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5. 공물
  • 2) 방납

2) 방납

공납제는 전국 각지의 토산·물산을 왕실·정부재정으로서 주로 중앙에 납입하는 것이므로, 중앙으로의 수송이나 납입과정에 있어서 상납의 청부 즉 대납의 문제가 일어났다.

원래 대납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어, 그 하나는 납입물품에 대신하여 다른 물품을 납입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상납해야 할 당사자 대신 납부하는 경우가 있었다. 납입물품 대신 다른 물품을 납입하는 것은 이미 고려 중기 이래 平布로서 折價代納하는 일이 인정되어 이를 절납이라 했다. 조선 태종 때 저화의 興用策으로 공물을 저화로써 상납하는 것이 인정되었으나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상납해야 할 당사자 대신 영리수단으로서 상납을 청부하여 그 代償을 챙기는 것으로 防納이 문제가 되었다.

대납은 고려 말에도 영리를 위하여 행해진 사례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는 그 내용이 복잡하게 변화되어 갔다. 상납의 청부가 대납되며, 대납은 또 방납이라고도 하여, 민호가 직접 상납하는 것을 막고, 민호의 의사를 무시하며 권력으로 누르고 타인으로 하여금 상납을 청부하게 한 것이다.

지방관부에서 공물이 징수되면 향리 중에서 유식하고 재력이 있는 자를 선임하여, 그 물자를 소정의 중앙 각사에 수송하여 납입토록 하였는데, 그를 貢吏라 했다. 공납의 납입기한은 그 물자가 생산되는 계절에 따라 달랐으나, 상납의 최종기한은 그 이듬해 2월까지였다.

공리가 상경하면, 그 고을의 京邸吏 즉 京主人 집에 묵어 경주인의 알선에 의해 공물 상납을 수속하였다. 공리는 상경할 때 반드시 수령의 陳省(上納呈狀)을 받아 이것을 각사에 공물과 함께 바쳤다. 각사는 진성을 받아 공물 물자를 점검하여 납입케 하였다. 공리는 공물의 납품을 마치면 각사에서 准納帖이란 영수증을 받았다.

조선 건국 초의 경우 공물의 청부 상납은 소납 각사의 吏·奴에 의해 행해지거나 관료·승도·상인 등에 의해 행해지는 두가지 유형이 있었다. 공물이 각사에 납부되는 과정에서 관료의 점검은 대체로 형식적이며 실무를 담당한 이·노가 점검하는 직권을 빙자하여 공리에게 뇌물을 강요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이와 같은 각사 이·노의 불법을 억제하기 위해 點退된 공물은 호조에 신고하여 재심사를 받게 하고, 혹은 그 점퇴가 부당한 경우에는 이·노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규정은 한갓 공문에 지나지 않고, 각사 이·노는 공리로부터 뇌물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관료나 商賈 등의 대납 영리에 연결되어 스스로 대납하여 큰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각사의 이·노가 대납하고, 그 대가의 수납은 공물 준납첩을 받아 공물을 납부한 지방관아에서 징수하였다. 각사 이·노 중에는 대납에 의하여 재력을 축적한 자도 있고, 혹은 상인이나 부자·세력가와 결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5세기 전반에는 이·노의 활동이 아직 관료·사족·승도와 비교할 수 없었다.

15세기 전반에 관료·사족·승도·상고의 청부상납은 가장 일반적이었다. 상납청부의 수속과정에서 보면 陳省은 공물 상납 呈狀임과 동시에 청부자에게는 청부인가서이며, 준납첩은 공물 납부증명서임과 동시에 청부자에게는 그 대가 징수의 권리서였다. 그리하여 수령이 진성을 발급하는 것인 만큼 청납자는 수령과 결탁하거나 혹은 세력있는 관료의 요청이나 강요를 통하여 대납을 행하였다. 또한 수령은 관료와의 연결뿐 아니라 부상·승도와도 결탁하여 상납청부를 인정하여 영리를 꾀하였다.

한편 진성은 청부자에게는 인가서이기 때문에 뇌물을 받게 되었고, 그것은 지방관아의 수입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청부자는 공물을 납입한 뒤 중납첩을 가지고 당해 지방관아에 나아가 직접 민호로부터 그 대가를 독촉하여 징수하였다. 그 대가는 으레 2배로 받아 청부자는 큰 이득을 취했으나 민호에게는 극히 가혹한 2중착취여서, 대납의 대가를 독촉하여 징수하는 자를 防納叟라 일컬었다.

