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3. 수상교통과 조운
  • 1) 조운제의 정비
  • (2) 조창의 설치와 관리

(2) 조창의 설치와 관리

관선조운체제에 있어서 그 경영의 핵심은 조창과 조선·조군의 확보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조운의 건실한 경영을 꾀하고자 한다면, 우선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로 인해 황폐된 漕倉의 복구에 힘써야 했다. 조창의 설치는 대체로 고려의 것을 복구함에서 시작되었다. 즉 경상도에서는 공양왕 때 漕轉城의 형태로 복구되었다고 보이는 馬山倉(昌原), 通陽倉(泗川)과 이 때를 전후하여 설치된 佛巖倉(金海)이 도내의 세곡, 특히 남부 연해안 지방의 세곡을 나누어 조운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石頭倉·通陽倉에 새로이 佛巖倉이 증설된 것이었다.0861)六反田豊,<李朝初期の田稅輸送體制>(≪朝鮮學報≫123, 1987), 48쪽. 한편 북부 내륙지방의 세곡은 고려시대 이래로 鳥嶺이나 竹嶺을 넘어 한강의 수로를 이용해 상납되었는데, 지역의 생산조건에 의해 布貨로 대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세곡을 상납하고 있던 전라도에서는 역시 공양왕 때 복구된 龍山城·榮山城 등의 조전성에 인근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하던 체제를 계승, 조창으로서의 설비를 강화하고 있는데, 이 역시 고려시대의 세곡 수납처인 鎭城倉과 海陵倉의 옛터 또는 그 인근에 설치한 것이다. 용안성은 그 후 태종 17년(1417) 창사를 새로이 조영하면서 得城倉이라 하였다가, 세종 10년(1428) 득성창이 자리한 金頭浦 포구 앞으로의 물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함열의 皮浦로 옮겨 德成倉이라 하였다. 그러나 피포 역시 항구적인 포구가 아니어서 성종 18년(1487)에 다시 용안 금두포로 옮겨 득성창이라 했다.0862)≪新增東國輿地勝覽≫권 34, 全羅道 咸悅 古跡.
≪世宗實錄≫권 42, 세종 10년 12월 기해.

다음으로 충청도에서는 고려시대 이래로 크게 두 개의 운송로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즉 서해안을 경유하는 경우와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다.≪경국대전≫에는 可興倉과 貢稅串倉이 충청도 지역 세곡의 조운 거점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초기에는 보다 여러 곳에서 세곡을 수납하고 있었다. 예컨대 서해안 지방의 세곡은 貢稅串·慶陽浦·犯斤川 등지에서, 내륙 지방의 세곡은 한강 연안의 淵遷·仰巖·오亏音安浦·推乎浦·梨浦 등지에서 수납되어 경창으로 운송되었다.0863)≪世宗實錄地理志≫권 149, 忠淸道 總論. 이들 세곡의 수납처도 대개 고려시대의 조창 또는 조운포구의 옛터 또는 인근의 편리한 지역에 마련되었다. 즉 慶陽浦는 河陽倉이, 淵遷 즉 金遷은 德興倉이었던 곳이다. 그 밖에 강원도에는 興原倉과 昭陽江倉이, 황해도에는 金谷浦倉이과 助邑浦倉이 설치되어 각기 한강과 예성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인근 지방의 세곡을 운송하였다.

구 분 漕倉名 漕倉의 收稅區域 부속조선수
直 納 京 倉
(서울)
京畿諸邑과 江原道의 淮陽, 金城, 金化, 平康, 伊川,
安峽, 鐵原
 








可 興 倉
(忠州)
慶尙道 諸邑과 忠淸道의 忠州, 陰城, 槐山, 淸安,
報恩, 丹陽, 永春, 提川, 鎭川, 黃澗, 永同, 淸風, 延豐,
靑山
51척
興 原 倉
(原州)
江原道의 原州, 平昌, 寧越, 旌善, 橫城
昭陽江倉
(春川)
江原道의 春川, 洪川, 麟蹄, 楊口, 狼川


金谷浦倉
(白川)
黃海道의 海州, 延安, 豐川, 信川, 長淵, 文化, 康翎,
甕津, 松禾, 長連, 殷栗, 白川
20척
助邑浦倉
(江陰)
黃海道의 江陰, 黃州, 瑞興, 平山, 鳳山, 谷山, 遂安,
安岳, 載寧, 新溪, 牛峰, 兎山





