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1. 도로의 정비
  • 2) 외방 도로의 정비
  • (1) 전국의 도로망

(1) 전국의 도로망

도성의 주요 가로망은 각 성문, 즉 崇禮門·興仁門·敦義門·昭義門·惠化門·光熙門·彰義門 등을 통하여 외방으로 나가는 도로망과 연결되었다. 한양이 나라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전국의 도로망은 한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전국의 도로망은 더욱 정비되었는데,≪增補文獻備考≫에서는다음<지도 2>및<별표>와 같이 9개의 대로를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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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朝鮮時代의 主要 道路網
<지도 2>朝鮮時代의 主要 道路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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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표>朝鮮時代의 道路網
<별표>朝鮮時代의 道路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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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외방으로 뻗은 외방 도로는 그 멀고 가까움에 의하여 대로·중로·소로로 나뉘었다. 도성의 가로가 노폭에 의하여 대로·중로·소로로 구분된 것과는 달리 외방도로의 등급은 한양에서의 거리에 의해 구분되었다. 도로의 등급을 영남로의 경우를 들어 살펴보면,≪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죽산 分行驛까지를 대로, 거기서 상주 洛陽驛까지를 중로, 그 이하는 소로라 하였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광주 樂生驛까지를 대로, 거기서 상주 낙양역까지를 중로라 하였다.0846)崔英俊,<朝鮮時代의 嶺南路硏究>(≪地理學≫11, 1975), 59쪽.

물론 노폭도 다소 고려되고 있었다.≪磻溪隨錄≫에 의하면 대로는 12보, 중로는 9보, 소로는 6보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규정대로 도로의 너비가 닦여진 것은 아니었다. 길이 지나는 지형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과천 양재역에서 판교 사이에 있는 달이내고개, 문경의 새재, 회양의 철령 등의 길폭은 1∼2보에 불과하고 경사가 급하여 수레의 통행이 힘들었고 사람이 간신히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통행의 길목에는 이정표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도로의 거리는 周尺 6척을 1보, 360보를 1리, 30리를 1息이라 하였다. 그리고 10리마다 小堠(작은 이정표), 30리마다 大堠(큰 이정표)를 세우고, 거리와 지명을 표시하였다. 또 5리마다 정자를 세워 五里亭이라 하고, 30리마다 楡柳를 심어 여행자가 쉬게 하였다.0847)南都泳,<陸上交通>(≪서울六百年史≫제1권, 1977), 556쪽.

전국적으로 뻗은 외방도로의 起點은 처음에는 창덕궁 돈화문이었다. 돈화문에서 각 성문으로 길이 갈라지고 다시 각 성문에서 전국으로 도로망이 개설된 것이다. 그 후 도로 원표는 경복궁 광화문 앞을 기점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도로망과 거리수가 계산되었는데 커다란 차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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