공물의 대납은 고려 말 이래 아무런 제약도 없이 행해져 왔는데, 태종 9년에 이르러 비로소 대납에 대한 금령이 반포되었다. 즉 태종 9년에 관료·사족·승려 등이 상납청부를 금지하도록 조처한 바 있다. 그리고 세종 2년에도 대납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공납의 대납은 고려 말 이래의 관행이었고,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배정되며, 공안이 고정되고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정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대납에 대한 금령을 내리면서도 세종 5년에는 민호가 스스로 갖추어 납부할 수 없는 공납은 부분적으로 대납이 공인되었다. 대납의 공인 이래 승도는 관권을 배경으로 그 주도권을 관장한 바 있다. 승도의 대납 활동을 진전시킨 것으로 都廳을 간과할 수 없다. 도청은 원래 內佛堂 건립을 위해 설치되어 사찰의 중수공사를 맡아, 그 경비 마련을 위해 幹事僧의 공납청부가 공인되었던 것이다.

세조 때에 이르러 공물의 상납 청부는 공물 부담자와 청부인과의 동의에 의해 허용되고, 청부의 代償은 수령이 중간에서 조정하여 민호로부터 받아 청부인에게 지급하였다.0806)田川孝三,<貢納請負の公認と禁斷>(앞의 책). 원래 청부물자의 대납은 생산되지 않는 물품으로서 민호와 청부인이 동의할 때에만 행하도록 하였으나, 점차 생산되는 물품 뿐 아니라 공물 이외의 전세·身貢布 등 거의 모든 공과물에까지 적용되었다. 청부의 대가는 수령이 먼저 민호로부터 받아 청부인에게 지급하였는데, 청부인이 공물의 납입을 연체하는 일이 속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청부대가는 시가의 몇 배나 되는 액수를 징수하여 민호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공납청부인은 수령에게 강요하거나 수령과 결탁하는 일이 상례였으므로, 이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뒤에는 청부공인권을 호조에 회수한 바 있다.

세조 5년(1423)에 공납 청부가 공인된 이후 종친·관료·사족·승도·상고 등이 청부인으로 참여했으며, 특히 승도와 상고의 진출이 눈에 띄고, 정부기관으로 忠勳府·刊經都監 등이 청부활동을 주도하였다. 상납청부는 그 자체가 일종의 이권으로 매매되어「納分」이라 했다. 그리고 청부활동은 중앙뿐 아니라 감영, 병영·수영까지 파급되었다. 그런데 대납이 민생을 어렵게 만든 반면 교환경제에 자극을 촉진시킨 바 크다.

한편 건국 초 이래 각사의 이서와 노복은 공물 수납에 즈음하여 점검을 이용해 자의적으로 點退함으로써 그들의 영리를 꾀하였다. 또한 그들은 공물 수납 수속을 짐짓 늦추어 방치하고, 혹은 공물 수납 후에도 영수증인 준납첩을 바로 발급해 주지 않고 공리에게 뇌물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조 12년에 수납기한을 10일 내로 한정시켰다. 즉 貢吏가 바치는 貢物陳省이 호조에 보내지고 다시 각사에 회부된 후 수납기한을 10일간으로 정하고, 수납 당일에 준납첩을 발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호조는 각사의 공물 수납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여 공리의 진성 제출과 준납첩의 발급을 직접 관할하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각사에서 공물을 점퇴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그 취체를 강화하였으며, 공리는 공물 상납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호조와 사헌부에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제정된 이후에도 각사의 이서·노복은 공리를 침해하여 대납하고 본읍에 내려가 대가를 독촉하여 징수하였다. 이와 같은 각사의 이서·노복의 대납은 상사 관원, 혹은 상인, 권세가와 결탁되어 있었다. 대가를 독촉·징수하기 위하여 휴가를 받아 지방에 내려가는 것은 상사 관원의 허가가 필요하였고, 또 대납에 물자를 조달하는 데는 부상이나 권세가와 연결되어야만 하였다.

세조 때까지 관료·승려·상인 등의 청부상납이 활발히 행해졌고 각사의 이서와 노복의 대납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나, 세조 5년에 대납이 공인된 후부터 각사의 이서·노복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종 즉위년(1468)에 대납을 금단토록 조처하였다가 1년도 못되어 완화·개정하고 말았는데, 이 때를 계기로 각사의 이서·노복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때부터 각사의 이서·노복은 종전과는 달리 대납 대가를 본읍에 내려가 독징하는 것이 아니라 각사에 앉아서 무거운 대가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공리는 향리 중에서 공물을 바치기 위하여 선임되었는데 부유하고 유식한 자로써 차정하도록 하였다. 공리는 공물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서강·용산·漢江渡·豆毛浦 등지에 도착하여 소정의 각 江倉에 납부하고, 또한 한성 내에 반입하여 각사의 창고에 상납하였다. 공리가 서울에 올라오면 그가 투숙하는 京邸舍의 이서를 비롯하여 각사의 이서·노복, 혹은 서강·용산의 江民 상인 등에 의하여 박해를 받거나 유혹을 받기도 했다. 또 공리 자신도 유흥으로 경비를 많이 쓰거나, 혹은 점퇴라 사칭하고 민호에게 공물을 다시 징수하거나, 혹은 상인과 결탁하여 공물을 전매하고 이득을 취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공물은 대체로 조운을 통해 서울에 옮겨져 각사의 창고에 상납되었는데, 지방의 각종 물산을 싣고 온 향리인 공리는 마땅히 본읍 京邸舍에 투숙해야 했으나 사적으로 통하는 私主人에게 투숙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공물을 전매하는 일이 번번히 일어났다.0807)田川孝三,<吏胥·奴隷の防納とその展開>(앞의 책). 西江·龍山 등의 江民 중에 사주인이 있어, 그들은 각각 공리를 분점하여 기숙시키는 것으로 가업을 삼아 자손에게 계승하였다. 사주인은 숙소의 제공, 물품 보관, 물품 판매 등을 행하였는데, 그들은 뒤에 등장하게 되는 객주·여각의 전신이었다. 그들은 서강·용산·한강도·두모포 등 한강 연안은 물론 동대문·서대문 부근 등 한성의 도로 요지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교통요로에서 영업하는 사주인은 공물을 수송해 온 공리를 잡아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다. 공리는 때로는 사주인과 공모하여 공물 물자를 전매하여 그 이득을 나누는 일이 적지 않았고, 또한 사주인은 그들의 영업을 이용하여 공리를 침해하기도 했다.