貢稅串倉
(牙山)
忠淸道의 牙山, 瑞山, 韓山, 連山, 林川, 定山, 公州,
洪州, 新昌, 結城, 保寧, 全義, 靑陽, 尼山, 大興, 石城,
海美, 泰安, 天安, 庇仁, 恩津, 木川, 沔川, 燕岐, 德山,
舒川, 稷山, 鴻山, 扶餘, 藍浦, 禮山, 康津, 平澤, 溫陽,
淸州, 文義, 懷德, 鎭岑, 沃川, 懷仁
60척
德 成 倉
(龍安)
全羅道의 龍安, 全州, 任實, 南原, 臨陂, 金堤, 長水,
金溝, 雲峯, 益山, 萬頃, 礪山, 錦山, 珍山, 泰仁, 沃溝,
鎭安, 高山, 茂朱, 咸悅
63척
法 聖 倉
(靈光)
全羅道의 靈光, 興德, 玉果, 扶安, 咸平, 珍原, 潭陽,
茂長, 長城, 井邑, 谷城, 昌平, 古阜, 淳昌, 高敞
39척
榮 山 倉
(羅州)
全羅道의 羅州, 順天, 康津, 光山, 珍島, 樂安, 光陽,
和順, 南平, 同福, 興陽, 務安, 綾城, 靈巖, 寶城, 長興,
海南
53척

<표 1>15세기 漕倉의 수세 구역

(≪經國大典≫,≪新增東國輿地勝覽≫) 

조창의 신속한 복구는 용이하지 않았으나, 창고의 보수와 증설로서 조운의 조기 정상화를 꾀한 정부의 노력은 점차 실효를 거두어 체제가 갖추어져 갔다. 아울러 운영 관리에도 세심한 배려가 경주되어 조선왕조의 조창은≪경국대전≫의 반포를 계기로 9개 조창제로 정리되어 갔다.0864)崔完基,<朝鮮前期漕運試考>(≪白山學報≫20, 1976), 402쪽. 즉 아산의 貢稅串倉에선 충청도, 충주의 可興倉에선 충청도와 경상도, 함열의 德成倉과 나주의 榮山倉 그리고 후에 새로이 설치된 영광의 法聖浦倉에선 전라도, 원주의 興原倉과 춘천의 昭陽江倉에선 강원도, 배천의 金谷浦倉과 강음의 助邑浦倉에선 황해도의 세곡을 수납하여 운송하였다.0865)≪經國大典≫권 2, 戶典 漕轉. 기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는 직접 京倉으로 납부하였고, 변방인 평안도와 함경도의 세곡은 그 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방을 위해 그 지방에 그대로 두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평안도 지방의 세곡은 한때 경창으로 조운되기도 하였다.

조운은 크게 海運과 站運(水運)으로 나뉜다. 조운의 편의를 고려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이었지만, 처음에는 고려를 계승하여 서해안, 남해안 요소에 몇 개의 조창을 설치하고, 이를 기점으로 한 해운에 역점을 두었다. 즉 건국 직후 왜구에 대한 경비책을 강화하여 왜구의 횡포가 점차 제거되면서 각 지방의 세곡을 해운토록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연해안은 다도해로서 항로의 사정이 양호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장연의 長山串, 태안의 安興梁, 강화의 孫乭項, 임천의 南堂津, 영광의 七山梁 등은 험난한 해로로 유명하였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항해기술도 이같은 지형조건을 쉽게 극복할 만큼 뛰어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서는 조선이 난파 좌초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즉 태조 4년(1395)의 경상도 조선 16척, 태종 3년(1403)의 경상도 조선 34척, 태종 14년(1414)의 전라도 조선 66척, 세조 원년(1455)의 전라도 조선 55척의 침몰은 그 중에서도 큰 사고였다. 이같은 조선의 침몰은 국가 재정상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조군의 확보문제와 아울러 민심에 끼치는 영향도 컸다. 그리하여 이를 시정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陸運論·賃船論·漕渠策 등 온갖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실효를 거두기가 힘들었다. 여기에 조운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부분적 수정책으로서 제시된 것이 경상도 세곡의 수운화였다. 태조의 조운 정책을 계승하려 한 태종은 造船作業을 강행하면서 조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연이은 조선의 침몰로 해운정책을 계속 고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河崙의 건의를 좇아 경상도 조세의 陸轉化를 명령한 조치가 그것이다.0866)≪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정사. 이는 명목은 육전화이지만, 실제로는 낙동강과 한강을 경유하는 수운화를 의미한다. 즉 충주 金遷에 새로이 慶原倉을 설치하여 지금까지 해로를 경유하여 조운하던 경상도 연해안지방의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다시 경창으로 운송토록 하였는데, 이로써 낙동강 연안의 김해 등지에서는 사선을 세내어 세곡을 경원창에 납부하였다. 그 후 세조 11년(1465)에는 경원창을 인근의 可興里로 옮겨 可興倉이라 하고, 그 규모를 확장하여 경상도 세곡은 물론 梨浦·推乎浦 등지에서 수납하던 충청도 지역의 세곡도 총괄하여 수납 운송케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5세기에 있어서의 조창은 창고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창고의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가흥창을 예로 살펴보면, 창고의 설비가 이루어진 것은 중종 16년(1521)으로서, 충청감사 李世應과 경상감사 金安國 등이 의논하여 부근의 廢寺를 철거하여 약 70칸의 창고를 지으면서였다. 지금까지는 창고라고 하지만 이름뿐으로서 양곡을 저장하는 칸살도 없이 강변에 노적하였는데, 이 때문에 비바람에 쓸려가고 도둑 맞기가 예사였다.0867)≪新增東國輿地勝覽≫권 14, 忠州 倉庫. 이와 같은 사정은 아산의 貢稅串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초 이래로 貢稅串 등 여러 곳에서 세곡을 수납하던 충청도 서해안 지방에서는 성종 9년(1478) 이후 공세곶에서 통합함으로써 조창 이름도 공세곶창이라 하였는데, 역시 창고의 시설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로 조창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가흥창의 창사가 마련된 2년 뒤인 중종 18년(1523)에야 비로소 80칸의 창고 시설이 이루어졌다.0868)≪新增東國輿地勝覽≫권 20, 牙山 倉庫.

