었고, 그 경영규모가 일반적으로 영세한 데 특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사회에 있어서는 자급자족적 자연경제가 지배적이었다. 원래 자연경제에 있어서는 어업을 포함한 모든 미성숙한 여러 산업이 농업의 부수물로서 농업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봉건사회는 그 물질적 기초가 농업생산물이었던 만큼 농본주의에 입각한 동양적 농업질서의 재생산이 가장 중요하였으며, 어업은 농업의 陰影的 존재로서 농업의 부수산업 부문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어업은 대부분이 영세농업의 생계 보충책으로서 농민에 의하여 경영되고 있었다. 영세농민의 생활근거지가 어장에 근접하고 있는 입지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경우에는 농한기의 유휴노동을 이용하여, 또는 농업의 여가를 이용하여, 혹은 가족 내의 분업에 의하여 어업을 겸하였던 것이다. 반농반어 형태의 농민적 어업이었던 것이다. 반농반어라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主農從漁의 형태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고 주어종농의 겸업구조를 지니는 것도 있었다. 특수한 지역이나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는 어업에 있어서는 전업적 어업자가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나 그 지배적인 형태는 주농종어형태의 農漁兼營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업이 농업의 부업 또는 농업의 다각경영의 일부와 같은 형태로 동일한 주체하에 포괄 통일되어 있는 경우, 어업은 농업경영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종목에 국한된다. 즉 내수면, 내만 또는 아주 가까운 연안에서 할 수 있는 어업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리고 농업 경영이 일반적으로 가족노동에 기반을 둔 경영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어업경영도 가족노동에 의한 영세경영의 형태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이 어업을 경영하기 쉬웠던 것은 많은 자금과 숙련된 기술이 없어도 쉽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조어업이다. 간단한 조어업 어구와 소규모의 원시적 어선만 마련되면 어업경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어업은 어장의 배타독점적 이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장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영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어업의 경영에 있어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 일례로서 어전어업의 경영을 들 수 있다. 어전 중에서 遊漁的 성격을 띤 소규모의 것은 영세업자도 쉽게 경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큰 것은 어전의 설치에 많은 자금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영세한 농민이나 어민이 경영하기는 어려웠다. 어전은 빈민에게 대여한다고≪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었으나, 빈민은 위와 같은 이유로 대규모 어전어업을 자영할 수 없어 어리를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다.

성종 17년(1486) 3월 上黨府院君 韓明澮의 啓에는 “각 도 魚箭을 국가가 빈민에게 주었으나 힘이 미약하여 스스로 설치하지 못하니 인근의 豪民이 이를 설치하여 이익을 나눈다”0734)≪成宗實錄≫권 189, 성종 17년 3월 을해.고 하였다. 또≪中宗實錄≫에 의하면 “대체로 어전이라는 것은 公役이 심대하여 빈민이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豪强者가 權門에 청탁하여 그 이익을 독점한다”0735)≪中宗實錄≫권 8, 중종 4년 5월 임인.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규모 어업은 자력이 있고 세력이 있는 자들이 경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경국대전≫의 입법취지는 좋았으나 그 입법정신이 충분히 살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세력가가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어업을 경영할 때에는 외견상 자본제적 어업경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원된 노동자가 자유노동자로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경영주가 상품화된 노동력을 구사하여 어업을 경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본제적 어업경영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세력가가 노동력을 동원할 때는 반강제적으로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는 봉건사회의 신분적 주종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지주가 대규모어업을 경영할 경우에는 소작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船軍(해군)이 어량어업에 동원되는 일도 있었다.≪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19년(1437) 6월의 충청도 都巡問使 安純의 계에 “船軍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漁梁의 역사가 심히 고되므로 반드시 이를 정파하여 그 고통을 감소시켜야 한다”0736)≪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6월 경신.고 한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세력가는 선군까지 동원하여 강제 노역을 시켜 어량어업을 경영하였던 것이다.

<朴九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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