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5. 양인
  • 3) 양인의 존재양태
  • (3) 공상인 및 기타 특수 부류

가. 공상인

 조선 초기의 양인 중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당시의 농민 중에는 부업으로 수공업을 영위하는 자가 많았으며 공공연히 상업에 손을 대는 품관이나 향리 등도 적지 않았다. 승려나 백정, 그리 고 칭간자 가운데에는 전업적으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들은 통상 공상인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 밖에 전업인 중에서 도 정부가 工匠·商賈로 문적에 등록한 자는 한정된 범위의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공상인 가운데 수공업자만을 따로 가리킬 때에는 보통 공장이나 장인으로 통칭하였고 개별적으로는 그들이 생산하는 물품명을 붙여「○工」·「○匠」으로 불렀다. 한편 상인의 경우에는 주로 商賈로 불렀는데 이는 行商과 坐賈를 합칭한 용어였다.309) 당시의 수공업자 중에는 직접 판매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행상이나 좌고 가운데에는 수공업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기의 자료에 흔히 공상으로 합칭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좌고는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장사하는 상인을 가리키며 행상은 다시 육로를 이용하는 陸商과 수로를 이용하는 水商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농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는 농민의 경우보다 훨씬 느슨한 편이었다. 공상인을 낱낱이 파악하여 녹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의사조차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상인 중에서도 상인이, 상인 중에서도 행상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다.310) 行商에 대한 관계 규정이 이미 법전에 수록되어 있었는데도 지금의 商賈는 그 수가 농부보다 몇 배나 된다면서 漢城府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의 행상의 이름을 문서에 기록하자는 진언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당시의 행상에 대한 관리가 대단히 허술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世宗實錄≫권 89, 세종 22년 5월 경술). 특별히 녹적을 강화하려는 정책이 세워지지 않는 한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간간이 공상인을 녹적하자는 요청이 나타나는 것은 평소에 그들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녹적한 공상인은 그 대다수가 몰려 있는 서울의 경우 정부가 건설 한 상설 점포인 市廛(行廊·公廊·長廊 등으로 불림)에 들어 있는 자들이었고 이외에 시전 부근의 상설점포를 가진 자나 비교적 규모가 큰 행상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11) 태종 15년(1415), 공상인에 대한 수세를 강화하고 있던 당시에도「巷市」즉 동네에 있는 소규모 가게는 수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기사).

 녹적된 공상인에게는 공상세의 납부 의무가 부과되었다. ≪經國大典≫ 戶典 雜稅條에는 공장을 3등급으로 나누어 등급에 따라 매달 일정한 세를 납부 하고, 좌고는 등급을 나누지 않고 일률적으로 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영업세였다. 이외에 공랑세도 받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공랑을 이용하는 공상인들로부터 공장세나 좌고세와는 별도로 건물사용료로써 징수한 것으로 보인다.

 녹적된 공상인에게는 이러한 공상세 이외에는 특별한 신역의 의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흔히 공장은 정부기관에 일정한 기간을 의무적으로 입역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근거는 공장세를 받을 때 공역일수를 공제하게 되어 있는 조항이었다. 그러나 실제 사료에서는 정부가 녹적하여 수세하는 공장들을 중앙의 여러 기관에 강제적으로 동원한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초기 京工匠의 주류는 공천이었고 양인의 비중이 점차 커져 갔지만312)姜萬吉, <朝鮮前期工匠考>(≪史學硏究≫12, 1961;≪朝鮮時代 商工業硏究≫, 1984). 강제로 동원된 공장은 공천이었고 양인 출신 공장들은 자원에 의해 투속한 자로 나타난다. 따라서 위의 규정은 녹적된 공상인 가운 데 정부기관에 투속하여 복무하는 자에 대한 대우책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양인 출신의 공장이 부역의 의무가 없는 데도 스스로 자원하여 복무한 것은 공역일수에 따른 공장세의 감면 외에도 朔料가 있었고 잡직을 수직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313) 劉承源, <朝鮮初期 京工匠의 官職-雜職의 受職을 중심으로->(≪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경공장에 투속한 자 가운데에는 본래 수공업을 전업으로 하고 있지 않았던 자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경공장으로 복무하게 되면 좋은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타의 신역은 부담할 필요가 없다는 점까지 고려하였을 것이다.314) 조선 초기의 중앙 各司에는「傳習」을 위해 공장으로 투속한 자가 많았는데 (≪世宗實錄≫권 120, 세종 30년 5월 병신), 繕工監의 木手에 편입되어 있다가 축출된「外方接人」(≪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정축)은 바로 이러한 이점을 노리고 지방에서 올라와 투속했던 자가 아닌가 한다.