경상도 세곡의 수운화가 시행되었다고 하여도 조정의 위정자들이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은 해운이었다. 그것도 전라도 세곡의 조운이었다. 국가의 재정이 이 지방에서 조운되는 세곡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의 세곡은 태종 때에 7만 석에 가까웠고, 그 후 점차 증대하여 중종 때에는 10여만 석에 이르렀다. 양란 후에는 전결의 감축으로 세액도 크게 줄었는데, 인조 때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에서 수납하던 세곡은 40,176석으로, 이는 총세액 82,849석의 50%에 해당하는 것이다.0869)≪仁祖實錄≫권 41, 인조 18년 12월 정미. 이와 같이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전라도 세곡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일찍부터 그 세곡의 운송에 깊이 유의하고 있었고, 조창의 관리 역시 전라도에 소재한 조창 경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해운하는 4개 조창 중에서 3개소가 전라도에 소재하고 있었다. 즉 국초에는 득성창(덕성창)과 영산창에서 세곡을 분담 수납하였는데, 그 후 세곡의 양이 많아지면서 일찍이 고려시대에 芙蓉倉이 있었던 곳에 세조 11년(1465) 法聖浦倉을 증설하여 3개 조창에서 전라도의 세곡을 분담, 조운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영산창 소속의 조선 다수가 七山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0870)≪中宗實錄≫권 16, 중종 7년 9월 무술. 이에 위정자들은 영산창의 경영에 회의를 표명하고,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영산창에서 수납하던 각 고을의 세곡은 법성포창으로 이관되고, 법성포창 소속의 일부 고을은 용안의 득성창이 다시 옮겨진 옥구의 群山倉으로 관할이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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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조창의 분포와 조운로
<지도 1>조창의 분포와 조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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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의 설비가 미비하였던 15세기에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창의 관리에 유의하였다. 즉 연해안의 해운에 있어서는 海運判官을, 수로연변의 참운에 있어서는 水站判官을 두어 각 조창에서의 세곡 출납과 반출을 감독 관리케 하였다.0871)六反田豊, 앞의 글. 이들 관원은≪경국대전≫이 편찬되는 전후, 즉 조운제가 정비되는 시기에 설치되었다고 보이는데, 그들의 직무는 1차적으로 조선·조군의 관리에 있었으나, 세곡의 출납과 운송 도중에서의 점검도 직무의 하나였다. 또 실제 세곡의 수납에 임하여서는 判官을 수행하여 書記·使令 등의 임시요원이 있어 창고 행정을 맡았고, 평상시에는 이와 별도로 각 조창에 庫直 수 명을 배치하여 세곡의 간수에 힘썼다. 또한 창고에 대하여는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이를 주관하는 감독관이 反庫, 즉 물품 재고조사를 행하여 현물과 장부가 일치하는가를 검사하였으며, 재고품의 보존 관리가 적합한가를 조사하였다.0872)崔完基, 앞의 글.

각 조창에 수납된 세곡은 일정한 시기에 조선에 실어 해운 또는 수운을 통해 京倉으로 집결되었다. 경창이란 한양의 남쪽 강변에 설치된 중앙정부의 창고를 말한다. 즉 해운을 통하여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온 충청·전라·황해도의 세곡은 서강변에 위치한 廣興江倉과 豊儲江倉에, 수운을 통하여 한강상류를 흘러 온 경상·강원·충북의 세곡은 용산강변에 위치한 軍資江監과 豊儲江倉에 수납되었다. 이들 중앙정부의 창고는 모두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된 이래 국가 재정을 맡아 왔는데, 광흥창 세곡은 정부 관료의 녹봉으로, 풍저창 세곡은 왕실의 비용으로, 그리고 군자감 세곡은 군량미로 각기 충당되었다. 본래 이들 창고는 재정을 맡은 관서였지만,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江倉·江監의 시설을 한강 연변에 마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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