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1) 양반의 개념

1) 양반의 개념

 兩班이란 용어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관직제도상 文班(東班)과 武班(西班)을 지칭하는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고려·조선시대의 지배신분층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 중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을 지칭하는 개념이 양반개념의 시원이었다.057) 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4∼5쪽.

 그러면 먼저 문·무반을 지칭하는 양반의 개념에 대하여 알아 보자. 국왕이 조회를 받을 때 문신들은 동쪽에, 무신들은 서쪽에 서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동쪽에 서는 반열을 동반 또는 문반,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 또는 무반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하였다. 이러한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개념은 이미 관료체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어 왔다. 고려는 혈통만을 중시하던 신라의 골품제를 타파하고 보다 광범한 在地豪族群을 국가관료로 등용하는 집권적 양반관료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국 초창기부터 완벽한 양반관료제를 수립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관제의 기초가 되는 고려 초기의 官階에 있어서도 문·무의 구별이 없던 신라 및 태봉의 관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058) 武田幸男, <高麗初期の官階>(≪朝鮮學報≫41, 1966), 28쪽.

 문반과 무반을 처음으로 구별한 것은 경종 원년(976)에 실시된 田柴科에서 부터였다. 경종전시과에서는 고려 초기의 관계를 기준으로 모든 職散官을 公服의 빛깔에 따라 紫衫·丹衫·緋衫·緣衫의 네 단계로 나누고 자삼층을 제외한 단삼·비삼·녹삼층을 문반·무반·잡업으로 구분하여 각 품에 따라 田과 柴를 지급하였다. 이 때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이 단삼층 이하에만 있고 자삼층에는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고려 건국 초기에 자삼층이 豪族들의 혈족 및 동족집단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반·무 반·잡업의 직능별 구분은 광종 이후 새로은 고려의 관료제가 수립되면서부터 새로 구성되는 단삼층 이하에 비로소 생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종전시과는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세력이 고려 관료제에 재편성되어 가는 과도적 시기에 나타난 토지반급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종전시과에 있어서의 문반·무반·잡업의 구분은 전시지급을 위한 다분히 편의적인 구분이기는 하였지만 문반과 무반의 문자상의 기원이 여기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것은 문·무의 구별이 없던 신라와 고려 초기의 관계에 비하여 일보 전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종전시과에 있어서의 문·무반의 구분은 정식으로 관계상의 文·武散階의 구분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 초기의 관계에도 문·무산계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실상부한 문·무반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불가불 문·무계가 구별되는 새로운 관계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성종 14년(995)에 고려는 唐의 문·무산계를 채용하게 되었다.059)≪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文散階. 이 때에 제정된 문·무산계 29계는 무산관 중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 貞觀 11년(637)에 제정된 문·무계와 같은 것이었다.060)≪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武散階條에 보면 “成宗十四年 定武散階凡二十九階”라 하여 성종 14년에 무산계만 실시된 것처럼 되어 있고, 같은 책 文散階條에는 “文宗改官制 文散階凡二十九階”라 하여 문산계는 문종조에 만들어진 것처럼 기술되어 있으나, 문·무산계가 성종 14년에 함께 실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李成茂, 앞의 책, 6∼7쪽). 성종 14년부터 문·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관직제도상의 문·무 양반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고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문반과 무반이 전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061) 邊太燮, <高麗初期의 文班과 武班>(≪史學硏究≫11, 1961), 3쪽. 이것은 양반관료제를 균형있게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필수조건이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식 문·무산계가 실시됨에 따라 고려 초기의 관계는 향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향직은 중국식 문·무산계와 다른 土着官階를 의미하는 것으로 13세기 경까지 남아 있다가 소멸되고 말았다.062) 武田幸男, <高麗時代の鄕職>(≪東洋學報≫47-2, 1964), 198쪽.

 그러나 성종 14년에 제정된 문·무산계는 당의 문·무산계를 그대로 채용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문반의 지위가 무반보다 높았기 때문에 문·무산계가 불균형하였으므로 실제로는 고려의 실정에 맞도록 활용되고 있었다.

 첫째, 무산계는 무반의 관계로 쓰이지 않고 鄕吏·老兵·耽羅王族·女眞酋長·工匠·樂人 등에게 특례적으로 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반은 오히려 문반과 마찬가지로 문산계를 받고 있었다.063) 旗田巍, <高麗の武散階>(≪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1961), 411쪽. 문반과 무반이 다 같이 문산계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문종조에 관제를 개편할 때에는 문산계만 나타나고 고려 후기까지도 계속 문산계의 개편만 있게 되었다.

 둘째, 고려시대에는 科擧시험에서도 문과만 있고 무과는 없었다. 고려시대의 무과는 예종 11년(1116)부터 인종 11년(1133)까지 24년간만 실시되었으며 그 이외의 시기에는 실시된 바 없다.064) 李成茂, <韓國의 科擧制와 그 特性>(≪科擧≫, 一潮閣, 1981), 117쪽.

