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2. 의식주 생활
  • 1) 의생활
  • (1) 조선 초기 복식문화의 역사적 배경

(1) 조선 초기 복식문화의 역사적 배경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는 선양의 성격을 띤 무혈혁명에 불과했으므로 초기의 모든 제도는 고려의 유제를 따르면서 점차적으로 국내외 정세를 감안하여 자주적인 성격을 띠어 갔다. 따라서 개국 초부터 실시된 五禮儀는 고려시대에 5례를 운영한 경험의 토대위에≪古今詳定禮≫가 참고되었고,≪高麗史≫五禮와 기본구조가 동일하였다.477) 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229쪽.

 고려 공민왕의 背元向明 정책으로 약 1세기에 걸친 원과의 관계가 정리 되기 시작하여, 우왕 13년(1387)에는 胡服 착용을 금하고 명제를 따르도록 하였다.478)≪高麗史≫권 72, 志 26, 輿服 1, 冠服. 공민왕 19년(1370) 명 태조로부터 받은 왕과 왕비·백관의 관복 일 습은 명제에 비해 2등급 낮은 2등체강 원칙을 따른 것인데 이 제도는 그대로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중국은 강등된 관복제도를 시행토록 강요함으로써 중원의 천자로 군림하는 명분을 삼았다. 그리고 이를 준용한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대륙의 인정을 받는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대내적으로는 왕조의 권 위를 세우는 통치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원과의 장기간 접촉으로 양국 문화는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이러한 특성을 지닌 여말의 유습은 조선조로 전래되었다. 원나라 복식의 이름을 차용한 천릭[또는 첩리, 帖裏]·더그레[褡■]·돕지[단추;開禁]·쿠리매 등이 있으며, 고려의 실물자료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白紵袍479)<瑞山文殊寺金銅如來坐像腹藏遺物>(東國大 博物館 所藏).와 그 형태 및 깃·등바대의 특이한 재봉법까지 동일한 유물이 조선 초기의 복식에서 보이고 있다.

 조선왕조는 개국 초 고려 말의 정치와 사회의 혼란을 재정립하고 왕권교체의 명분과 왕권의 위상을 내세우는 방편으로 유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는 태조의 즉위교서에도 반영되었다. 즉 관혼상제는 국가의 법도이므로 경전 및 고금의 관행을 참작하여 인륜을 두터이하고 풍습을 바로 잡는 규범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는데480)≪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이는≪朱子家禮≫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관혼상제는 곧 四禮로서 가족집단의 의례를 다룬 가례이며, 이 가례가 국 초에 강조된 것은 유교문화 이념을 가족단위의 사회계층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시사한 것이었다.481) 李範稷, 앞의 책, 176∼177쪽.

 이와 같이 유교는 개국 초부터 치국의 이념으로 수용되어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정책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는 새 왕조를 성립시킨 집권사대부의 대부분이 신진 유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학풍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사회신분 체제의 정비 및 재편성 작업을 추진하여 양반·중인·양인·천인의 4신분으로 분류하여 사회적 지위를 세습적으로 고정되게 하였다.482) 申解淳, <社會身分>(≪韓國史論≫3, 국사편찬위원회, 1975), 129쪽. 따라서 엄격한 신분제도 는 복식 구조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기본이념을 바탕으로 국초 창업과 수성에 필요한 국가제도를 마 련함에 있어 전문적인 예학자와 정치운영에 참가한 실권자들의 협의기구로 태종 때에는「儀禮詳定所」를 두어 국정 전반에 걸친 자문을 받도록 하였고 예제운영에 필요한 예서가 반포되었다. 또 조선조 왕실의 정치적 명분과 권위가 정립되는 시점에서 성종조 정치운영을 반영한 ≪經國大典≫과 ≪國朝五禮儀≫는 국가의 법전으로 공식 행사에 이용되었다.

