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1. 가족제도
  • 4) 족보

4) 족보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족보가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묘지명에 나타난 계보 관계의 기록이나 음직상속에서의 계보확인의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당시에도 家牒이나 家乘의 형식을 따른「자손보」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경우 가첩에 기재된 친족원은 아들·친손 등의 부계 친족원들 뿐만 아니라 딸(사위)·외손 등도 아들 친손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기재하는「자손의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보는 세종 5년(1423)의≪文化柳氏 永樂譜≫이다. 이 밖에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南陽洪氏(1454)·安東權氏(1476)·全義李氏(1476)·驪興閔氏(1478)·昌寧成氏(1493) 등의 족보가 알려지고 있다.

 안동권씨의 성종 7년(1476) 족보에 대하여는 학계에 이미 소개된 바 있고473) 權寧大, <成化譜攷>(≪學術院論文集≫20, 1981). 명종 17년(1562)에 간행된 것이기는 하지만 15세기의 안동권씨의 족보 와 동일한 형식의≪文化柳氏 嘉靖譜≫에 대해서도 그 내용이 상세히 학계에 소개되었다. 가정보의 경우 발간시기가 16세기 중엽이기는 하지만 그 대체 적인 내용과 수록자손의 범위는≪영락보≫의 내용과 거의 일치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가정보≫의 분석결과를 소개하면서 조선 초기의 족 보의 성격과 그 의의에 대하여 추론하여 보고자 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의 하나인≪문화유씨 가정보≫에는 친손과 외손(외손 의 외손포함)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무한정 기재하는「자손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먼저 이해를 위해≪가정보≫의 첫 면의 기재사항을 소개하면 다음<표 10>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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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0>≪文化柳氏 嘉靖譜≫의 첫 면
<표 10>≪文化柳氏 嘉靖譜≫의 첫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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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가정보≫기록을 살펴볼 때 우리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문화유씨의 친손은 조선 후기의 족보와는 달리 사위나 외손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그 성을 기재하였다.

 둘째, 아들과 딸(딸은 언제나 사위이름으로 기재한다)의 기재순위는 출생 순위 즉 연령순이다. 조선 후기의 족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출생 순위에 관계없이 언제나 아들을 먼저 기재하는 소위「先男後女」의 방식은 이 족보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셋째, 문화유씨 성을 가진 문화유씨의 친손뿐만 아니라 문화유씨의 외손과 그 외아들까지도 모두 기재하였다. 만일 친손을 19대손까지 기재한다면 외손도 마찬가지로 19대손까지 모두기재하였다. 이렇게 볼 때≪문화유씨 가정보≫는 친손뿐 아니라 외손도 모두 포함하여 기재하는 자손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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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1>文化柳氏와 李滉과의 혈연관계
<표 11>文化柳氏와 李滉과의 혈연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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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컨대≪문화유씨 가정보≫에는 문화유씨 7대손인 柳公權과 退溪 李滉과의 계보관계가 앞의<표 11>과 같이 나타나 있다. 즉 문화유씨 7대손인 유공권 의 외손이 尹克敏이고, 윤극민의 外孫婿가 金賆이며, 그의 친손이 金可器이 다. 김가기의 외손서가 李云候인데 이황은 그의 玄孫이다.

 이와 같이 16세기 중엽의 족보가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끝까지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단 문화유씨의 경우뿐만 아니라 15세기에 발간된 안동권씨의 족보와 전의이씨의 족보 등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자손을 수록하였다고 후세에 편찬된 각각의 족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의 일반화된 족보 기록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족보를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무한정 기재하던 시대에서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부 동족의 경우 외손 수록의 범위를 3대로 한정하였고 그 후에는 사위의 이름만을 기재하는 형태로 수록방식이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의 족보에 아들과 딸을 기재하는 순서는 앞의<표 3>에서 살펴본≪분재기≫의 자녀 기재방식과 마찬가지로 출생 순서에 따른 기재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갈수록 연령에 관계없이 아들을 먼저 기재하고 딸(婿)을 나중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즉 다음<표 12>에서 보여주듯이 족보의 자녀 기재방법이 출생 순위를 강조하던 것에서「선남후녀」의 아들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시기는 18 세기에서 18세기 후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는 앞에서 살펴본 외손범위의 축소시기와 거의 동일하게 일치하고 있다.

族 譜 出 生 順 位 先 男 後 女
南 湯 洪 氏
潘 南 朴 氏
陽 城 李 氏
延 安 金 氏
靑 松 沈 氏
平 山 申 氏
仁 同 張 氏
達 城 徐 氏
大 邱 徐 氏
龍 仁 李 氏
同 福 吳 氏
綾 城 具 氏
慶 州 金 氏
豊 壞 趙 氏
淸 風 金 氏
杞 溪 兪 氏
南 原 尹 氏
固 城 李 氏
眞 城 朴 氏
淸 州 李 氏
文 化 柳 氏
安 東 金 氏

1683, 1706
1459
1719
1653


1702

1732
1712


1731
1750

1706

1600
1657
1562
1719
1716

1773
1765
1712
1636
1769
1815
1775

1793
1787
1784
1760
1857
1704

1633


1639
1790

<표 12>족보에서의 남녀의 기재방식

 그렇다면 족보의 자녀 기재방식에서「선남후녀」의 방식과 연령순으로 기재하는 방식이 갖는 차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족보에서 자녀를 연령 순으로 기재하는 것은 인륜의 질서를 존중하기 때문이고,「선남후녀」의 방식 은 본가 즉 동족원을 보다 존중함을 나타낸다.474)≪文化柳氏族譜≫(1803).
≪龍仁李氏族譜≫(1732).
바꾸어 말하면 족보에서 선남후녀의 방식을 취하기 시작한 시기에 와서야 사람들은 本宗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조선 초기의 족보는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성을 기재하며 무한정 수록하고 있었고 족보의 기재방법에 있어 인륜의 질서를 본종의 중요성보다 강조하여 출생 순위에 따라 수록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기재방식의 족보는 동성동본집단 성원만을 존중·강조하는 씨족의 기 록, 즉「씨족보」가 아니라 자손의 기재, 즉 한 공통조상의 내외자손을 모두 기록하는「자손보」의 성격이 뚜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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