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
  • 1) 전세

1) 전세

고려 말 공양왕 3년에 과전법에서 公定된 조세규정은 세종 26년에 공법이라는 새로운 전세제도로 개혁되기까지 그대로 준행되었다. 과전법의 조세규정 가운데 중요한 것은 조와 세에 대한 규정을 비롯하여 손실답험법, 그리고 공·사전조의 公收규정 등이다. 공법이 시행되기까지 건국 초 반 세기 동안 유효했던 과전법의 조세규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076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공양왕 3년 5월 都評議使司上書.

① 公田·私田을 막론하고 수조자에게 바치는 租는 水田이면 매 1결에 糙米 30두, 旱田이면 매 1결에 잡곡 30두로 하며, 그 이상 거두는 것을 贓律로 적용하여 엄벌한다.

② 무릇 전지를 점유하는 자는 세를 국가에 바치되, 수전이면 매 1결에 白米 2두, 한전이면 매 1결에 黃豆 2두로 한다. 陵寢田·倉庫田·公廨田·功臣田 등은 예외로 하여 稅가 없다. 구경기는 稅를 料物庫에 바치고, 신경기와 외방은 稅를 豊儲倉과 廣興倉에 분납한다.

③ 풍년·흉년에 따른 수확의 손실은 10등급으로 나누어 율로 삼아, 수확이 1分 감하면 租 1分을 감하고, 수확이 2分 감하면 租 2分을 감하여, 차례로 감하다가 수확이 8分 감하면 租의 전액을 면제한다.

④ 답험은 공전에서는 각 주·현의 수령이 심사·검사하여 감사에 보고하면, 감사가 임시로 관원을 보내어 재심하고, 다시 감사와 首領官(經歷·都事)이 친히 심사하며, 답험을 부실하게 하는 자는 처벌한다. 그리고 科田 등의 私田에서는 田主가 스스로 심사하여 율에 따라 租를 거둔다.

⑤ 大軍을 일으켜 군량이 부족한 경우에는 公田·私田을 불문하고, 그 소용의 다소에 따라 임시로 일정한 수량을 국가에서 징수하여 쓰고, 사변이 끝나면 원상으로 돌아간다.

위 과전법의 조세규정에 의하면, 조와 세의 개념은 뒤에는 혼돈되어 같은 뜻으로 사용하게 되지만, 적어도 과전법 당시에는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다. 즉 경작자가 수조자에게 바치는 것은 조라 하고, 수조자가 국고에 바치는 것을 세라 하였다.

과전법에서는 공전·사전을 막론하고 매 1결당 30두의 조를 바치도록 하였으니, 1결의 수확고 300두(20石)에 대한 1/10의 수조율이 된다. 그리고 1/10 이상의 收斂을 엄벌한다고 하였으니, 이에 따라 공전에서는 소유자가 自耕하며 매 1결당 30두의 조를 국고에 내는 것이며, 사전에서는 전주가 전호로부터 사전의 조를 매 1결당 30두씩 받도록 公定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분급수조지에서는 매 1결당 2두의 세를 국고에 바치되, 다만 능침전·창고전·궁사전·공해전·공신전 등만은 세를 면제하였다.

조와 세의 차이점을 들면, 첫째 조는 매 1결당 30두인데 비하여 세는 매 1결당 2두로서 세는 조의 1/15에 불과했다. 둘째, 세는 모든 전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어서 세가 없는 전지도 있으나, 조는 수조의 귀속을 달리하면서도 모든 전지에 적용되었다. 셋째, 조는 公과 私의 여러 곳에 귀속되었으나 세는 요물고·풍저창·광흥창 등 세 기관에 납입되었다.0765)旗田巍,<朝鮮初期の公田>(≪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148쪽.