위에서 말한 사주인 이외에 各司主人이 있었다. 그들은 각사 사주인이라고도 일컬었는데, 공리가 공물을 상납할 때 그 물자를 검사하면서 뇌물을 강요하거나 혹은 대납하기도 했음은 전술한 바 있다. 중앙에서 전곡을 맡는 관아의 물자출납은 관아의 장이 관리 책임을 졌고, 창고의 출납은 반드시 사헌부 감찰의 검찰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중앙관아마다 급히 전곡을 사용할 경우에는 바로 검찰을 받아 처리하기 어려워 흔히 규정된 창고 이외의 곳에 전곡을 저장하여 外庫라 하고 그 물자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외고는 관제 외의 것이므로 출납에 엄한 규정이 없고 자유스러웠다. 이 외고를 私庫라 하기도 하며, 사고에는 창고를 지키는 이서와 노복을 두어 관리케 하였으므로 그들도 각사주인 혹은 각사 사주인이라 하였다. 각사 사주인의 발생은 세종 초부터이며, 그들은 관원에 대한 음식의 제공 및 물자의 조달을 직임으로 하였으므로 미천하나마 굳건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방납으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세조 때부터 각사의 이서·노복인 각사 사주인의 활동이 활발해져, 그들에 의한 공물의 상납 청부는 방납으로 귀결되었다. 종전에서 각사의 이서·노복은 준납첩을 받아 본읍에 가서 대가를 독촉해 징수하였으나, 이제는 오로지 공리에게 징구하면, 공리는 부득이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공리를 통하여 민호에 대한 수취로 돌아갔다.

일찍이 세조 이전부터 공리와 각사 사주인은 공모해 왔으므로 성종 초에는 공리와 각사 사주인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제재하도록 규제되었다. 그러나 연산군 초에는 양자 간에 깊은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각사 사주인에게는 공리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일로 공리에 대한 쟁탈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江民 私主人과 각사 사주인의 공리 확보 경쟁에서 결과적으로 각사 사주인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래에 각사 사주인의 대납은 점퇴나 상납수록의 연체 등으로 공리를 궁지에 몰아 그들을 속여 유인하는 것이었으나,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이르러 각사 사주인은 공리에 대한 침해자에서 벗어나 업자로서 공리와 결탁하여 공납청부업자로서 성장해 갔다. 그들은 공리를 상대로 하는 여숙·창고업을 하고 조합조직을 형성하여 공납청부권을 독점해 나갔다.

15세기 후반에 각사의 이서·노복이 공납청부의 주도권을 쥐고 직업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공부의 布納化가 전국적인 형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각사의 이서·노복은 상납청부의 대가를 받는 것이 상투적 수법이었고, 이에 따라 지방관은 상납물자를 수송하는 대신 그들에게 면포나 미곡을 대가로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이와 같이 각사 사주인 등 청부자가 방납하는 것에 따라 지방관은 공물 물자 대신 布物을 징수하여 수송하였던 것이다.0808)田川孝三,<貢納·徭役制の崩懷と大同法>(앞의 책). 비록 토산물이 있어도 상납할 수 없었다. 또한 지방관이 현물로 상납하고자 할지라도 방납청부업자가 물리쳐버리는 것이었다.

官備貢物은 민호에게 과중한 요역이 되었는데, 공물의 포납화에 따라 요역도 포납화되었다. 공물의 포납화 이외에도 신역이 포납화되고 잡역도 포납화되어, 군현에서는 혹은 地稅化하거나 혹은 인두세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납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貢案을 개정하고 방납을 두절케 해야 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 개혁의 성과는 私大同에 집약되어 나타났고, 이 사대동은 貢物作米, 半大同과 함께 대동법의 선행형태로 분류되었다.0809)高錫珪,<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李載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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