 자원 입속을 유도할 만한 대우책을 갖지 못한 외방 각관의 경우에는 공장이 부족하면 전업인이 아니라도 외공장으로 동원하고, 인원에 여유가 있을 때는 나머지 공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신역을 부과하지 않고 방치해 두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성종 4년(1473)에 공장세를 납세하고 있는 水鐵匠에게 군역을 지게 한 사례는 이례적인 것으로315) 이 때에 호조가 군역에 충속된 水鐵匠에 대한 특별조치를 요청한 것(≪成宗實錄≫권 27, 성종 4년 2월 병인)은 군역 부과가 이례적인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본래 수철장이 납세 이외에는 다른 신역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상인의 부담은 조세 외에도 신역을 져야 했던 농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공상인의 권리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흔히 모든 인민을 그 생업을 기준으로하여 士·農·工·商이라는 4개의 범주, 즉 4民으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4민은 윤리적 등급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위정자는 공상은 농민에 비하여 노력을 적게 들인다 하여 공상을 농민보다 천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상인의 경우는「遊手」즉 놀고 먹는 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공·상을 평민과 구별하여 평민과 나란히 병칭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은 그러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4민에 속하는 공·상은 인민의 기본 생업 중의 하나 이며 현실생활에서 그들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인식도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상인이라도 양인이라면 이를 평민에 해당하는 자로 간주한 사례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316) 세종 11년,「本系常人」의 범위를 놓고 논란할 때 형조판서 金自知는 常人에 공상을 포함시키고 있었다(≪世宗實錄≫권 44, 세종 11년 5월 갑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공상인을 군역에 충속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역시 일반 양인과 다름이 없다는 인식에서 연유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공상인이라도 양인인 경우에는 사환권이 부인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위정자는 흔히 “士는 農에서 나오며 工商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라든지, “옛날에 사민 가운데 士와 農은 조정에서 관작을 받을 수 있으나 工商이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업이 천하기 때문이다”라 말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발언들은 언제나 경공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자를 유 품직에 임용하려 한 경우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상인이 다른 경로를 통하여 입사하려 할 경우에도 공상의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유품 직의 진출이 금지되었을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의 응시나 학교의 입학에 지원자의 생업조건까지 조사하고 문제삼았 을지는 의심스럽다. 더구나 공상의 자손이 그 부조의 직업이 미천했다는 이 유만으로 사환권의 제약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예컨대 鹽夫의 아들 인 崔涇이 圖畵院의 생도로 들어가 화업을 연마하고 화원이 되었다가317)≪世祖實錄≫권 30, 세조 9년 3월 병신. 당 상관으로까지 오른 경우를 들 수 있다. 염부는 고려 이래로 수공업자 중에서 도 가장 차별을 받아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최경은 오직 화원으로서 당상관 에 오르는 것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았을 뿐, 염부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318)≪成宗實錄≫권 18, 성종 3년 5월 임술. 고려시대와 달리 공상인 자손의 사로 진출을 금지하는 자료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태종 19년(1419) 사간원이 “지금 甲士를 취재할 때 조상의 계통을 묻지 않고 오직 弓矢나 체력이 뛰어난 자를 뽑아 工商賤隷도 수직하여 縉紳子弟와 어깨를 견주어 나란히 서니 진신자제가 더불어 함께 함을 부끄러워 한다”하여 4祖 즉 부·조·증조·외조를 보고 다른 사람의 보증을 받아 취재를 허락하자고 하였을 때 의정부에서 모두 우활하다 말하여 성사되지 못한 것도319)≪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4월 정사.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또 공상의 과거금지를 청원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20)≪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2월 경진.

 결국 공상인은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권리 보장도 못받았지만 그렇다고 뚜 렷한 제한이 가해진 것도 아니었으며 그들에게는 신역을 면제한다는 원칙도 없지만 신역을 부과해야 한다는 원칙이 수립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 타의 양인들처럼 고정된 신역을 부담하지 않으니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기 어렵고 권리의 보장이 불충분하니 신역을 부과할 명분도 찾기 어려웠던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한다.

 끝으로 조선 초기의 공상인은 어디까지나 직업집단에 불과한 집단이지 법 제적인 세습집단=신분집단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공상인이 轉業하는 데에 무슨 법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는 농민이 이농하여 공상인이 된다는 것은 정치를 잘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도 신역 부담자의 감소를 초래하는 일이므로 공상인이 전업하는 것은 금지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장려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세습규제가 입안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가장 규모도 크고 긴요하였던 경공장이 자원 모집으로 충원되었던 것은 세습 규제의 부재를 방증하는 것이다. 세습 규제의 부재를 입증하는 무엇보다 뚜렷한 자료는 司饔院 沙器匠의 자식들은 다른 역에 차정하지 않고 그 업을 세전하게 한다는 ≪大典後續錄≫工典 工匠條의 규정이다. 이는 사기장 이외의 공장은 아무런 세습 규제가 없었음을 오히려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