과전법의 조세규정 중에서 세에 관한 규정은 태종 2년에 개정되었다. 태종 2년까지 無稅地로는 陵寢田·倉庫田·宮司田·公廨田·功臣田·寺社田 등이 있으며, 有稅地로는 科田·軍役田·外役田·津驛院館紙匠位田 등이 있었으나, 태종 2년의 개정에 따라 이때까지 무세지였던 공신전·사사전 등이 유세지가 되었다.0766)≪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무오. 이와 같이 세의 부담과 세의 공전·사전과의 관련은 과전법의 공포 당시에는 명백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나, 점차 세는 사전에 부과하는 경향이 명백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태조 2년에 손실답험법이 보완되었다. 이 보완조처는 과전법의 손실답험 규정을 그대로 두고, 다만 동일 地番(5結 단위 지번)의 경지 내에 作況이 상이한 부분이 있는 경우의 給損방식을 규정한 것으로, 공양왕 3년의 隨損給損制의 미비점을 보완한 것이다.0767)≪龍飛御天歌≫제73장 註. 그리고 다시 태종 때 손실답험법이 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①委官은 다른 도의 品官 중에서 임명하여 답험하게 할 것, ②損實은 1할 감수부터 적용하고, 1할 實收까지도 적용할 것, ③ 수령이 위관의 답험 결과를 조사할 것, ④조정에서 파견한 경차관이 답험을 불공정하게 한 경우는 처벌할 것 등이었다.0768)위와 같음.

손실답험법의 실제 운영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있었다. 공전의 경우, 수령이 친히 손실답험을 심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어서 향리나 品官출신의 임시위원과 중앙에서 파견된 敬差官 등이 손실답험을 담당하였다. 그들 실무자는 손실을 가리는 자세가 방자하고 일을 부정하게 처리하기 일쑤여서 농민들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후하게 접대하거나 뇌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사전의 경우, 과전법에 의하여 전주 스스로 심사하고 검사하여 租를 거두도록 되어 있어, 전주의 답험이 너무 가혹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사전의 전주에게는 1石(15斗)을 納租하는 데 반드시 23∼24두를 바쳐야 하였으며,0769)≪太宗實錄≫권 32, 태종 15년 8월 갑술. 그 밖에도 숯·땔나무·재목과 기타 잡물을 바쳐야 했다.0770)李景植,≪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133쪽.

태종 17년에는 사전의 1/3을 하3도에 移給하게 되면서, 사전에서도 관에 의한 답험으로 개혁하게 되었다. 이에 태종 18년에는 전주의 반발 때문에 사전에서의 관의 답험을 일시 중단하게도 하였으나, 세종 원년(1419) 이후 사전에 대한 관의 답험이 항구화하게 되었다.0771)李景植, 위의 책, 211∼217쪽. 그리하여 수조권을 통한 전주의 토지지배는 세종 원년을 기점으로 일대 변화를 보였다. 사전에서의 수조권 행사는 답험손실에 있었는데, 그 답험손실의 권한이 수조권자인 전주의 수중에서 국가관리로 귀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전에서의 공적인 답험손실의 도입은 전주의 사적 수조권의 행사에 대한 과전법 규정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바탕에는 사전도 공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공적 관리하에 두어야 한다는 국가관리권의 성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田地를 개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농민의 보편적인 토지소유권의 성장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답험손실의 방식은 각 군현의 수령이 각기 관내의 작황을 답험하여 그 내용을 관찰사를 경유하여 중앙에 보고하며, 중앙에서는 해마다 경차관을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경차관의 파견은 여러 가지 폐단을 수반하고 있었다. 경차관은 왕명을 직접 받아 파견되었던 만큼 각 군현의 수령으로서는 그에 대한 접대를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경차관도 각 군현의 전답을 두루 답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경차관은 각 수령의 책임 아래 시행되는 답험손실에 있어서의 불공정을 살피는 위협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그들의 소임이었다.

