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 의료제도
  • 1) 의료시책
  • (1) 의학교육의 강화

(1) 의학교육의 강화

 의료의 혜택을 고루 미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은 의 원의 확보였다. 따라서 태조 2년(1393) 6학의 하나로 의학을 설치하여 양가의 자제에게 의학교육을 시켰고, 태종 6년(1406) 10학을 설치하고 提調官을 두어 의학교육을 강화하였다.624)≪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0월 기해.
≪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신미.
태종은 9년 2월 의정부의 건의로「醫藥活人法」을 제정하였는데,625)≪太宗實錄≫권 17,태종 9년 2월 경진. 이것은 의업출신자를 전의감의 權知와 제생원·혜민국의 별좌로 삼아 의업에 정진토록 한 것이다.

 세종은 儒醫를 삼의사에 겸직시켜 의학교육과 의술을 兼治하도록 하였으며,626)≪經國大典≫권 3, 禮典 生徒. 세조 때에는 80명의 의생가운데 50명은 전의감에, 30명은 혜민서에 속하게 하여 교육을 강화하였다.627)≪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경자. 그러나 양반이 의술을 천시하여 의학에 정진하는 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의도와는 달리 큰 성과가 없었다. 세조가 친히≪醫藥論≫628)≪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12월 신해.을 저술하여 任元濬으로 하여금 주해를 부쳐 인쇄 반 포케 한 것도 의학교육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조는 또 의원이 의서 읽는 것을 유생의 예에 의하여 매달 삭망에 親講 토록 하였으며,629)≪世祖實錄≫권 37, 세조 11년 11월 신미. 성종은 생도를 독려하기 위해 각사 제주로 하여금 매달 고 강하여 성적이 나쁜 자는 직첩을 회수하고 해당 관사의 서리로 임명하였다 가 능통한 뒤에 복귀토록 하는630)≪成宗實錄≫권 16, 성종 2년 3월 경술.
≪經國大典≫권 3, 禮典 獎勸.
등 의학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유능한 자 는 특별 서용하거나 품계에 따라 副提調·兼敎授의 칭호를 주도록 하였고 특출한 자는 서얼을 막론하고 내의원에 입속을 허락하는 등 의학교육과 의 술보급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631) 孫弘烈,≪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修書院, 1988), 202∼203쪽.

 이러한 의학교육은 의생뿐만 아니라 현직 의관에게도 실시하였기 때문에 의학과 의술의 학문적·기술적 발전은 물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의원 확보에도 기여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의술을 보급하고 의원의 자질을 높이는 한 편 의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醫書習讀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의생과 유생 중에서 총민한 자를 뽑아 습독관으로 삼고 의학을 교육하여 특출한 자에게 는 동반직을 제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632)≪端宗實錄≫권 13, 단종 3년 정월 신미.

 이 의서습독법은 세종 때에는 크게 활용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단종·세조·성종대에 습독관에 대한 勸懲法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제정·강화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관직(주로 遞兒職)을 내의원과 전의감에 증설하여 이들을 격려하였으며, 습독관 출신은 현직을 제수받더라도 내의원직을 겸하도록 함으로써 유능한 의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633) 孫弘烈, 앞의 책, 205∼210쪽

 또한 문신들에게도 의학을 장려, 유의가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의원들과 함께 선초에 의서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초에는 의학지식의 보급은 물론 의원도 많이 양성하였고, 이러한 의학의 학문적·기 술적 발전은 조선시대 의학의 발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의학발전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학교육은 지방에서도 실시되었다. 즉 태조 2년 全羅道按廉使 金希善의 건의에 의해 매 계수관마다 의원을 설치하고, 양반 자제를 뽑아 교육을 시 키게 한 것이 시초였다.634)≪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정월 을해, 그후 태종·세종대에 土官이 설치된 지역에 醫學 院·司醫局·掌醫局 등을 설치하여 의생교육과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635) 孫弘烈, 앞의 책, 211∼212쪽 참조. 그리고 세조·성종대에는 지방의생의 정원을 정해 敎諭로 하여금 이들의 교육을 전담케 하였다.

 그러나 각 도에 1명씩 파견된 교유가 여러 고을의 의생을 제대로 교육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교유와 의생은 교육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그것 은 이들이 지방민의 치료와 약재의 채취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또 지방 의 생은 의술이 미숙하여 치료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3의사에 醫 生房을 설치, 이들을 재교육시켜 시험에 응하게 하였다.636)≪世宗實錄≫권 28, 세종 7년 5월 임신. 그리고 성종대에 는 지방 의생 중 총민한 자를 5년에 한 번씩 34명을 뽑아 올려 전의감과 혜민서에 분속시켜 교육함으로써637)≪大典續錄≫권 3, 禮典 獎勸. 의원 양성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개국 초부터 의원 양성에 노력한 것은 의원의 수가 절대 부족하여 자주 발생하는 전염병과 일반 병자를 모두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방 의생의 교육에 특별한 대책이 계속 강구된 것은 중앙에는 활 인원·혜민국·제생원 등이 있었으나, 지방에는 계수관마다 의원이 겨우 1개소씩 설치되어 있거나, 토관이 설치된 지역에 의학원·사의국 등이 설치되 어 있지만 치료는 주로 의생이 담당하였으므로 지방민의 구료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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