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2.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 (1) 취락의 입지조건

(1) 취락의 입지조건

 조선 초기에는 전시대의 취향과 마찬가지로 산골짜기나 산기슭에 집 짓고 사는 것을 선호하였다. 개울과 넓은 들이 내려다 보이면 더욱 좋은 터전이 라고 여겼다.

 산기슭이나 산골의 집들은 뒷산을 배경으로 삼고 흐르는 내를 내려다 보 도록 지었는데, 이는 생활에 요긴한 것들이 산과 들과 내에서 얻어지기 때 문이다. 갖추어져 있어야 地利를 얻었다고 좋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와 지리란 물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산하가 일깨워 주는 인격 함양을 통한 삶의 의지와 환희도 수반한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를 통하여 우주의 운행을 감지하고 삶의 精髓와 함께 修身을 체득해 가기 때문이다.

 산은 山谷間에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이다. 산의 형세와 계절 변화에서 아름다움을 익혔고 그것을 잠재의식화 하였다. 누대에 걸쳐 형성된 아름다 움에 대한 잠재의식은 필요할 때면 자극에 따라 아름다움을 표출하였다. 그 결과 특별한 기능을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끼리 지은 집이나, 짓고 보면 뒷산 의 소담한 형상을 닮은 초가지붕이 되었다. 이는 곧 저절로 우러나오는 아 름다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 흐름은 기와집에도 이어져 용마루의 천연스 러운 포물선, 처마의 곡선 등 다른 나라의 지붕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천의 정수가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투여된다고 믿고 소위 명당에서는 이러한 정기가 더욱 효험이 있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鎭山 아래에 한 마을이 이룩되면 이른바 名基가 배태되었다고들 말한다.

 형국이 아주 넓어 광활하고 水運이 알맞으며 토지가 비옥하면 개국한 새 나라의 국운이 번성하리라 믿고 도성이 들어서고 궁실을 지었다. 도성안에 도 살림집을 짓고, 排設의 방도에 따라 도로가 개설되고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구역이 할당된다. 알맞게 솟아오른 언덕에 의지하여 집들이 들어서는데 그런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면 藏風의 곳이거나 得水의 지역에 터전을 잡기 도 하였다. 조선 초에 새로 도읍한 한양의 경우도 대략 그와 같았다. 이는 고려의 개경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전의 다른 시대의 도성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경향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