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8. 역
  • 1) 요역

1) 요역

국가에서 민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역은 일시적인 요역과 항구적인 국역으로 나눌 수 있다. 역은 人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나, 국가에서 사역시키는 대상인 인정에 따라 戶役과 身役이 있고, 또한 인정이 종사하는 역의 내용에 따라 요역·군역·定役의 구별이 있었다. 호역은 인정을 개별적으로 지정하지 않고 호를 통해 부과하는 역이며, 신역은 국가에서 개별적으로 지정한 인정에 부과하는 역이어서 요역은 호역이며, 군역·정역은 신역이었다.

요역은 雜役·雜徭·所耕徭役·戶役·力役·賦役 등 여러가지 명목으로 표현되었다. 잡역·잡요는 수취제도의 한 형태로서 요역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반영하는 용어이며, 잡다한 종목으로 요역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소경요역이라 함은 요역을 징발하는 기준이 개별 민호의 전지 소유면적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所耕田稅가 전세를, 所耕貢賦가 공부를 뜻하는 것과 같은 표현방식이다. 세종대 이후 요역이 전지소유면적을 기준으로 부과되었고, 그러한 원칙은≪경국대전≫에 법제화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0821)尹用出,<15·16세기의 徭役制>(≪釜山史學≫10, 1986), 6∼7쪽.
有井智德이 所耕徭役과 雜役으로 구분하여, 전자는 中央的·國家的인 요역이며, 후자는 잡다한 地方的인 요역으로 주장한 데에 대하여, 尹用出은 所耕徭役·所耕田雜役·雜役은 모두 같은 것이며 따라서 지방적인 雜役과 구분되는 所耕徭役이 따로 존재한 것은 아니라 하였다. 有井智德은 요역을 크게 所耕의 요역과 雜役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所耕의 요역에는 다시 貢賦의 역과 田稅의 역, 기타의 역이 포함되어 있다 하였고, 所耕의 요역은 戶가 보유한 所耕田의 다소에 따라 人丁을 내는 요역이었는데, 그 속에 貢賦의 역은 貢物의 생산 및 貢物을 중앙 各司에 수송하는 역이며, 田稅의 역은 전세를 정해진 창고에 수납하는 역이다. 기타의 역은 進上을 중앙에 수납하는 일, 使臣의 화물 전송, 邑城의 수축, 堤堰의 수축 등 여러 가지라 하였다. 그리하여 所耕의 요역은 모두 왕실 및 중앙정부에서 限定的으로 부과하는 데 비하여, 잡역은 대체로 지방관부의 잡다한 요역으로 지방관부의 필요에 따라 일정한 기한이 없이 수시로 동원되었다고 하였다(有井智德,<朝鮮初期の徭役>,≪朝鮮學報≫30·31, 1963, 97쪽).
호역이란 개별 민호에 부과된 부역이란 뜻인데, 요역은 신역과 구별되는 요역의 특성과 관련하여 호역이라 한 것이다. 역역이란 조선 초기에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물납으로 전환하기 이전의 요역을 말하는 것이다. 부역은 신역이나 요역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개념의 용어이지만 때로는 이것이 요역과 동의어로 혼돈되기도 했다.

요역의 부담은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 천인에 이르기까지 호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국민에게 신분과 직역을 불문하고 부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요역을 위한 出丁의 기준에는 호 내의 인정의 다소를 보아 출정수를 결정하는 計丁法과 호가 보유하는 소경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출정수를 결정하는 計田法, 그리고 인정의 다소와 소경전의 다과를 참작하여 出丁의 수를 결정하는 計丁·計田折衷法 등이 있었다.

태조 원년에 16세 이상 60세까지를 丁이라 하고, 각 호의 정수를 호적에 기입하여 10정 이상의 호를 대호, 5정 이상 9정까지의 호를 중호, 4정 이하의 호를 소호로 삼아, 요역에는 대호에서 1명, 중호는 2호를 아울러 1명, 소호는 3호를 아울러 1명을 출정케 하는 계정법이 시행되었다.0822)≪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임인. 그러나 계정법은 철저하지 않아 계전법이 시행되는 지역도 있어 출정의 기준이 일정치 않고, 민정의 출정은 지방에 따라 관찰사·수령 등 지방관의 자의에 맡겨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종 원년에 각 호의 소경전과 인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출정의 다소를 결정하는 이른바 계정·계전절충법이 시행되었다.0823)≪太祖實錄≫권 15, 태조 7년 9월 정해 定宗卽位之敎.

