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1. 인구동향
  • 1) 편호방식

1) 편호방식

 조선 초기의 여러 호구통계 자료는 성질이 상이한 것이다. 당시 호구통계가 어떠한 조사 기준과 방식에 의하여 작성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어떤 성질을 지닌 통계인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戶와 口의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로 정리 해 볼 수 있다. 우선 戶數는 각종 역역과 곡물의 부과 징수를 위하여 일정한 편성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編戶, 곧 法制戶의 수이며, 口數는 그에 속한 丁男 또는 良役 부담자의 수라는 것이고,003) 주 1) 金錫亭의 논문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의 호수는 곧 戶總이지만 여기서의 戶(元戶)는 기본적으로 自然態의「主戶」를 뜻한다. 따라서 호수는 주로「挾戶」를 제외한「주호」층의 수이며, 이를 기초로 한 정액이「호총」이고, 또 배정된 호총에 따라 성적된 호가 곧 호구통계에서의 호수가 된다는 것이다.004) 李榮薰,≪朝鮮後期社會經濟史≫(한길사, 1988). 마지막으로 戶는 기본적으로 전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연태 그대로의 家戶(漢城과 같은 도시에서는 가옥을 소유하고 있는 가호)이며, 口는 그에 속한 丁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005)韓榮國, 앞의 글(1989), 241∼252쪽.

 이와 같은 호구에 대한 견해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관계자료의 충분한 검증없이 숫자적 조작을 구사해서 도출하거나, 아니면 성질이 다른 다양한 호구관계 자료를 부분적으로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호구관계 자료를 통해서 여말 선초 호구의 개념과 용례에 대한 검토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戶는‘3戶를 아울러 1戶로 한다’거나‘3家로써 1戶로 한다’는 것과 같이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3호」의 호는 自然戶를 말하는 것으로 家와 같은 의미이며,「1호」의 호는 역이나 공물을 부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법제호를 말한다. 법제호인「3호」·「3가」외에‘3丁을 1戶’로 편성하는 것이 고려 이래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는데, 이것은 신분의 고하와 역의 경중에 따라 상이하였으며 호의 등급도 人丁數, 田結數 또는 가옥의 규모에 따라 정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호는 租賦와 貢役을 부담하는 평민을 말하며, 여기에는「復戶」의 대상계층과 私賤은 제외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호는 군역·요역·공물 등 국가에 대하여 일정한 의무를 부담하는 대상인 동시에 그 단위인 것이다.006) 李樹健, 앞의 글, 23∼29쪽. 이것은 토지가 20결·10결·5결 등의 단위로 作丁되어 田籍에 등재됨으로써 비로소 조세를 부과하게 되었던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민도 호적에 등재됨으로써 역이 부과되었다. 전지 가운데 陳地나 新開墾地 등이 作丁成冊되기 전에는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 것과 같이, 인민 가운데서도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人丁은 역이 부과되지 않았던 것이다. 호는 이상과 같은 의미 외에도 군역과 결부되었을 때는 정규병을 뜻하는 戶首와 奉足을「戶·保」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007) 柳馨遠,≪磻溪隨錄≫권 21, 兵制 本國古今軍數附.