 셋째, 무반은 문반에 비하여 현실적으로 많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고려시대의 무반은 미천한 출신으로서 무예나 勇力이 뛰어나 行伍에서 발탁된 사람들이었다.065) 邊太燮, 앞의 글, 52쪽. 따라서 門地가 좋은 문반에 비하여 문지가 나쁜 무반은 차별 대우를 받기 마련이었다. 예컨대 무반에는 3품 이상직이 실제로 없었고 문·무양반은 2품 이상직인 宰樞를 제외한 3품 이하직에만 구별되어 있었다. 재 추직에는 무반이 임명되기 어려웠으며 무관이 마땅히 맡아야 할 병마통수권 조차도 문관이 겸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관은 무관직을 겸대할 수 있어도 무관은 문관직을 겸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穆宗田柴科부터는 전시의 지급에 있어서도 무관은 문관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성종 14년의 문·무산계에 있어서의 문무 대등의 원칙은 목종조 이후에는 이미 그 균형을 잃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무반에 대한 차별대우는 드디어 武臣亂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무신정권 하에서 조차도 무반에 대한 문반의 우위는 시정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까지 무반에 대한 문반의 우위는 유지되고 있었고 무산계와 무과는 실시되지 못하였다. 즉 고려의 양반체제는 지나치게 문반 위주로 치우쳐 있었다.066) 李成茂, 앞의 책(1980), 9∼10쪽.

 이와 같은 불균형한 고려의 문·무 양반체제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균형을 찾게 되었다. 즉 공양왕 원년(1390)에 武科가 실시되고 태조 원년(1392)에 새로운 조선의 문·무산계가 제정되어 실시됨에 따라 명실상부한 문·무 양반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태조 원년에 새로이 제정된 무산계에는 정·종9품계가 없었다. 이것은 세종 18년(1436)에 이르러 보완되어 균형있는 문·무산계가 갖추어졌고067) 이 때 무산계 정9품 進武副尉, 종9품 進義副尉가 신설되었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經國大典≫에 법문화되었다. 이로써 조선조 양반체제의 제도적 기반이 되는 문·무산계가 확정되었고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개념도 확고한 제도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반(文班)·서반(武班) 이외에 南班이라는 반열이 있었다. 동반과 서반이 조회에서 北座南向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과 서쪽에 서는 반열이었는데 비하여 남반은 남쪽에 서는 반열이었다. 남반직은 掖庭局·通禮門 등에 두어졌던 內僚職으로서 왕명출납·궁중당직, 조회나 의식에 있어서의 의장을 담당하고 있었다.068) 曺佐鎬, <麗代南班考>(≪東國史學≫5, 1957), 17쪽. 남반직이 이와 같이 국왕 측근의 내료직이었 때문에 국왕의 입장에서는 중시하여 남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반열을 이루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관료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남반은 동·서 양반에 눌려 점차 7품 이하의 賤職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반직은 잡류·환관·승려의 자손이나 혈통에 흠이 있는 양민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맡게 되었고069) 曺佐鎬, 위의 글, 13∼16쪽. 동반과 서반에 눌려 동·서반에 대항할 수 있는 독립된 반열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남반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南行으로 전락되어 門蔭子弟들의 진출로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시대의 동·서·남 3반은 조선시대의 양반으로 정립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양반이란 용어가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여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본래는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만을 양반이라 하였다. 그러나 양반관료 체제가 점차 정비되어 감에 따라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반이 이제는 신분개념으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게 된 것이다. 가부장적 가족구성과 공동체적 친족관계 때문에 그 가족과 가문은 하나의 공동운명체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한 번 관직을 차지하면 음직과 과거를 통하여 이를 世傳하려고 노력하였고 국가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藩屛으로 삼기 위하여 이를 어느 정도 보장해 주고 있었다. 이때의 국가는 이들이 구성원이 되는 양반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 가문간의 폐쇄적인 혼인관계로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이라는 양반개념이 아래와 같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점차 최고 지배신분층을 가리키는 신분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서울 5부 방리에서는 각 司에서 일보는 令史·主事·記官과 蔭品官의 子로서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 밖의 양반과 중앙 및 지방에 있는 白丁의 子…(≪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만약 적이 오면 양반, 百姓, 公私賤人, 승려를 막론하고 모두 징발하여 힘껏 싸우게 하고…(≪高雇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崔鄲의 어머니 집안은 참으로 양반이다(鄭夢周, <圃隱集>附錄 遺墨 ;≪高麗名賢集≫4, 大東文化硏究院, 264쪽).

장차 이름을 훔쳐 양반과 섞이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6월 갑자).

王循禮의 집안은 아마 양반은 아닌 듯합니다(≪成宗實錄≫권 137, 성종 13년 정월 정해).

今音勿이 말하기를, ‘양반이 저 모양인가. 더럽다 더러워…’(≪成宗實錄≫권 142, 성종 13년 6월 계축).

 이상의 자료에 나타나는 양반의 개념은 분명히 지배신분층으로서의 양반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양반은 사대부·사족·사류·사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사대부란 본래 문관 4품 이상을 대부, 문관 5품 이하를 사라고 한 데서 나온 용어이다.070)≪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병진. 이를테면 사대부는 본래 문관관료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사대부라 하면 문관관료뿐 아니라 무관관료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07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이는 조선왕조가 문관 관료가 주도하는 국가였던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대부가 될 수 있는 족속을 사족이라 하였다. 즉 사족이란 ‘士大夫之族’의 준말이었다. 고려·조선 초기에는 양반이라는 용어 못지 않게 사족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다. 양반이라는 용어가 관직제도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와 지배신분층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어서 혼동되기 쉬웠던 데 비하여 사족은 양반신분층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쓰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족과 비슷한 용어로 사류와 사림이 있었다. 사류는 사족과 마찬가지 뜻으로 쓰였고 사림은‘士大夫之林’이라는 말의 준말로 사대부군을 뜻하였다.072)≪成宗實錄≫권 189, 성종 17년 3월 임자. 사림은 고려시대부터 쓰이기는 하였으나 특히 16세기부터는 勳舊派와 대칭되는 士林派라는 재지세력을 나타내는 의미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사대부보다는 사림이, 사림보다는 사류가, 사류보다는 사족이 더 넓은 범위의 양반층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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