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2. 의식주 생활
  • 2) 식생활
  • (2) 일상식의 관행

(2) 일상식의 관행

 우리 나라 상용식사의 기본형은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밥상차림, 즉 반상이라 한다. 밥상차림이 상용식사의 기본으로 형성된 것은 삼국 시대 후기부터이다. 삼국시대 비로소 미곡 중심의 농업국으로 생활이 정착 되어 쌀이 주식의 기본이 되고, 장·김치·젓갈과 같은 발효식품이 만들어지고 무쇠솥을 사용하여 밥을 짓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이후 우리 나라의 풍토와 생활 환경과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간단한 밥상차림은 밥과 국이나 찌게, 김치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나물·생채·조림(또는 구이)을 갖추어 3첩반상이 되며 이외에 전·마른반찬·회 등의 첨가 여부에 따라 5첩·7첩·9첩반상이 된다. 이처럼 반찬 수에 따라 첩의 수가 바뀌기는 하지만 한상에 같은 식품, 같은 조리법이 중복되지 않게 하여 밥맛과 영양상의 균형을 이루게 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밥상차림에 대한 이러한 타당성은 오랫 동안의 체험과 요구가 저변을 이루어 정착 되어온 것이며 식품구성의 원칙은 조선 초기 향약자생의 연구환경에서 제고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동의보감≫잡병편 권 1, 용약조에서는 “우선 음식으로 병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약을 쓴다”고 하였고, 권 4, 내상조에서는 “올바른 식사와 약의 성질을 알면 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강조된「약식동의」의 관점은, 일상식사의 음식구성 원칙으로 반영되어 뿌리내린 것이다. 이것은 전래 식생활에 함축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로 생각된다.

 반상기는 밥상을 꾸미는데 필요한 식기의 한 벌을 말한다. 조선시대 반상기의 소재는 사기제품과 놋제품이 쓰였다. 반상기의 한 벌은 밥그릇·국그릇·숭늉그릇·종지·김치보·조치보(찌개그릇)·쟁첩(반찬그릇)으로 이루어 진다. 남자용 밥그릇은 직선형의 주발형이고, 여자용 밥그릇은 곡선의 발이 형이며, 전래 반상기의 용량은 1인분을 기준으로 표준화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밥상은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외상으로 대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반상기의 용량이 1인분 기준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밥상의 외상 접대의 원칙을 실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상용식사가 개인의 건강 보존을 위한 필수 요소임으로 누구에게나 필요량을 먹게 하려는 데서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존장주의에 비롯한 관행이라는 견해는 문화에 내재하는 타당성을 간과한 것이다.

 주거양식이 온돌로 정착됨에 따라 식사양식도 좌식으로 일원화되었다. 고려시대도 일부 지방에 구들 설비가 있었지만, 조선 초기에 이르면 구들의 설비가 관청·사찰을 위시하여 남쪽지방에까지 확대되어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고 여름에 시원하게 지내는 주거의 이중요소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이는 우리 나라 기후에 어울린 주거문화가 정착된 것이며, 식사양식도 좌식으로 전환되었다. 관청이나 사찰의 온돌 설비가 확대된 것이 15세기 초 무렵으로 보이며,567) 申榮勳,≪韓國의 살림집≫(悅話堂, 1983), 120∼124쪽. 온돌의 확대, 유기제품 식기의 사용, 좌식형 상(床)의 사용은 일련의 구조적인 요소이므로, 식사양식이 좌식으로 변하여 일원화되는 것도 대체로 같은 때라 하겠다.

 고려의 상차림의 일부를≪고려도경≫잡속조에서 보면, 객관에서 조석식사를 대접할 때 상탁에 음식을 담은 小俎(쟁반 같은 것)를 놓고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였다. 음식을 담은 소조의 수를 손님의 신분에 따라서 2조에서 3 조·5조 등으로 증가시켰으며, 신분이 낮은 손님에게는 좌식상으로 연상(두레상)을 차렸다.568)≪高麗圖經≫권 28, 供張 1, 丹漆俎·黑漆俎.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좌식형 상을 사용하게 되면서 한상에 음식을 모아 차렸으며, 다만 7첩 이상이 되면 모양은 동일하지만 본상보다 작은 것을 곁에 놓고 전골이나 반주·주전자 등을 놓았으며, 이것을 곁상이라 하였다.

 한편 제례는 사가에서도 높은 상에 입식형 차림으로 진설하였으며, 이것 은 尙古的인 관행이었다. 궁중의 연회도 입식차림으로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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