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Ⅴ. 교통·운수·통신
  • 3. 수상교통과 조운
  • 1) 조운제의 정비
  • (3) 조선·조군의 확보

(3) 조선·조군의 확보

관선조운제에서 핵심은 조창의 관리와 아울러 조선·조군의 확보에 있었다. 즉 개개 농민 혹은 고을을 단위로 하여 조창에 수납된 세곡을 다시 경창으로 조운하기 위해서는 조선과 이를 부리는 조군이 필요하였다. 특히 운송의 매체인 조선은 조운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이에 국가로서는 조선의 확보를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다. 실제로 조선의 확보가 용이할 때에는 관선조운의 운영 역시 원활하였고, 조선의 확보가 용이하지 않을 때에는 관선조운의 운영도 침체의 길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造船作業에 지극한 관심을 보였고, 조선의 사후 관리에도 신중을 기하였으며, 나아가 조선작업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병선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선박의 건조와 관리를 위하여 그 초창기부터 담당기관을 두고 있었으니, 司水監이 그것이다. 사수감은 그 후 司宰監·司水色·典船色 등으로 명칭이 바뀌더니≪경국대전≫에 典艦司로 정착되면서 전국의 모든 선척을 관장하였고, 세곡 운송을 맡은 조선·참선의 관리도 담당하였다. 전함사에는 관원으로 도제조·제조·제검·별좌·별제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선박을 관리하였을 뿐 아니라 造船도 주관하였던 전함사는 그 기구가 內司와 外司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사는 서울의 중부 澄淸坊에 있었고, 외사는 西江에 있었는데, 내사에는 선박의 관리 혹은 조선의 관리 사무를 주관하였고, 서강 연변에 있던 외사는 그 자체가 바로 조선소였다.0873)姜萬吉,<李朝造船史>(≪韓國文化史大系≫Ⅲ, 1970), 884쪽. 물론 조선시대에 조선 작업은 한강 연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삼남지방의 수영을 비롯한 각 처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하튼 왕조 초기에는 관선의 건조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국립조선소로서의 전함사의 역할이 컸다.

조선시대의 조선작업은 대체로 병선보다도 漕船에 치중하고 있었다. 조선의 대규모 건조 작업은 태종 때에 비롯되고 있다. 조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던 태종은 그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운송의 매체인 조선의 건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태종은 즉위하자 곧 삼도조운체찰사 林整에게 대규모의 조선작업을 명하여 그 이듬해 251척의 조선을 건조하였다. 이어서 태종 10년(1410)에는 병선 185척을 건조하였고, 태종 13년(1413)에는 조운에 쓰일 平底船 80척을 건조하였다. 그 후 세종조에는 선박 건조작업의 기사가 그리 보이지 않는데, 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작업은 크게 활기를 띠었다. 세조는 그동안 화평의 기운으로 다소 해이해진 국가 질서를 확립하여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법제의 정비가 단행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충실한 국가 재정이 요구되어, 여기에 조운제의 중요성이 제고되면서 그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조선의 건조작업이 대대적으로 시도되었다. 즉 감조경차관 安哲孫의 지휘하에 각 고을에서 船匠과 목공 3백 명이 징발되어 전라도의 변산과 완도를 중심으로 작업이 전개되어 당년에 조선 100여 척을 건조하였다.

나아가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漕船의 확보를 위하여 각 조창의 조선 수효를 법제적으로 명시하였다. 해운에 있어서는 貢稅串倉에 60척, 德成倉에 63척, 法聖倉에 39척, 榮山倉에 53척을, 그리고 한강 상류를 관장하는 좌수참 즉 可興倉·興原倉·昭陽江倉에 두루 51척, 한강 하류를 관장하는 우수참 즉 金谷浦倉·助邑浦倉에 두루 20척을 규정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은 조선의 修改年限도 규정하였는데, 건조 후 8년에 수리하고, 또 6년 후에 다시 수리하며, 그리고 다시 6년 후에 개조한다고 하였다. 조선의 수명을 20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을 운항하지 않는 평시에는 매 선박마다 2인의 선인을 지정 간수케 하고, 조선 운항에서 침몰하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에는 포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는 조선 확보를 위한 당국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세곡운송에 있어서 각 조선의 적재량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려조에 있어서 해운에선 1천 석, 수운에선 2백 석이었으며, 조선조에도 대동소이하였으리라고 보는데, 17세기의≪磻溪隨錄≫에서는 海船에 8백 석을 적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0874)柳馨遠,≪磻溪隨錄≫권 3, 田制後錄 上, 漕運.

한편 정부는 관선조운제를 확립하면서 조선의 확보와 함께 漕軍의 확보에도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조선이 조운의 객체라면,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조군의 확보 역시 관선조운을 운영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다. 조군은 漕卒이라고도 불리는데, 沙工과 格軍으로 구분되어 그 업무가 분화되기도 한다. 이들 조군은 거의 세습직이었는데, 사공은 물론 격군도 신분은 양인이었으나 천역에 종사해야 하는 이른바 身良役賤에 속한 계층이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법제상으로는 賞職도 받을 수 있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혹독한 노동력의 착취로 교육의 기회가 전혀 부여되지 않았으니, 매년 계속되는 세곡의 운송, 허다한 잡역, 위험부담율이 큰 해상 활동 등은 그들의 자유로운 생존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避役의 길만 모색하는 상황 속에서 정부는 조군의 확보를 위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수군이 조운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른바 漕轉船軍이 그들이었다.0875)金鎔坤,<朝鮮前期의 漕運>(≪明知史論≫창간호, 1983), 83쪽. 따라서 당시의 수군은 番次로 해상 방어와 조운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원래 수군의 조운 활동은 14세기 후반 연해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로 인하여 조운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연해안 방비, 다른 한편으로는 세곡 운송의 역할을 수행치 않을 수 없었던 데서 연유한다. 15세기에 들어서서 왜구의 횡포가 제거되어 가는 속에서도 수군의 겸무는 시정되지 않고, 오히려 수군의 조운 활동이 당연시되어 갔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파선의 개조, 소금굽기 등 잡다한 역이 가해져 그 역을 감당할 수 없는 형세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제적·사회적 대우가 좋았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奉足制가 확립되지 못한 초기 무렵에 그들은 조운에 참여하지 않을 때면 영농을 하여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조운 도중에 소요되는 비용도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또한 그들에 가해지는 사회적 처우는 천민이나 다름없이 천시되었다. 이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 견딜 수 없었던 수군들은 다반사로 避役과 代役을 자행하였다.0876)≪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6월 정묘.
≪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6월 신미.
이같은 상황은 결과적으로 해상방어는 고사하고 조운 운영에 있어서도 차질을 빚었다. 그리하여 정부로서는 해상 방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고, 아울러 조운 활동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력히 추구한 세조 때를 전후하여 이루어졌다. 병선과 조선, 수군과 조군의 분리 문제가 논의되었다. 수군의 해상 방어의 임무를 충분히 살리면서 조운의 운영을 원활히 하는 길은 수군을 조운활동에서 배제하고 그 대신 조운을 전담할 새로운 집단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는 騎船軍을 모체로 하여 漕軍 4,470명을 확보하고, 이들을 각 조창에 나누어 배속시켰다. 정부는 조군을 확보함과 더불어 그 역을 완화시켜 주었으니, 성종 5년(1474) 새로이 1,490명의 조군을 더 확보하여 좌우번으로 나누어 교대 근무케 하였다.0877)金鎔坤, 앞의 글, 88쪽. 조군은 이제 운송인으로서의 지위가 굳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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