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5) 김굉필(1454∼1504)

(5) 김굉필(1454∼1504)

 金宏弼은103) 金鎔坤, 앞의 책(1994) 참조. 단종 2년(1454)에 서울 정릉에서 태어나서 연산군 10년(1504) 유배지 順天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사후 기록된 행장 등을 통해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修學期(성종 5년∼25년)로 학문과 사상의 토대로서≪小學≫을 중시하고 그에 근거한 교학에 힘을 쏟았던 시기이다. 둘째 仕宦期(연산군 원년∼4년)로서 4년간의 짧은 官歷으로 이렇다 할 활동을 남기지 못한 시기이다. 셋째, 流配期(연산군 4년∼10년)로서 이 시기 또한 조광조와 만나 사제관계를 맺어 학문을 전수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활동이 남아 있지 않는 시기이다.

 김굉필의 수학은 보통 학인과 달리 매우 늦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즉 성종 5년(1474) 그의 나이 21세 때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수학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 이전의 김굉필은 골목대장의 모습을 그려져 있다. 그는 豪邁跌宕하여 그가 타나나면 시장 사람들이 모두 도망갔다고 한다.104)<金宏弼神道碑>(≪朝鮮金石總覽≫下, 朝鮮總督府, 1919), 845쪽.

 이러한 김굉필이 김종직 문하에 뒤늦게 들어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뒤늦게 학문적 입지를 분명히 한 것만은 그 뒤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하다 하겠다. 이런 그에게 김종직과의 조우는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후 김굉필은 그 문하에서 여러 학인들과 유학경전을 토론하는 등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에게 있어 이 시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소학≫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김종직으로부터 소학을 배운 후 확실한 철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소학≫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는 성종 11년 圓覺寺 불상이 저절로 回立하였다는 소문이 전국적인 화제가 되고 조정에서도 연일 이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가 올린 장문의 상소 가운데서 잘 드러나 있다. 즉 유교와 불교를 正과 邪로 대비하면서 유학의 핵심은 五倫의 질서에 있음을 제시하였다.105)≪成宗實錄≫권 118, 성종 11년 6월 을축. 이러한 이해는≪소학≫의 이해체계106)≪小學≫의 체계는 治國의 토대로서 修身 그리고 그 내용으로서의 五倫을 동몽교육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성현의 嘉言善行을 통해서 체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金駿錫은≪소학≫의 체계가 중세 봉건적 윤리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혔다(金駿錫,<朝鮮前期의 社會思想>,≪東方學志≫29, 1981).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굉필이 저술했다고 하는≪家範≫이 아닌가 한다. 조선에는 중국과 같은 家訓書가 없어 內則 등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검토가 필요하나, 그 내용의 일부는 가족안에서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정내에서 남녀 노비들의 활동을 엄격히 구분하고 일의 처리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은 도를 천하국가에 시행할 경우 처신에 마땅할 것이라는 이해로 뒷받침되었다. 다시 말하면 치국보다도 수신적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김종직으로부터≪소학≫을 배우면서 확실한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후 그가≪소학≫에서 제시된 규범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순간도≪소학≫을 놓지 않았다는 말에서도 나타나지만, 사람들이 당시의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면 “小學童子 何知大義”라고107) 南孝溫,≪秋江集≫권 7, 雜著 師友名行錄. 답변하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후의 그의 생활은≪소학≫의 실천으로 일관되었다. 이 점은≪소학≫을 놓고 김굉필이 “문학하는 선비가 아직 天機를 몰랐더니≪소학≫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라고108) 위와 같음. 시를 짓자, 김종직은 이에 “이것이 바로 聖人이 될 根基이니 許衡 후에 어찌 그 사람이 없겠느냐”라고109) 위와 같음. 답한 데서 잘 드러났다. 요컨대 김종직은 김굉필에 대해 도학을 계승할 사람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적어도 성종 17년에 이르러서 김굉필의 관심은 점차 수신에 근거한 소학적 실천에서부터 국가와 사회에 대한 경세문제 쪽에서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은사인 김종직과 멀어지게 된 사건이라 하겠다. 김굉필은 김종직이 이조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시사 문제에 대해 건의한 일이 없다는 점을 들어 시를 지어 풍자하고 비방하자, 김종직은 답시 중에 “임금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하는 도(匡君救俗)를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라고110) 南孝溫,≪秋江集≫권 7, 雜著 秋江冷話. 자조적으로 답한 데서 두 사람간의 생각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생각건대 이러한 자세 전환, 다시 말하면 소학적 일상윤리의 실천에서 국가 사회적인 문제로의 관심 확대가 그와 절친한 道友였던 남효온과 끝내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세 전환이 다음 그의 행적에서 出仕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출사는 그 동안 그가 닦아 왔던 行義가 평가되어 연산군 원년(1495) 천거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받아들였던 데는 김굉필의 자세전환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의란 그가 행동으로 보여온 소학적 실천을111) 김굉필의 소학적 실천을 나타내 주는 기록은 많지만 다음은 그 가운데 유배기간 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라 생각된다(“寒暄常肅然冠服 竟日終夜 嗒然無言 盖用力於未發前氣象也”(靜菴行狀)). 포함하여 그가 오랫동안 계속해온 童蒙들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일상사에서 나타난 유교적 예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중 교학에 대한 활동과 성과는 주목된다. 특히 성종대 드러난 관학 교육의 허구화 현상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남효온이 전하는 바와 같이 김굉필은 주변에서 우려할 정도의 교학적 성과를 거두었다.112) 南孝溫,≪秋江集≫권 7, 雜著 秋江冷話. 여기서 교학적 성과는 다름아닌 소학적 수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김굉필은 연산군 원년(1495) 그의 나이 41세 때 南部參奉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간 후 軍資監主簿, 司憲府監察을 거쳐 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그는 4년 남짓한 짧은 관직생활을 공정한 입장에서 그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獄訟을 처리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관직생활 중에 평소에 품어온 뜻을 펴보기도 전에 연산군 4년에 일어난 史獄에 연루되어 熙川에 유배된 후, 연산군 6년에는 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 甲子士禍로 죽음을 맞이하니 그의 나이 51세였다. 유배기간 동안의 그의 생활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희천에 유배중에 趙光祖와 사제관계를 맺은 일은 그 다음 역사단계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실제 김굉필도 이 부분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음은 조광조와 작별하면서 ‘吾道東矣’라고113)≪海東雜錄≫(下) 권 11, 金宏弼. 말한 데서도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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