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2) 양반의 성립과정

2) 양반의 성립과정

 조선 초기의 양반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형성되어 왔다. 고려 초기의 양반층은 중앙에서 왕건을 받든 장상, 즉 개국공신들과 지방에서 호응해 온 호족 세력이었던‘向義歸順城主’들로 구성되었다.073) 李基白, <高麗 成宗代의 政治的 支配勢力>(≪湖南文化硏究≫6, 1974), 2쪽. 그러나 광종의 舊臣 숙청의 실시로 대부분의 개국공신들이 제거되는 대신에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호족세력이 양반층의 구성원으로 되기 시작하였다.074) 李成茂,≪韓國의 科擧制度≫(한국일보사, 1975), 25∼30쪽. 이 때의 과거출신자 중에는 신라 6두품 출신과 후백제(나주지역) 계통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075) 李基白, <新羅 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 1970) , 154∼155쪽.

 그러나 광종이 죽고 경종이 서자 광종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 제거되는 대신에 6두품 계열의 近畿地方 호족세력의 진출이 활발해지게 되었다.076) 李基白, <高麗成宗朝의 政治的 支配勢力>(≪湖南文化硏究≫ 6, 1974) 참조. 이러한 경향은 성종조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성종은 崔承老와 같은 6두품 출신 유학자들을 기용하여 유교정치를 실시하는 한편, 일면 호족세력을 누르고 일면 科擧·吏職을 통하여 중앙관인으로 편입시켜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즉 성종 2년(998)에는 12牧에 외관을 파견하고 州·府·郡·縣의 吏職을 개편하여 호족을 지방 행정실무자인 향리로 격하시켰다. 또한 성종은 자주 과거를 실시하여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종 14년에는 문·무산계를 제정하여 중앙으로 진출한 관료들을 문·무 양반으로 편성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의 건국 초기부터 성종조까지의 양반층은 대체로 개국공신계열·호족계열·6두품계열로 구성되었으나 이 중 개국공신계열은 광종조에 대부분 제거되고 호족계열과 6두품계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계열 중에서도 뒤에 향리로 된 호족출신들이 양반관료의 공급원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향리 중에서도 과거나 이직을 통하여 양반관료가 되는 부류들은 주로 戶長層이었다. 문종 2년(1048)에 제정된 과거에 관한 법제에 의하면 副戶長 이하의 손자와 副戶正 이하의 아들만이 製述業과 明經業에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즉 호장층을 비롯한 향리의 상층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 양인들의 과거응시를 금하는 규정은 없었으나 이들 이 과거에 합격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문종 9년 10월 內史門下의 奏에 氏族不付者, 즉 姓氏를 갖지 못한 족속들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고려 초기에 성씨를 가진 족속들이라면 왕족·6두품출신·호족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호족의 후예인 향리들도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며 향리 중에도 최상층인 호장층이 맨 먼저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고려 후기에는 호장층 이외의 향리나 양인들까지 성씨를 가지게 되고 이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대체로 고려시대에는 향리층이 양반의 주된 공급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나 이직을 통하여 양반이 된 향리들은 대체로 거주지를 개성 또는 근기지방으로 옮겼다.077) 李佑成, <閑人·白丁의 新解釋>(≪歷史學報≫19, 1962), 71쪽. 그러나 이들은 거주지를 중앙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항상 본관지를 밝히게 되어 있었다.078)≪高麗史≫에 慶州人·驪州人이라고 한 것은 慶州나 驪州를 本貫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골품귀족들은 그들이 모두 王京人이었기 때문에 본관지를 밝힐 필요가 없었지마는 고려의 양반은 출신지가 각각 다른 異姓貴族들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가문을 다른 가문과 구별하기 위하여 반드시 본관을 밝히고 있었다.079) 李基白, <高麗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192쪽. 한편 양반들이 본관지로 쫓겨 간다는 것은 정권에서 밀려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있어서 歸鄕은 하나의 형벌로 인식되고 있었다.080) 文炯萬, <麗代歸鄕考>(≪歷史學報≫23, 1964), 38쪽.