답험손실의 1차 책임자는 수령이었다. 수령은 자기 관내의 모든 전답을 친히 답험할 수 없었으므로 재지사족을 답험손실의 委官으로 삼아 활용하였다. 즉 태종 때부터 공평하고 청렴한 재지사족으로 위관을 삼아 답험손실의 실무를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답험손실에 있어 공평하고 청렴한 품관을 실무자로, 수령을 그 책임자로, 그리고 경차관을 그 감독관으로 제도화하였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답험손실은 고려 전시과의 그것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 발전된 측면이 있다. 첫째, 답험의 1차 책임자가 전시과에서는 村典이었는 데 비하여 과전법에서는 수령으로 규정되고 있어, 수령을 통해 농민을 보다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중앙집권정책의 강화 사실과 관련되고 있다. 둘째, 전시과에서는 현지의 주민인 촌전으로 하여금 답험의 실무를 맡게 한 데 비하여 과전법에서는 공평하고 청렴한 품관으로 답험의 실무를 맡게 하되, 지역을 바꾸어 답험케 하였다.0772)金泰永,≪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지식산업사, 1983), 256쪽. 고려 전시과에서의 답험손실과 조선 초기 과전법에서의 그것을 비교할 때 그 원칙에 있어서 과전법의 것이 보다 발전된 측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답험손실의 실제는 고려 이래의 전통적인 방식이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다. 답험손실은 위관이 현지에 나가 전답의 매 필지마다 일일이 답사하고, 그 경작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리하여 위관으로서 사무를 담당케 된 인원은 매우 많아 8도에 걸쳐 거의 1천여 명에 이르렀다.0773)≪文宗實錄≫권 3, 문종 즉위년 9월 임인. 1천여 명에 달한 공평하고 청렴함 품관을 선임하기도 어려웠고, 위관으로 선임된 품관이 매 필지마다의 전답에서 소농민과 상대하는 답험실무를 기꺼이 응하려 하지 않아 실제 답험은 향리에 의해 행하여졌다.0774)金泰永, 앞의 책, 258쪽.

답험관들에 대한 접대는 농민들이 맡아 그 폐단이 매우 컸다. 손실의 산정이 위관의 자의적인 심증에 의하여 좌우되는 한, 현지 농민들이 위관에 대하여 음식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어 위관에 대한 접대비가 많이 소요되었다.0775)≪世宗實錄≫권 75, 세종 18년 10월 정묘 및 권 85, 세종 21년 5월 경술. 농민들이 이러한 제도외적 부담을 떠맡을 뿐 아니라, 손실의 산정에 있어서도 그 객관적 기준이 애매하여 자의적으로 행하여져서, 세력있는 부자의 전답에 대해서는 재해에 의한 손이 많이 산정되고 소농민의 전답에서는 그 반대였다.0776)≪世宗實錄≫권 82, 세종 20년 7월 임진. 이와 같이 실제 답험에서는 불공정으로 말미암아 소농민이 침해를 당하게 되었다.

답험손실의 과정뿐 아니라 그것을 집계하는 과정에서도 향리들의 농간이 잇따르고 있었다. 손실의 유무와 다소를 문서화하는 과정에서 가난한 소농민의 전답에 더 많은 세를 부담케 하였으며, 향리의 집계과정에서 한 面에 수십 결씩이나 실전이 은폐되는 은결의 조작이 행하여졌다.0777)≪世宗實錄≫권 93, 세종 23년 7월 기해.

과전법의 조세규정은 세종 26년(1444)에 새로운 전세제도인 貢法으로 개혁되어 성종 20년(1489)에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공법 실시를 위한 논의는 세종 12년부터 전국적으로 여론을 수집하고, 세종 18년에 貢法詳定所를 설치하였으며, 세종 26년에 공법 실시를 위한 최종안이 채택되었다. 공법은 세종 26년에 하3도 6현에 실시되었고, 세종 32년에 전라도, 세조 7년에 경기도, 세조 8년에 충청도, 세조 9년에 경상도, 성종 2년에 황해도, 성종 6년에 강원도, 성종 17년에 평안도, 그리고 성종 20년에는 영안도에서 각각 실시하게 되었다.

공법의 중요한 내용은 전분 6등법과 周尺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양전제의 정착, 연분 9등법과 세율 1/20에 의한 1결당 20두∼4두의 수세량 적용, 그리고 감면의 제도에서 正田·續田의 구분 및 災傷田의 10결 連伏에 의한 감면 규정 등이다.

