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1. 가족제도
  • 2) 상속제와 양자제도
  • (2) 조선 초기의 양자제도

(2) 조선 초기의 양자제도

 고려시대에는 족보·묘지명≪국조방목≫ 등의 여러 자료를 통해서 볼 때 입양이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설사 입양이 행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계 조상의 제사나 가계계승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학계의 연 구결과에 의하면 양자제도의 이러한 경향은 조선 중기까지도 지속되고 있었 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하여 딸(사위)이나 외손이 있더라도 아들이 없으면 반드시 자기와 동일한 부계 혈연자 가운데 昭穆之序에 맞는 자를 입양하여 사회적 부자관계를 맺고 그로 하여금 제사와 가계계승을 도모하여 혈족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 입양제도의 본래적 의의임을 고려한다면, 입양제도나 상속제도는 후술할 제사나 족보·종법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산상속이 자녀 균분상속의 형태를 취하고 제사의 상속이 자녀간 분할·윤회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아들 이 없더라도 딸이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조선 초기사회의 사대부들의 실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선 초기뿐 아니라16 세기까지도 양 자제도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① 오늘날 세상풍속에 女孫(즉 외손)이 있으면 아무도 타인의 아들을 빌어 후사로 삼지 않는다(≪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8월 신축).

② 우리 나라에서는 비록 사대부가 후손이 없는 경우라도 또한 사당을 세우지 않고 딸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한다(≪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10월 을사).

 위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조선 초기 당시의 풍습에 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외손(딸)이 있으면 비록 同宗의 아들이 있더라도 그를 입양하지 않고 딸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 대 급제자의 수 양자의 수(%)
1393∼1405
1420∼1429
1444∼1453
1472∼1478
1498∼1504
1520∼1528
1546∼1549
1570∼1577
1599∼1603
1618∼1624
1635∼1644
1657∼1663
1678∼1683
1696∼1702
1723∼1728
1747∼1754
1773∼1777
1798∼1803
1822∼1829
1847∼1853
205
176
263
158
161
208
108
238
176
246
264
222
307
263
328
313
400
265
287
247




2 (1.24)
2 (0.96)
4 (3.7)
8 (3.36)
9 (5.11)
13 (5.28)
14 (5.30)
18 (8.11)
21 (6.84)
15 (5.70)
18 (5.49)
29 (9.27)
42 (10.50)
33 (12.45)
34 (11.85)
31 (12.55)

<표 8>≪국조방목≫을 통해 본 양자의 비율

 이와 같이 동종지자를 입양하여 남자로 하여금 자신의 제사를 담당케 하고, 가계를 계승케 하는 입양제도는 조선 초기사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조선 태조 때의 중신인 裵克廉의 경우는 자기 누이의 외손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사를 주관케 하였다.449)≪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2월 무신.

 조선 초기에 동종지자의 입양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국조방목≫ 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즉 앞의<표 8>에서 볼 수 있듯이 15세 기 말까지도 입양자의 과거 합격사례는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급제자들 중에서 입양된 양자 사례가 출현하기 시작하여 후기로 내려갈수록 그들이 급제자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증가해 갔다.

 따라서 15세기까지 조선사회에서는 법제적인 측면에서 동종지자의 입양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입양제도란 전술한 바와 같이 동종의 혈족집단을 계승·유지하기 위해 혈족집단의 성원을 충원시키는 장치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사회에서 동종지자를 입양하는 사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따라서 이 시기는 부계의 동종 혈연자들만의 조직체인 씨족집단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원의 충원을 위한 장치를 결여한 사회집단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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