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4) 남효온(1453∼1492)

(4) 남효온(1453∼1492)

 南孝溫 사상의 일단은 성종 9년(1478)에 잇따른 재이에 대한 방안을 개진하라는 求言敎에 대해 그가 올린 ① 正婚嫁 ② 擇守令 ③ 謹用捨 ④ 革內需司 ⑤ 闢巫佛 ⑥ 興學校 ⑦ 正風俗 ⑧ 追復昭陵 등 8가지 조항의 상소 가운데서 드러나 있다.094)≪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병오. 이 상소를 통해서 당시 남효온이 생각한 時弊와 그 대책을 읽을 수 있고 동시에 그 사상적 기반을 알 수 있다.

 남효온이 생각하고 있었던 시폐는 세조 집권 이후 집권관인층에 의해서 주도된 사회·경제적 부의 집중화 현상 및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巫·佛의 사회적·사상적 습속의 확대였다. ① 정혼가 ② 택수령 ④ 혁내수사의 세 조항에서 사회·경제적인 부의 집중화 현상을 지적하였다. 당시 사회·경제적인 부의 집중화가 왕실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을 왕실이 각 지방에 건립하고 있던 本宮農舍와 서울의 내수사 건립을 통해서 지적하였다. 이것은 결국 왕실이 민인과 이익을 다투는 것으로서 민인의 곤궁화가 초래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의 혁파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남효온은 부의 집중화 현상이 왕실만이 아니라 집권양반층에 의해서 널리 진행되고 있었다는 데에 보다 심각함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 문제를 ② 택수령 조항에서 지적하였다. 지방수령의 상당수가 무식한 자가 아니면 뇌물을 즐기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한번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회로 돈놀이를 하고 이에 따라 집권층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정도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남효온은 가난한 자는 무전농으로 전락하여 농촌이 텅비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는 방안으로 수령의 선발을 엄격히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부의 집중은 농민의 몰락을 촉진시켰을 뿐 아니라 양반층 내부에 사치풍조를 초래하였다. 이에 남효온은 ① 정혼가 조항에서 이러한 풍조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부모가 자식을 남겨두고 일찍 죽었을 경우 형제족당이 부를 탐하여 결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현상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문제는 이러한 부의 집중화 현상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습속과 예제마저 붕괴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그는 ⑤ 벽무불 조항에서 그 폐해를 지적하였다. 즉 역대 왕들에 의해서 淫祀와 불교가 금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國巫와 主持가 혁파되지 않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이들 의식이 계속 거행되었다. 더욱이 근래에 와서는 왕실과 집권관인층에 의해서 절이 세워지고 음사가 거행되었으며, 이것은 사람의 死生禍福과 壽夭貴賤이 모두 무불에 의존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남효온은 앞에서 열거한 문제들에 대해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근거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른바 왕도정치를 당시에 구현하겠다는 것으로서, 그 자신이 金宗直 및 그 문인들과 이미「小學實踐運動」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방향에서 대책이 강구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남효온이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내세웠던 대책의 첫 번째는 用人 문제였다. 그는 이 문제를 ③ 근용사 조항에서 제시하였는데 성리학을 익혀 충효를 실천하고 있는 慶延·林玉山·崔小河를 높이 등용하고 탐학한 무리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음은 용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기구로서 학교 문제였는데 이를 ⑥ 흥학교 조항에서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남효온은 모든 사람들이 성리학을 익히고 孝悌忠信의 도를 실천하는 전백성의 儒者化가 필요하나, 현재의 실정은 학교가 유명무실하여 師長들이 학문은 물론 실천적인 도를 체득하지 못하는 한심한 실정임을 지적하면서 현인 군자로서 사장을 삼아 아이들을 교육시키면 학교가 일어나고 인재가 배출되어 왕도정치가 이루어질 것임을 주장하였다.

 남효온은 부의 집중화현상과 함께 나타난 부박한 습속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시세가 그러한 것이어서 되돌리기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 ⑦ 정풍속 조항을 통해서 지금이야말로 三代의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시기로 불효·불목한 자들을 엄히 처벌하면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바르게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남효온은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궁극적으로 민심을 제해하여, 이것이 하늘의 마음을 움직여 재앙이 내리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 가운데 세조대 단행된 昭陵의 유폐야말로 인심의 불순함을 가져온 대표적 사건이라고 보면서 이를 追復하여 天心·天氣가 순조로워지도록 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왕도정치 구현과 관련하여 중요한 대목인 巫佛을 혁파하자는 조항에서 무불의 확대가 만불기신하는 행위로서 천지의 평화를 가장 해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다만 상소중에서는 구체적으로 무불에 대신한 성리학의 체계는 제시되지 않았다. 이는 남효온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문제로 다행히 이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시한 글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鬼神論>·<心論>·<性論>·<命論>의 4편의 글이다.