공법이라는 새로운 전세제도의 개혁에 따라 전결제는 고려의 상·중·하 3등전과 山田에 의한 전품제에서 전분 6등으로 재편성되었다. 공법 이전의 전결제는 3등전품제라고 하나 거의가 하등전으로 실제는 기준이 없는 量田상태이었다.0778)貢法 실시 이전의 結負制는 비록 제도상으로는 上·中·下 3등 田品制이지만 실제로는 전국적으로 1結 57畝의 획일적 운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上田이 1천 결 중 1·2결, 中田은 1백 결 중 1·2결일 뿐 나머지는 모두 下田이며, 그 밖의 도에서는 上田이 전혀 없고, 1천 결 중 1·2결의 中田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下田이었다고 한다(≪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무인). 그리고 전분 6등법은 종래의 隨等異尺指尺에 의한 양전제에서 隨等異尺周尺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양전제로 개혁되었다.0779)貢法 실시 이전에는 농부의 손가락 폭을 기준으로 삼아 上·中·下田 量田尺으로 上·中·下 3등田品으로 구분하고, 山田은 山下田·山腰田·山上田으로 구분되어 왔는데, 貢法의 실시로 指尺 대신 周尺을 기준으로 삼아 1등전 量田尺에서 6등전 양전척까지 6개 양전척을 사용하게 되었다. 다음 田結制 항목 Ⅳ-4-2)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結負의 실적이 비교적 객관적인 토지생산력에 상응하는 것으로 산정되기에 이르렀다. 貢法의 실시와 함께 전분 6등법으로 새로운 周尺量田尺에 의한 양전사업이 뒤따랐다. 공법의 실시로 새로운 기준에 의한 양전사업은 세조 때까지 하3도와 경기도에 행해지고 기타 4도는 성종 때에 이르러 행하여졌는데 후술하기로 한다.

공법은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근절시키기 위해 연분 9등법을 실시하였다. 연분 9등법은 정액세로서 답험손실법의 정률세보다는 제도적으로 객관적인 기준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 연분 9등법에 의한 1결의 세액은 아래와 같다.

상상년(全實) 20두, 상중년(9分實) 18두, 상하년(8分實) 16두

중상년(7分實) 14두, 중중년(6分實) 12두, 중하년(5分實) 10두

하상년(4分實) 8두, 하중년(3分實) 6두, 하하년(2分實) 4두

무릇 세는 수확고의 1/20을 부과하였다. 과전법에서 매 1결당 1/10租인 30두는 1결의 생산고를 300두(20석)로 산정한 것인 데 비하여 공법에서는 1결당 1/20稅로서 상상년 20두로 책정되고 있으니 1결당 생산고를 400두로 산정하고 있는 것이다. 과전법에서 1결당 생산고를 300두로 책정한 데 비하여 공법에서는 1결당 생산고를 400두로 높이 책정하여, 공법 이후 結負制가 공법 이전의 결부제보다 1결의 면적이 축소되어 있다. 그러므로 과전법에서 1/10조가 공법에서 1/20세로 책정되어, 표면상으로는 세율이 감소되고 있으나 공법 실시 이전과 이후의 각 도별 수세액을 비교해 보면 공법 이후의 수세액이 훨씬 증가되어 있다.0780)李載龒,≪朝鮮初期社會構造硏究≫(一潮閣, 1984), 252쪽.

공법에서의 年分等第는 연분 9등법으로 각 등전 1결의 전세액을 최고 상상년 20두로 하고 연분에 따라 각각 2두씩 감소하여 최하인 하하년에는 4두로 되어 있다. 이 연분등제는 각 도의 감사가 각 도별로 논·밭별 등급을 의정부·6조와 의논하여 연분을 결정하되, 필요에 따라 朝官을 파견하여 심사한 후 서면으로 중앙에 보고하여 연분을 정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연분등제 규정은 뒤에 다소 수정되었다. 단종 2년에 한 고을 단위의 연분등제는 너무 소루하다 하여 5방위면 단위로 고쳐 1읍 안에 읍내와 동·서·남·북 등 5방위면의 연분으로 정하게 되었다.0781)≪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8월 정미.

감면의 제도는 토지대장에 正田과 續田으로 구분되었다. 정전은 상경전을 뜻하며, 起耕을 장려하는 의미에서 기경과 진황을 불문하여 세를 거두고, 속전은 혹은 기경하고 혹은 진황하는 토지로서 기경에 한하여 세를 거두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災傷田의 단위는 10결이 연하여 재해를 입어야만 감면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제되어 실질적으로 거의 정액세에 의하여 세를 거두고자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정전 중에는 휴한을 요하는 토지가 편입되어 있거나, 빈곤·질병·유망 등으로 진황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全災傷과 全陳田은 면세한다고 규정되고 있다.0782)≪經國大典≫권 2, 戶典 收稅條.

