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3) 김시습(1435∼1493)

(3) 김시습(1435∼1493)

 金時習의 사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부딧치는 문제는 그가 유학은 물론 불교·도교 등 3교 각각에 대해 적지 않은 저술을 남기고 있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시습을 유학자나 불교도로 아니면 도가 사상가로 보는가 하면, 나아가 3교를 넘나들었던 사상가로 보기까지 하였다.083) 金時習의 사상을 성리학의 입장에서 본 연구로는 金鎔坤,<金時習의 政治思想의 形成過程에 대하여>(≪韓國學報≫18, 1980)가 있고, 불교적 관점에서 본 연구로는 鄭鉒東,<金時習의 佛敎觀>(≪慶北大論文集≫6, 1962)와 韓鍾萬,<雪岑 金時習의 思想>(≪韓國佛敎思想史≫4, 원광대, 1974)가 있다. 도대체 이처럼 다채로운 사상적 면모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그의 사상만큼이나 다채로운 행적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쓸쓸히 無量寺에서 죽을 때 화장하지 말라고 한 것은 파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일생 동안 생각한 것은 왕도정치의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상황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불교로, 도교로 빠져 들어갔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김시습의 행적이 과연 그러했는지를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사상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김시습 유학사상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즉 우주만물의 생성하는 원리로서의 道와 이 도를 구체적인 운동(神이나 鬼 또는 陰과 陽)을 통해서 만물을 생성하는 氣와 이러한 도와 기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 구현되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道-氣-心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이 구조를 통해서 볼 때, 김시습이 이기론의 이기 대신 기와 심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기-심으로 이어지는 구조도 중요하지만 이 구조에 부가한 김시습의 견해가 중요하다.

 첫째, 세계창조의 동인으로서 기를 중시하면서 동시에 이 기가 그냥 기가 아니라 천지의 공정하고 바른 기라야 한다고 본 점이다. 그럴 때 천하 公物로서의 도를 내포하는 기로 위치지어지게 되며 김시습은 이를「理之氣」라고 명명하였다.084) 金時習,≪梅月堂集≫권 20, 說 生死說. 그리고 이 때만이 온갖 사물이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게 되며 예라고 하는 것은 천지만물의 공정하고 바른 질서에 대한 공경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였다. 둘째, 어떻게 보면 보다 중요한 것은 천지의 正氣가 인간의 심에 의해서 그대로 수용되고 있는 점이다. 그에게서 공정하고 바른 심이란 義理 중에서 의, 公私 중에서 공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忠恕를 의미하는 것이다.085) 金時習,≪梅月堂集≫권 20, 說 常變說. 여기서 김시습이 왜 그토록 심학공부에 열심이었는가를 이해하게 되면 세조정권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그에게 세조의 집권은 정기에 의한 활동이 아니라, 정기를 무너뜨리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제 앞의 견해를 토대로 김시습이 생각하고 있는 현실정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또 이를 통해서 당시 그가 직면했던 상황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김시습의 사상적 구조는 공정한 기와 심이 동시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기와 심은 모든 인간에게 고루 품부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지를 세워서 끊임없이 기를 길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춘하추동의 질서가 운행되는 것과 같이 인간사회도 의리와 도덕에 의해, 즉 바른 마음에 의한 공부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점에서 특히 사회를 다스려 나가는 치자계급의 노력이 특히 요구되었다. 이른바 민을 위하여 왕도정치를 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통치권력의 근거가 하늘, 다시 말하면 민에게서 나오는 것으로서 이 때문에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애민을 근본으로 하는 仁政을 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086) 金時習,≪梅月堂集≫권 20, 義 愛民義. 이것은 왕도정치에 역행하는 군왕은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맹자의 왕도정치론과 같은 맥락으로 그 자신이 세조정권에 저항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김시습의 사상적 토대는 왕도정치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토대로서 성리학의 체계를 수용한 것이었다. 특히 맹자의 왕도정치론을 무엇보다 중시하였다. 또 그는 맹자의 왕도정치를 되살린 송대 도학자들이 이 세상을 人欲에서 벗어나 의리와 천리가 회복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고 평가하였다.087) 金時習,≪梅月堂集≫권 20, 序 明道程先生序.

 김시습의 도학적 자세는 당시 지배사족은 물론 민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 평생 깊이 몸담았던 불교와 도교 및 기타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도교와 불교 중 불교의 사상체계를 특히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것은 불교의 기본사상이 성리학의 왕도정치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승으로 받드는 바가 心이란 점도 그렇고, 불교의 교리가 慈愛를 앞세우는데, 이것은 바로 성리학의 仁政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088) 金時習,≪梅月堂集≫권 16, 雜著 三請. 그러나 高僧이 국정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그 자신도 세조의 부름에 불교로써 출세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089) 金時習,≪梅月堂集≫권 16, 雜著 仁愛. 동시에 불교의 因綠鍾福說의 허구성을 성리학의 禍福說로 설파하였다.090) 金時習,≪梅月堂集≫권 16, 雜著 魏主.

 김시습의 도교에 대한 공부 또한 깊었으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 기준이 바로 왕도정치의 입장 여하와 직결되었다. 비록 도교에서 내세우는 도덕과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성리가 애초에는 차이가 없었으나 점차 도덕과 성리는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 중요한 차이가 도교는 도를 체득하나 率性의 도가 아니면 덕을 논하나 明命의 덕이 아니어서 그 혜택이 세상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었다.091) 金時習,≪梅月堂集≫권 17, 性理. 도덕에 대한 이해를 예로 들 때 성리학은 천하를 공정하게 선으로 향하게 하는 왕도정치의 그것이었다면, 도교는 이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교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도가의 修眞之術이나 服氣法을 평가하는 데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이것들이 그 자신의 몸만 보존할 뿐 世道에는 무익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도교의 복기법 대신 성리학의 養氣法을 체득해야 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092) 金時習,≪梅月堂集≫권 17, 雜著 服氣. 김시습의 이런 자세는 도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巫覡信仰이나 卜命之術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093) 金時習,≪梅月堂集≫권 17, 鬼神·弭災. 요컨대 그는 일상생활에서의 합리적 생활, 다시 말하면 의리와 도덕에 근거한 생활이야말로 命과 福을 가져다 주는 확실한 길임을 역설하였다.

 그의 왕도정치론은 비록 짜임새가 없고 거칠고 소박한 것이었지만 성종 이후 사림세력의 등장과 함께 전개된 왕도정치 구현이라는 사회적 운동을 실천하는 선구적 의미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후 사림세력이 실질적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16세기 말 李珥에 의해 그의 사상이 갖는 의미가 다시 주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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