 남효온의 유학사상에서095) 南孝溫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는 이 시기 사상사 내지 정치사 연구에 빠뜨릴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남효온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서는 鄭後洙,<秋江 南孝溫의 生涯와 思想>(≪民族文化≫5, 漢城大 民族文化硏究所, 1991) 참조. 먼저 주목되는 것은 김시습과의 사상적 유사성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김시습의 사상을 어느 일면에서 심화시키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김시습과 사상적으로 연계되면서도 구별되는 점이 아닌가 한다.

 먼저 연계되는 점을 보면 김시습의 사상체계가 道-氣-心으로 이어지는 형태였는데, 남효온의 사상체계 또한 거의 같다. 이는 도-심으로 연계되는 구조인데 남효온에게 있어 도와 심은 연계 내지 일치되며, 특히 이 모든 것이 심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심을 통해서 전 우주의 생성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096) 南孝溫,≪秋江先生文集≫권 5, 論 心論. 남효온이 심을 강조한 사상체계는 그의<성론>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당시 일반적으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을 양분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에 대해서 性은 하나라고 하면서 기질지성은 성에 담겨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097) 南孝溫,≪秋江先生文集≫권 5, 論 性論.

 남효온의<심론>은 그의<귀신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가 다시 귀신론을 지었던 것은 당시 만연하던 무불의 습속을 이론적으로 공격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당시에 무속이든 불신이든 사람들의 운명을 이들 귀신들이 좌우하고 있어 귀신에게 기도하면 복이 온다는 생각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남효온은 귀신이란 理氣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098) 南孝溫,≪秋江先生文集≫권 5, 論 鬼神論. 요컨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관하는 도교의 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심에 의해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동시에 귀신이 바로 理이기 때문데 禮가 아닌 것은 흠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무불에게 드리는 기도가 결국은 흠향되지 않을 것임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치에 근거하여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습속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이를테면 귀신에게 卜을 구하는 문제나 相地하는 문제 등을 귀신의 이치를 가지고 설파하였다.099) 위와 같음. 결국 남효온은 당시 널리 퍼져 있는 귀신화복론에 대해 귀신은 사람에게 화를 끼치지 않음을 말하면서 巫釋術家의 설이 만연되고 있는 것은 道學이 밝지 않은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로써 도학에 근거한 왕도정치의 구현이 남효온이 가졌던 생각이요, 목표임이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앞의 求言上疏도 집권관인층의 강한 반격에 봉착하였고, 이에 도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과「竹林七賢」을 결성하여 현실적인 대응에서 후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사상체계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이 점이 김시습과 다른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시습이 불교의 사상체계를 수용하였다면, 남효온은 불교사상을 사람을 속이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통박한 반면 도교사상을 수용하였다. 즉 불교에 대해서는 다음이란 것이 공허한 곳에서 행할 수 없고 반드시 형질에 담겨진 후에 행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비해 도교에 대해서는 그의<심론>가운데서 마음을 통해서 천도를 체현하는 것이 심학인데 도가의 설 또한 此心·此道에 벗어나지 않으며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옹호하였다.100) 南孝溫,≪秋江先生文集≫권 5, 論 心論.

 남효온이 결국 도학에 근거한 왕도정치론을 현실적으로 계속 실천하지 못하고 도교에 침잠하여 세상을 기롱하게 되는 측면이 그의 사상구조 가운데서 드러났다. 이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글이<명론>이 아닌가 한다. 즉 그는<명론>에서 聖도 命이고 愚도 또한 명이며 常도 명이고 變도 또한 명이며 興도 명이며 亡도 또한 명이라고 하는,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운명으로 돌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운명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101) 南孝溫,≪秋江先生文集≫권 5, 論 命論.

 이로써 남효온이 상소를 올린 이후 얼마되지 않아서 도의정치 구현을 향한 실천운동에서 후퇴하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그의 사상 검토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실천운동으로부터 후퇴한 것이 성종초 실천운동을 함께 전개해간 사림세력과 결별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도학의 正脈으로부터도 멀어지게 되었던 요인으로 볼 수 있다.102) 이러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南孝溫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金宏弼이 병문안을 왔었으나 남효온이 보기를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남효온이 김굉필을 보기를 거절한 이유로는 남효온이 도교쪽으로 경도된 사상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김굉필이 집권 훈구세력의 공격에도 좌절하지 않고 후학 교육을 통해 왕도정치에 대한 사회적 실천운동을 계속 전개하여 중종대 趙光祖 일파에 의해 문묘에 종사 요청되는 토대를 마련한 반면, 남효온은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게 됨으로써 도학의 흐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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