공법으로의 개혁은 비단 답험손실법의 결함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농업생산력의 발전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대체로 휴한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되어 갔다.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1결당 생산고가 증대되어 토지 파악의 단위 면적에 변화가 일어났다. 고려 후기의 足丁 17결 단위에서 조선 초기 作丁 5결로 줄어들고 있는 데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고려 말까지 족단적이고 집단적인 토지경영에서 소단위 토지경영으로의 변화, 휴한법의 극복과 연작법의 보급 내지 윤작법의 보급, 이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0783)李載龒, 앞의 책, 273쪽. 당시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고려시대의 평전·산전에 의한 전품제에서 전분 6등법에 의한 새로운 전품제로 바뀌고, 또한 전세제도에 있어서도 종래의 답험손실법에서 공법으로 개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법을 실시하는데, 그 원칙이 잘 지켜지지 못하였다. 양전을 비롯하여 연분등제, 진황전 수세나 給災 등에 있어서 그 원칙이 잘 지켜지지 못하고 관료나 향리의 손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집행되어 갔다. 양전에 따른 토지대장이 잘 작성되지 못하였으며, 이에 따라 陳荒·災傷田 등이 제대로 파악될 수 없었다. 이러한 실정으로 16세기에 이르면 연분등제가 하중년의 6두 내지 하하년의 4두로 고정되어 갔고, 공법에 의한 전세 수납은 전세부담자의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따라 그 부담이 다르게 운영되어 갔다.0784)李載龒,<16세기의 量田과 陳田收稅>(≪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88), 319쪽.

전세는 추수 후에 징수하기 시작하여 11월 초부터 서울에 조운으로 수송되며, 이듬해 정월까지 수세를 끝맺어 6월까지 상납을 완료하게 하였다. 다만 평안·함경도의 전세는 현지에 그대로 두어 군자 등에 충당하게 하였다. 서울에 전세를 운송하는 데 부수되어 징수되는 부가세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부가세로서 輸京價 혹은 耗米를 부담케 하였다. 수경가는 조세의 수송비로서 수송거리에 따라 구분되어 비교적 고율이었는데, 정종 때 조운의 기능이 60포에서 12조창으로 옮겨지자 일률적으로 1斛에 대하여 모미 7승을 과세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모미는 조창부터 경창까지 수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을 메꾸어 보충하는 것인데, 수경가에 비해서는 그 부담이 훨씬 가벼운 것이었다. 조창제가 확립되어 모미의 제도가 관청에서 정해진 이후 재래의 수경가와 비슷한 船價가 별도로 존재하였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세종 때 輸納代價로서 5價가 있었다. 세종 12년 8월 호조의 상계에 의하면, 豊儲倉·廣興倉·軍資倉에서 수납하는 세는 원 세액만 징수하고 5가는 제하여 주었는데, 科田에서는 5가를 作者 즉 佃客에게 부담시킨다고 하였다.0785)≪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무인. 5가의 구체적 내용은 분명치 않으나, 각사의 전세 수납 때 船馬·脚力·雇賃의 價로 3가가 부가되어 징수되고 있고,0786)≪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정월 병오. 나머지 2가도 전세 수납에 관계되어 징수되던 비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5가 중 전세 수납에 부가되는 세액이 얼마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대체로 미 1석 기준으로 수납에 소요되는 액수는 4두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0787)李景植, 앞의 책, 129쪽.

태종 때 사전의 전조 납부에는 전객이 미 1석(15두)을 납부하는 데 실제 23∼24두를 바쳤다.0788)≪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8월 갑술. 이것을 1결당 납부액으로 환산하면 전객은 전조인 미 30두, 즉 2석을 납부하는 데 46∼48두가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전조 30두를 제하면 16∼18두는 藁草 10두 이외에 5가 등 수납가가 6∼8두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전의 경우, 전주의 수취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 밖에 쑥[薦]·숯[炭]·섶[薪]·꼴[草] 등의 여러 가지 수렴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농민이 전답에서 새로 부담하는 양은 소출의 4/10이고, 그 중에서 공물 대납가가 6/10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0789)≪世祖實錄≫권 33, 세조 10년 5월 경진. 1결당 소출을 미 300두로 기준을 삼으면, 전세 4/10는 120두가 되고, 그 중에서 공물 대납가가 6/10이라 하니 72두가 된다. 120두에서 72두를 제외한 48두가 전답에 부과되어 징수되는 액수가 되니 私田 전주가 전객으로부터 받아내는 48두와 일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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