 「口」는 당시 호구자료에 따라「丁男」또는「男女丁」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는 인구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慶尙道地理志≫의 口數는 남녀정을,≪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남정을, 실록에서 산견되는‘男女老壯弱合計’라는 것은 전 인구수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전 인구수란 당시의 실재 인구수를 빠짐없이 다 파악하였다는 것이 아니 라 조부·공역을 부담하는 계급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戶口는「戶」와「口」또는 호구수라는 의미 외에 호적·준호구와 동일한 어의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고려 이후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호구의 개념문제에 있어서「호」를 제외하고는 큰 혼란이 없지만,「호」의 해석에 있어서는 그것이 지닌 의미가 다양하고 용례도 다기하여 간단히 정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호구의 용어에 유의하면서「호」의 편성문제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법제호인 경우에는 고려 이래 정수, 소유 전결수 또는 가옥의 규모 등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편호하였는데, 그것은 또한「3丁」·「5丁」을 1호로 하는 등 役種, 신분 및 지역에 따라 상이하였다. 이러한 기준에 의한「호」의 등급은 그 호의 정수, 가산, 가옥의 규모에 따라 대·중·소호로 3분하는 것이 고려시대 이례의 통례였다. 이러한 기준에 의한 호등급의 3분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옥의 규모에 따른 호의 등급 규정을 보면 이는 여말 선초를 통하여 京中에 한해 적용되었는데, 세종 17년(1435) 3월 각 도·각 관의 호적을 차등 성적할 때에 서울의 五部는 間架數를 기준하여 大·中·小·殘·殘殘戶 등 5등급으로 구분하였다.008)≪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무인.

 고려시대에는 호의 등급 단위가 정수를 기준으로 대·중·소호로 3분하여 요역 등 각종 역역을 차등 부과하였다. 여기에 조선 태조 때부터는 인정 외에 전결도 고려되다가 점차 인정의 다과로부터 전지의 다과로 전환하였다.

 이상과 같은 구분 외에「호」의 등급이 일정한 기준이 명시되지 않은 채 막연히 대·중·소호니 하는 3분법과 대·중·소·잔·잔잔호니 하는 5분법이 고려 때부터 실시되어 왔는데, 4·5분법은 대체로 조선 초에 처음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분은 아마 인정, 전결수의 다과와 그 호가 소유한 자산의 규모에 따라서 구분되었을 것이다. 태종 6년(1406) 11월 煙戶米法을 제정하였을 때는 上·中·下·不成戶 등 4분법이,009)≪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계유. 세종 17년 3월에는 전결수의 다과에 따라 대·중·소·잔·잔잔호 등 5등급으로 구분하여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하였다.010)≪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8월 병진·권 67, 세종 17년 3월 무인·권 74, 세종 18년 7월 무인.

 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노동력을 직접적으로 수취하는 역은 군역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역종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국민의 한 사람을「정」으로 파악하며 이 모든 정에 대해 국가는 반대급부의 원칙에 따라 국역을 부과시키는 동시에 일정한 토지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에 있어서는 군역의 경우 특수 병종을 제외하고는 반대급부로서의 토지분급은 없었다. 이러한 군역부담 체제에 부응하여 마련된 것이 奉足制이다.011)≪世宗實錄≫권 7, 세종 2년 정월 을사.
李載龒, <奉足에 대하여>(≪歷史學硏究≫2, 全南大, 1964).

 봉족제는 국역을 지는 자 모두가 항상 징발 또는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각 역종별로 징발당하는 1정에 대하여 수명의 有役人丁이 경제적 도움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戶首와 봉족과의 관계이다. 이러한 호수와 봉족을 한 묶음으로 한 단위는 역시 경중에 따라 편호의 차이가 있었는데, 부담이 무거운 騎兵 등의 병종에 대해서는 많은 봉족을 주어 편호하였고, 양계 연변지역의 군사에 대해서도 그 곳의 특수 사정을 고려하여 가급적 정수를 넉넉히 지급하였다. 그러나 대체로는 3정을 기준으로 하여 1호로 편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3정을 1호로 편성하였던 것은 당시 단일호적 내에 있는 1호의 정수가 3명이 일반적이기 때문일 것이며, 사회경제적 체제로 보아 호수와 봉족을 편성하는 데도 가급적 자연호대로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굳이 호를 파괴하면서까지 편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호가 국역부담의 단위이므로 그것이 군역과 결부되었을 때는 정규 병력을 말하는 것이니 군인 몇 명이나 군호 몇 이라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 되는 것이며, 定役戶의 경우도 호를 기준으로 하여 일정액의 공물이 부과되며 公賤의 身貢도 때로는 奴 또는 婢 몇 명에 대한 정액이라기 보다는 그 공천의 편성호인 호수에 대해 정액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이러한 편성방식은 농업 위주의 현물경제 하에서 국역부담자의 대부분이 농민이기 때문에, 국가는 병농일치의 이상을 실현하되 한편으로는 영농에도 지장이 없고 또 한편에서는 동원 내지 징발적 목적도 달성하는 데 있으며, 또 고려처럼 국역부담자의 반대급부로서의 토지 지급이 없기 때문에 입역자와 그 입역자의 경제적 뒷바라지를 맡은 봉족이 한 생활체가 되어 연대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이상적인 제도였다.