그러나 세종 때에는 계전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세종 2년에 요역은 모두 소경전의 다과를 출정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세종 17년에는 戶가 보유하는 소경전의 다과에 따라 대호(50결 이상)·중호(30결 이상)·소호(10결 이상)·잔호(6결 이상)·잔잔호(5결 이하)의 5등호로 나누어 출정케 하고, 다만 경중 5部에서는 가옥 間數에 따라 대호(40칸 이상)·중호(30칸 이상)·소호(10칸 이상)·잔호(5칸 이상)·잔잔호(4칸 이하)의 5등호로 나누어 출정의 수를 정하였다.0824)≪世宗實錄≫권 10, 세종 2년 11월 기사 및 권 67, 세종 17년 3월 무인. 그리고 성종 초에는 계전법이 한층 구체화되어 모든 소경전 8결마다 1夫를 출정하도록 정해지고, 이 내용은≪경국대전≫에 그대로 규정되어 조문화되었다. 세종 때 이래 계전법이 확립되었다 하여 모든 요역이 계전법에 의해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중앙의 국가적 큰 역사에 계전법이 적용된 까닭은 당시의 호가 보유하는 소경전이 균등하지 못하여 현격한 빈부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역에서 민정을 사역시키는 계절과 기간은 세종 12년에 10월부터 역을 시작하여 평년은 20일간을 원칙으로 하되, 풍년에는 30일, 흉년에는 10일로 하며, 봄철에는 사역시키지 않도록 규정되고 있다.0825)≪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임자. 그 후 성종 2년에 이르러 田 8결에 1夫를 내고 1부의 사역기간은 6일을 넘지 못하도록 결정되어0826)≪成宗實錄≫권 13, 성종 2년 12월 병자. 이것이≪경국대전≫에 조문화되었으나, 그 규정은 현실적으로 지켜지기가 어려웠다. 민정은 사역시키는 기간이 지켜지지 못하고 실제의 역사에 대한 代償으로서 물품 납입 규정이 없었던 것은 노동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요역에서 人丁의 배정은 각 도의 관찰사가 그 역에 소요되는 인정의 수를 정하여 도 내의 군현에 배정하였다. 군현의 수령은 각각 자기 군현에 배정된 인정의 수를 다시 소경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군현 내의 각 호에 배정하였다. 각 군현에서 인정을 사역시키는 순서는 役所 부근 각 관부터 차례로 징발하였는데, 한 고을 내에 거주하는 役民을 징용하는 구체적 순서는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령이나 향리는 세력있는 자를 빠지게 하고 세력없는 잔호만 사역시키는 폐단이 심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초에 역민의 장부를 작성하고 출정의 기준에 따라 각 호의 출정수를 분명히 기록하여, 이에 따라 수령이 친히 뽑아 차례로 역을 부과하게 하고, 관찰사가 이 일에 대한 부정을 수사하여 증거를 수집토록 하였다.0827)有井智德, 앞의 글, 100쪽.

요역 중에 인정은 원칙적으로 스스로 식량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농사 때를 놓쳤거나 아주 괴로운 역일 때에는 식량을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정이 요역에 동원되었을 때 식량뿐 아니라 여러 가지 물품을 징수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요역에서 민호의 부담은 극히 무거웠다. 이 무거운 부담은 제도가 불비한 데다가 관리의 부정이 더하여, 실제로는 빈민호에 무겁고 부민호에 가볍게 부과되었다. 또한 군현제와의 관련에서 지역적 불균등이 심하였다. 즉 군현의 크고 작음, 主邑과 속현, 월경지와 치소의 편재, 군현의 특정한 위치 등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작은 읍은 큰 읍보다, 속현은 주읍보다, 월경지는 월경지가 아닌 곳보다, 치소가 한쪽에 편재한 경우는 가까운 곳이 먼 곳보다 무거운 부담을 짊어졌다. 또한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군현은 일반 군현보다 무거운 요역을 부담하였다. 특히 경기도 군현의 요역은 타도보다 훨씬 무거웠다. 경기도는 타도와는 달리 藏氷·왕릉 축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역사 및 여러 물납요역을 민호에게 부과시켰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역에는 요역·군역·定役 등이 있어, 요역은 특정한 人丁이 아닌 자들을 토목·영선·물품의 생산이나 운송 등에 사역하는 것이며, 군역과 정역은 특정한 인정을 군사 및 국가의 필요한 일들에 종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역으로서 일반 인정을 사역시키는 토목·영선 등에 군역·정역에 종사하는 특정의 인정이 사역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군정이 건국 초부터 군역 복무 중에 요역에 동원되어, 점차 군역에서 요역의 비중이 커지며 군정의 역졸화 현상이 일어났다. 즉 正兵·水軍·防牌·攝六十·彭排·隊卒 등의 군정이 토목·영선 등에 동원되어 점차 역졸화하였는데, 그것은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 요역의 특색으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 수 있다. 당시 국가에서 요역에 필요한 총노동력에 비하여 실제 노동력이 아주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요역 부담의 의무를 신분과 직업의 구별 없이 모든 민호에 부과하였는데, 그것은 개별 민호의 부담을 과중케 하여 役民이 계절과 기한의 규정을 준수할 수 없게 하였으며, 실제 역에 대신하는 물품 납입의 제도를 불필요하게 하고 군역의 요역화를 촉진시켰다. 요역 부담은 지역적 불균등이 심하였고 특히 경기도의 요역이 과중하였다. 그리고 민정은 다만 노역에 복무하는 것만이 아니라 식량을 비롯하여 여러 물품도 스스로 부담해야만 했다. 또한 공부의 비중이 컸고 수송관계의 역이 많았으며, 잡역을 규제하는 일반적인 규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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