 양반이 된 향리들은 과거나 음직을 통하여 계속 관직을 받아 양반가문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으로 상승하지 못한 향리들은 계속 향리가문 으로 처져 있게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같은 성씨를 가진 同族에서 출발하였 지만 나중에는 중앙관료가 된 집안은 양반가문으로, 지방에 처져 있는 집안은 향리가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 먼저 양반이 된 가문은 왕실 및 양반 상호간의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통하여 문벌귀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종조 이후의 문치주의 경향 때문에 11∼12세기의 귀족들은 모두 문신귀족들이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신귀족 가문으로는 慶源李氏를 들 수 있다. 경원이씨는 정종 때부터 인종조에 이르는 9대 100여 년 간 李子淵·李資謙 등이 계속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安山金 氏·慶州金氏·光陽金氏·海州崔氏·坡平尹氏·江陵金氏·平山朴氏 등 당시의 명문거족들과 통혼하고 있었다.081) 藤田亮策, <李子淵と其の家系(上)·(下)>(≪靑丘學叢≫13·15, 1933·34) 참조. 경원이씨와 통혼하고 있던 이와 같은 명문거족들은 고려 전기에 이미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양반가문들이었다. 물론 이외에 경원이씨와 통혼하지 않은 양반가문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벌귀족들은 양반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蔭敍制를 마련하고 특권적인 과거준비 교육기관인 私學을 설치하게 되었다. 즉 목종 즉위년(997)에는 문·무 5품 이상관의 아들에게 음직을 주는 음서제가 실시되었으며08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蔭敍. 문종 3년(1049)에는 역시 문·무 5품 이상관의 아들에게 功蔭田柴를 지급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더구나 공음전시는 자손에게 세전될 수 있었고, 아들이 죄를 짓더라도(반역죄가 아닌 이상) 손자에게 그 3분의 1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음전시는 현직관료 뿐 아니라 散官(관품만을 가진 관리)에게까지도 주어졌다. 한편, 문종조에는 귀족자제들의 특권적인 과거준비 교육기관인 崔冲의 文憲公徒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사학 12도는 기왕에 知貢擧(과거시험관)를 맡았던 고급관료들이 개설한 사설의 과거준비 교육기관이었다. 이리하여 귀족 자제들이 누구보다도 유리하게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벌귀족 자손들은 음서제와 사학을 통하여 누구보다도 쉽게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음서는 가문의 혈통에 의한 관직취득 방법이었고 과거는 개인의 재능에 의한 관직취득 방법이었다. 음서는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고 세전시키려는 보수적이며 특권적인 관직취득 방법이었는데 비하여 과거는 양반의 지위를 획득하고 고양할 수 있는 개방적이며 경쟁적인 관직 취득 방법이었다. 따라서 가문의 혈통과 개인의 재능은 양반신분을 취득하고 유지 강화할 수 있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주요한 요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약 1세기 동안은 무신집권시대에 해당한다. 무신란을 계기로 정권을 쥔 무신들은 그들의 미천한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하여 문신귀족들과 통혼하였다. 崔忠獻 일가가 定安任氏·慶州金氏 등 전통적인 문신가문과 통혼한 것이 그 예이다.083) 閔賢九, <高麗後期 權門世族의 成立>(≪湖南文化硏究≫6, 1976), 26쪽. 그리하여 미천한 출신의 무신들이 일약 무신귀족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신집권시대에는 또한 문학과 吏務에 밝은 能文能吏의 관인군이 성장하고 있었다. 무신정권은 국가행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문학과 행정에 밝은 문신들을 필요로 하였다. 최씨정권의 政房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관부였다. 무신정권 하에서 많은 능문능리들이 과거를 통하여 官界에 진출하였다. 