 편호방식은 지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당시 국가의 수취체제가 전국을 일체화하지 못한 데다가 지역에 따라 주민의 부담에 차이가 있었고, 또 토질의 비척과 농경지의 광협에 따라 인구분포의 소밀에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와 같이 흉년·전란 등으로 인한 유이민의 대량 발생은 지역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인구분포에 현저한 격차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지역적 이동에 정부가 즉시 조치를 취하여 해당지역의 군역 등 役額과 貢額을 현재 인구에 비례하여 적시 조정해 주지 못하고 과거의 정액에 준해서 실시하였기 때문에 공평을 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도별 1호당 평균 구수의 다음의<표 1>과 같이 상이하게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지역적인 편호 방식의 차이는<표 1>의 호구통계가 위로부터 각 도 또는 각 관(邑:고을) 별로 분배, 책정된 정액호임을 보여 준다.

道 名 戶 數 口 數 戶 當 口 數
京 畿
忠 淸
慶 尙
全 羅
黃 海
江 原
平 安
咸 吉
20,882
24,170
42,227
24,073
23,511
11,084
41,167
14,739
50,352
100,790
173,759
94,248
71,897
29,009
105,444
66,978
2.3
4.9
4.1
3.8
3.6
2.6
2.5
4.6

<표 1>≪世宗實錄地理志≫의 道別 一戶當 평균 口數012)<표 1>의 호구통계는≪세종실록지리지≫소재의 各道 總戶口數이다.

 이상의 편호방식에 대한 당시 정부의 의도와 이를 둘러싸고 야기되는 군신간의 논란에 대해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 호구성적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사대부출신의 관료들은 국가의 철저한 호구성적책에 반대하였다. 특히 梁誠之는「寬法」과 같은 호적법을 적용하여 실재 호수를 적절하게 줄여 편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군호 내지 정역호를 편성할 때는「호수」는 가급적 줄이고 그 대신 餘丁을 많이 보유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013)≪睿宗實錄≫권 6, 예종 원년 6월 신사.

 조선 초에 있어서 호의 규모는 자연호인가, 법제호인가에 따라 다르며, 자연호인 경우에는 신분과 부의 크기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계층이 다층적이고 부의 편재가 심한 당시에는 수십 명의 가족을 보유한 대가족과 불과 3∼4명밖에 되지 않은 소가족이 동시에 존재하였을 것이다. 대가족제도는 왕실이나 양반관료 및 광대한 농장을 보유한 계층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일반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농민의 경우에는 미약한 농업생산력에 대응하여 대개 4∼5명 정도의 소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법제호인 경우에는 역종, 신분 혹은 지역에 따라 상이하였다. 이러한 호는 결국 자연호 수 개 이상을 한 단위로 해서 편성한 것이어서 자연호의 규모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호수는 각종 역역·공물의 부과와 징수를 위하여 정부에서 실제의 戶·口數를 참작하여 각 도·각 관에 적절히 배정한 元額, 즉 공역 부과 단위로서의「호」수의 정액으로「戶總」이다. 따라서「호」는 자연태의 가호가 아님은 물론 일률적인 법제호도 아닌 형태의 편성호이고,「구」수는 군역을 비롯한 각종 의무를 지닌 남정의 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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