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Ⅵ. 도량형제도
  • 1. 옛 도량형 제도
  • 1) 상고의 도량형제도
  • (1) 도량형의 시초

(1) 도량형의 시초

인류는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들을 자연상태 그대로 취하여 이용해 왔는데, 지능의 발달과 더불어 이러한 물질들을 사용에 편리한 크기와 필요에 알맞은 물량으로 판단하기 위한 방법이 모색되었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물질의 크기와 양을 항상 일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했다. 이러한 요구에 알맞게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크기는 길이를 기준으로, 물량은 기준량의 倍數값으로 판단하는 방법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초의 기준은, 장년 남자 신체의 특정부분이었다. 신체라 하더라도 그 기준을 삼는 부분이나 크기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생기게 되었고, 그것은 각 지역의 인종에 따라 도량형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장년 남자의 오른쪽 팔꿈치에서 長指 끝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 정하여 1큐빗(약 50㎝)이라 했는데, 오늘날 길이의 표준치가 되는 1미터는 이 基準에 연유한 것이다. 또 중국 상고 때 기록에 의하면, 장년 남자의 10指幅을 길이의 기준으로 취하여 指尺 1尺이라 하고, 步幅의 2배를 1步라고 했다. 그리고 장년 남자의 양손을 모아 담은 穀物量을 물량의 기준으로 삼아 1升(또는 1掬)이라 했다고 한다.1012)≪孔子家語≫王言篇·小爾雅.
≪史記≫夏本紀.
이와 같이 옛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물량을 측정하고 판단하였던 방법이, 훗날 度(길이)·量(부피)·衡(무게)이란 제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용적에서 기준을 취한 것으로 보아 상고 때의 計量法은 농경사회 사람들이 곡물을 거래하는 데 공정성을 얻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체를 기준으로 한 것은 인체의 크고 작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지능이 발달하면서 곡물거래의 공정성이 요구되었고, 器物 제작 기술도 개발됨으로써 지배자는 단일 標準尺과 標準量器 등을 만들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통일된 도량형제도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이 때 제정된 표준척 길이와 표준량의 부피는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신체 기준 그것과 비숫하거나 같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와 기술은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해 널리 시행되면서 정확하게 전수·발전하였다. 인접 후진국들은 제도나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 기준이 되었던 도량형제도도 함께 수용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의 도량형제도를 밝힐 수 있다면 그 제도나 기술의 근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강력한 지배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 통일된 도량형제도의 시행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舜典≫의 “乃同律度量衡”이란 것이다. 舜임금은 당시까지 전래하던 길이 표준척「指尺」을 취하지 않고, 舜帝樂의 基準音律管長을 舜帝尺으로 취하여 전래의 표준량인 1승의 용적을 25立方寸이 되게 하였다.1013)朴興秀,<中國上古때 度量衡制度에 關하여>(≪大東文化硏究≫12, 1978). 그러나 민간에서 실제로 많이 사용되었던 척도는 指尺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통일된 도량형제도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여러 문헌자료와 유물·유적 등을 통하여 옛 도량형의 표준척과 표준량이 장년 남자의 10指幅(또는 한뼘)과 양손에 담긴 곡물량이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아울러 箕田尺도 표준척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통일된 도량형을 시행한 것은 상당히 상고 때부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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