이들 중에는 향리출신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趙文拔·蔡靖·李淳牧·朴恒·張鎰 등이 그들이다.084) 李成茂, 앞의 책 (1980), 23쪽.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게 되자 譯官·內僚·怯怜口등 친원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趙仁規·柳淸臣·印候·張舞龍·車臣·羅裕·韓希愈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085) 閔賢九, 앞의 글, 33∼35쪽. 본래는 미천한 신분에 속하였던 이들은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일약 양반가문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몽고어 통역관이었던 조인규는 원 세조의 知遇를 받아 국가의 요직을 두루 차지할 뿐 아니라 왕실 및 문벌양반 귀족가문과 통혼하여 일약 고려 후기의 새로운 권문세족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086) 閔賢九, <趙仁規와 그의 家門(中)>(≪震檀學報 43, 1977) 참조.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는 고려 전기의 문신귀족 이외에 무신귀족, 능문능리의 신흥문신, 친원세력 등 많은 새로운 가문의 인물들이 양반으로 상승하여 양반층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충선왕 즉위교서에는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가문으로 慶州金氏·彦陽金氏·定安任氏·慶源李氏·安山金氏·鐵原崔氏·孔巖許氏·平康蔡氏·淸州李氏·唐城洪氏·黃驪閔氏·橫川趙氏·坡平尹氏·平壤趙氏 등 14가문을 들고 있다. 이것은 고려 전기에 이자겸의 경원이씨와 통혼한 안산김씨·경주김씨·광양김씨·해주최씨·파평윤씨·강릉김씨 평산박씨 등 7가문087) 藤田亮策, 앞의 글 참조.에 비하면 숫적으로 두 배에 해당한다. 물론 양자를 직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으나 앞의 경원이씨와 혼인한 가문 중 경주김씨·안산김씨·파평윤씨와 경원이씨까지 네 가문 만이 宰相之宗에 포함되어 있고, 광양김씨·해주최씨·강릉김씨·평산박씨 등 네 가문은 빠져 있으며 정안임씨·철원최씨·공암허씨·언양김씨·평강채씨·청주이씨·당성홍씨·황려민씨·횡천조씨·평양조씨는 재상지종에 새로 등장하는 가문이었다.088) 李成茂, 앞의 책(1980), 24쪽. 成俔의≪慵齋叢話≫에 보면 조선 초기의 명문 양반가문인 鉅族으로 파평윤씨를 비롯한 75 가문을 들고 있다.089) 李成茂, 앞의 글(1981), 84쪽. 75 가문 중에는 후삼국시대 이후부터 있어온 世族도 있었으나 고려의 건국 이래 점차로 양반가문으로 성장한 가문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양반가문이라 하더라도 어떤 계기에 명문으로 될 수도 있고 또 영락하여 한미하게 되거나 양반신분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친원세력과 함께 신흥사대부들이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이들은 원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불교를 믿는 구귀족에게 대항하고 구귀족의 사학에 대신하여 國學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들은 권문세족에 대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고려 말에 정규적으로 실시되는 과거시험을 통하여 양반신분을 획득하였다. 고려 말에는 조선시대 문과에 해당하는 제술업·명경업의 선발인원은 대체로 33인을 채우고 있었다. 安珦·李瑱·李穀·李齊賢·白文寶 등이 고려 말에 진출한 신흥사대부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향리출신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안향·尹諧·嚴守安 등은 자기 자신이 향리였고, 李兆年·이곡·安軸 등은 아버지가 향리였다.090) 李成茂, 앞의 책, 26쪽. 고려 말에 이르러 문신정치가 회복되면서 많은 향리출신 사대부들이 새로운 양반층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양반 수가 늘어나자 양반 내부의 관직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이에 향리가 양반이 되는 길은 점차 제한을 받기 시작하였다. 원나라가 지배하던 고려시대에 이미 향리는 세 아들 중 하나만 상경 종사할 수 있도록 규제한 바 있었다091)≪高麗史≫권 106, 列傳 19, 嚴守安. 이것은 물론 지방에서의 향리요원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恭愍王朝 이후에는 향리 자신이 등과하여 양반이 된 예는 드물어졌다.