 각종 의례를 실행할 때 의례복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될 조건이었으므 로, 태종은 예복과 상복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의례복을 전담하는「冠服色」 을 설치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논의하도록 지시하였다.483)≪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원년 병오. 이는 곧 명나라 冠服類를 체강원칙에 따라 수용한 것이며 일반인의 경우에도 관혼상제 의례 복에 이를 채용토록 하였다. 이처럼 예학의 수용에 따라 명나라의 袍服이 의례복으로 제도화되었으나 예복 속의 받침옷은 상·하계급 모두가 우리의 전통복식을 착용하는 2중 복식구조를 나타내었다. 이는 신라 진덕왕 2년(648) 당제의 수용 이후 공통된 제도로 우리 복식사에 나타나는 한 특징으로 지적 되고 있다.

 한편 세종 때에는 각종 예서의 편찬작업 기틀이 마련되었고 의례복의 기준이 확립됨과 동시에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안정기를 맞아 개국 이후 최초의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또 우리글의 보급으로 저고리[赤古里]·치마[赤亇]·바지[把持]·곁마기[裌隔音]·액주름[腋注音·腋皺衣] 등 전 통복식에 대한 우리글 표기가 한자를 차용하여 시도되었고484)≪世宗實錄≫권 7, 세종 2년 9월 무인·권 111, 세종 28년 3월 갑오. 왕실에서도 請賜 冠服으로 전래되는 왕비의 법복인 翟衣를 국속제 長衫과 병행하는가 하면,485)≪國朝五禮儀序例≫권 5, 凶禮. 연산군때에는 관복(團領)에 부착하는 흉배제도를 명나라 제도와 상관없이 猪·鹿·鵝·鴈 등의 문양을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486)≪燕山君日記≫권 60, 연산군 11년 11월 갑진.

 또한 직물산업 분야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시책이 마련되어 다양한 종류의 직물이 생산되었다. 고려 말에 전래된 목화씨의 재배 성공으로 조선은 국초부터 의료산업의 기반을 갖추게 되어487) 高承濟, <綿業>(≪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321쪽. 의료보급은 물론 솜을 이용한 봉제법과 교직의 제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고급필단의 제직도 태종 16년「段子織造色」을 설치하여 시도되었고488)≪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기해. 연산군 때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제직기술을 인가마다 전습케 하고 이의 사용을 허락하였으므로 일시적으로 수요가 늘어 공급이 달리게 되었다. 그 결과 여복 圓衫감으로 관복을 지어 입고 조정에 나아가 당시 조정에는 반 이상이 이러한 옷차림이었다고 하니489)≪燕山君日記≫권 58, 연산군 11년 6월 병인. 당시의 상황이 짐작된다. 물론 최고급 의료인 織金緞의 제직도 가능하였는데490)≪燕山君日記≫권 55, 연산군 10년 8월 신유. 이러한 제도를 반영한 실물자료가 출토 복식에서 발견되고 있어491)<南湯洪氏 出土服飾>(檀國大 民俗博物館 所藏). 당시 기록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울러 연산군 때의 화려한 복식 문화의 모습을 직접 살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 이후의 각종 사화는 정치 질서의 문란과 사회 질서의 파괴를 초래하여 혼란이 계속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명분없는 출병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왕조는 극심한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 흐름을 양분할 정도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복식구조 역시 전·후기로 이 분화하였다.

 전기의 복식구조는 남복의 경우 단령·답호·첩리·직령·장의·액주름의 포류와 바지·저고리류이며, 여복은 장의와 다양한 형태의 저고리류·치마·속바지이다. 따라서 남복은 포복이 다양하여 바지·저고리는 내의 역할에 그 치는데 비해 여복은 반대로 포복 장의와 다양한 형태의 화려하게 장식된 저 고리류가 겉옷 역할을 하는 특징을 나타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임란전 사 망한 사람들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 수백 점을 분석한 결과이며492) 朴聖實,≪朝鮮前期 出土服飾硏究≫(世宗大 博士學位論文, 1992). 또한 거의 모든 출토복식이 수의가 아닌 墓主의 평상시 복장이므로 조선 초기의 실물 자료가 전무한 상황에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을 고비로 트임이 있는 氅衣·中致莫 등의 편안한 복식이 등장하며, 동일한 복식이라도 깃모양, 무의 형태에 있어 과장된 부분이 축소되고 單團領이 겹옷으로, 여복 저고리가 단소화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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