 공민왕 때는 국권회복과 문신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李穡·鄭夢周·朴尙衷·李崇仁·朴宜中 등 많은 신흥사대부들을 기용하였으며 홍건적·왜구 등 내외의 전란을 통하여 李成桂·崔瑩·邊安烈·安祐·池龍奇·池龍壽 등 신흥무장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무장 중에는 출신이 미미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계나 李豆蘭은 여진족이 살고 있는 함경도에서 일어난 사람들이었다. 이성계·최영·지용기·지용수·尹可觀·黃裳·沈德符 같은 사람은 그래도 가문을 밝힐 수 있으나 나머지는 세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더구나 공민왕 3년(1354)부터는 군공에 대한 상으로서 添設職이 남발되었다.092) 鄭杜熙, <高麗末期의 添設職>(≪震檀學報≫44, 1977), 40∼41쪽. 첨설직을 받은 군인 중에는 향리나 일반 양인자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록 실직은 아니지만 첨설직을 받아 그들의 신분을 일약 양반으로 상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 이르면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양반층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향리세력을 중앙관인으로 흡수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과거제도는 물론 胥吏職이나 同正職·檢校職 등의 산직 을 만들어 관인군은 대폭 늘어가기만 하였다 더구나 공민왕 이후로는 첨설직이 남발되어 향리·양인은 물론 천인들까지도 양반이 된 사람이 많았다. 동정직·검교직·첨설직 등의 산직은 그 수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반층을 늘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에는 관직 세계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조선 건국 초기의 집권양반들은 지배층을 양반과 중인으로 양분화시키고자 하였다.

 양반에서 떨어져 나와 중인층이 된 자들은 향리·서리·기술관·장교·역리 등 주로 행정실무나 기술직을 담당한 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향리는 고려 후기 양반의 공급원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향리의 양반으로의 진출은 서서히 억제되어 왔다. 즉 禑王 9년(1383)부터는 향리의 3정 1자에 한하여 잡과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생원·진사시의 覆試 전에 보이는 學禮講-「小學」·「家禮」 시험- 외에 향리는 四書와 一經의 講 시험을 더 치르게 하였다.093) 宋俊浩,≪李朝 生員進士試의 硏究≫(國會圖書館, 1970), 31쪽. 그리고 태조 원년(1392) 9월에는 등과하거나 立功하지 않은 향리로서 첨설 2품 이하, 현직 3품 이하의 관료는 향리로 환원시켰다. 뿐만 아니라 세종 27년(1445) 7월에는 향리에게 주던 外役田이 혁파되고 향리에게는 녹봉도 주지 않았다.094)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吏>(≪韓國史硏究≫5, 1970), 86쪽. 한편 토호라고 생각되는 향리는 元惡鄕吏로 몰아 형편이 좋지 않은 역에 역리로 보냈다.095)≪經國大典≫권 5, 刑典 元惡鄕吏. 또한 향리의 약 80%가 군현제 개편에 따라 다른 군현으로 이속되었다.096) 李成茂, 앞의 책, 33쪽. 그리하여 이들은 오랫 동안 기반을 닦아 온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짐으로써 사회 경제적인 기반을 잃게 되었다. 이 때 지방사회에서 양반은 土姓으로 남고 향리는 續姓097) 古籍에는 없고≪世宗實錄地理志≫에 各道 關文에 의하여 새로 追錄된 姓氏를 말한다.으로 등재된 사람이 많게 되었다.098) 鄭杜熙, <朝鮮初期 地理志의 編纂>(≪歷史學報≫69, 1976), 93쪽. 조선 양반국가에서는 이 시기에 양반은 상급 지배신분층으로, 향리를 비롯한 중인은 하급 지배신분층으로 구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향리들은 고려시대의 지방 지배세력에서 한낱 지방행정 실무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양반들은 중앙의 京在所와 그 지방 분소인 留鄕所를 만들어 지방사회의 주도권을 잡았다.099) 李成茂, <京在所와 留鄕所>(≪擇窩許善道敎授停年退職紀念 韓國史學論叢≫, 1992) 참조. 고려시대에는 양반과 향리를 각각 다른 계통으로 국가행정 조직에 연결하여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지방사회를 관할하도록 하던 것을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이를 양반의 주도 아래 두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향리는 그들의 집무소인 作廳을 중심으로 양반을 도와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중인으로 격하되게 되었다.

 향리뿐 아니라 중앙행정 실무자인 서리도 중인으로 격하되었다. 서리는 고려시대부터 문음자제들의 음직으로 주어지거나 其人去官者들의 入仕路로 이용되어 왔다. 지방향리들은 이 서리직을 통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여 양반이 되는 것이었다.100) 金光洙, <高麗時代의 胥吏職>(≪韓國史硏究≫4, 1969) 참조. 서리들에게는 守令取才 시험을 거쳐 수령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것은 서리가 양반이 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서리가 수령이 되는 길은 녹사 출신이 아니면 어렵도록 제한되어 있었다.101)≪經國大典≫권 1, 吏典 京衙前 錄事. 서리에게 과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이미 최씨 무신정권에서 실시한 祿科田制에서부터이고 조선 초기에는 그들에게 西班遷兒職이 주어지다가 그것도 세조 12년(1466) 職田法이 실시되면서부터는 주지 않게 되었다.102) 韓永愚, <朝鮮初期의 上級胥吏 成衆官>(≪東亞文化≫ 10, 1971), 77쪽. 상급 서리인 녹사는 문음자제들이 많이 임명되어 만기가 되면 수령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으나, 하급 서리인 書吏는 만기가 되면 고작 驛丞이나 渡丞으로 진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 조차도 어려운 자는 관품만 주는 산관직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103)≪經國大典) 권 1, 吏典 京衙前 書吏. 따라서 서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적어 諸邑校生 중에서 매년 歲貢을 받는 실정이었다.104) 李成茂, <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70), 247∼248쪽.

 한편 譯官·醫官·律官·陰陽官·算員·寫字官·畵員·道流 등 기술관들도 중인으로 격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기술관에 대한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기술관에게는 녹봉은 물론 전시과의 제15과부터 제16과가 지급되었다. 그들은 잡업시험을 통하여 기술관직을 차지하였고 양반자제들도 기술관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기부터 차별을 받기 시작하였다. 향리는 관품이 없고 서리는 流外職을 받았는데 비하여 이들은 流內職을 받았다. 기술관은 6개월이나 3개월마다 다시 임용시험을 거쳐야 하는 체아 직을 받았으나 직전법이 실시되면서부터 체아직에는 직전이 주어지지 않았다. 기술관은 양반과 마찬가지로 문산계를 받고 있었으나 정3품 堂下官(通訓大夫)이 限品이었다. 기술관은 중인층에서는 가장 상위에 속하는 축들이었다. 그러나 양반과는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양반직에는 한품이 없었는데 비하여 기술관에게는 한품을 두고 있었던 것이 그 예이다. 이어 양반들은 점차 기술관을 천시하여 여기에 종사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다만 양반의 庶孼 자손만이 여기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것도 2품 이상의 良妾子孫은 당하관직인 기술직이나 忠順衛·成衆官에 서용될 수 있었으나 2품 이상의 賤妾子孫은 서반 군직을 받는데 그쳤고 그나마 武才가 없으면 司僕甲士·忠扈衛·尙衣院·司甕院·圖畵院 등의 유외 잡직을 받았다. 그러나 3품 이하의 서얼 자손에게는 음직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授職할 기회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양반의 서얼 자손은 그 아버지가 양반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가 正室이 아닌 양첩·천첩이었기 때문에 자손 대대로 양반 顯職-종9품부터 정1품에 이르는 兩班流內職-을 받을 수 없었다. 태종 15년(1415)에 右代言徐選이 庶孼差待法을 제안할 때는 그냥 서얼 자손을 양반 현직에 임용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으나105) 魚叔權,≪稗官雜記≫.≪經國大典≫에는 서얼 자손은 자자손손 禁錮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106)≪經國大典註解≫前集, 吏典 取才. 따라서 서얼 자손은 자자손손 문과나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再嫁한 부인이나 행실이 좋지 못한 부인의 아들과 손자도 마찬가지였다.107)≪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그러나 再嫁失行女의 아들과 손자는 그 다음 대에는 양반직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얼 자손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와 같이 향리·서리·기술관·서얼자손은 신분적으로 양반과 구별되어 조선 초기부터는 서서히 중인계층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역리·장교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면 지배신분층은 상급 지배신분층인 양반과 하급 지배신분층인 중인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것은 폐쇄적인 혼인관계와 직역의 세전으로 점점 심화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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