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6) 정여창(1450∼1504)

(6) 정여창(1450∼1504)

 鄭汝昌은114) 鄭汝昌의 사상에 대해서는 金鎔坤,<16세기 士林의 文廟祀運動>(≪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참조. 세종 32년(1450)에 태어나서 연산군 10년(1504)에 유배지 鍾城에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사후 기록된 行狀을 통해 대체로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修學期(세조대∼성종 21년), 둘째, 仕宦期(성종 21년∼연산군 4년), 셋째, 流配期(연산군 4년∼10년)이다. 대략 수학기 때 그의 학문적인 기초가 잡혔고, 그 때 익힌 학문을 실제 정치에 반영한 시기가 사환기라 할 수 있다. 유배기는 그가 수학기·사환기에서 얻은 인연과 축적이 당시대의 정치현실과 관련되어 나타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기의 정여창에서 중요한 사건은 세조 13년(1467) 5월 李施愛의 난으로 아버지가 전사한 일이다.115) 鄭汝昌,≪一蠹先生遺集≫事實大略(年譜). 이는 정여창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이 때 그는 ‘父亡戰死者子孫’을 賞職한다는 국가의 방침에 대해 아버지의 비운을 자식이 영광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관직에 나가기를 사양하였다. 이 일화는 수학기의 정여창의 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학문형성에 영향을 준 김종직·李寬義 등과의 학연관계에서 비롯되었다.116) 김종직과의 학연도 그렇지만 이관의와의 학연도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현재로서는 이관의가 김시습과 함께 金泮과 문하관계를 맺고 있고 이관의나 김시습이 다 같이 관직보다는 도의정치 그 자체의 구현에 노력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자세가 그대로 정여창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그의 학행은 깊어졌고 교우범위도 크게 확대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굉필과의 접촉은 정여창의 학문과 행동을 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학자로서 정여창의 학행은 남다른 바가 있어 성종 11년(1480) 국가에서 ‘經明行修者’를 구할 때 성균관 유생의 압도적인 천거를 받았다. 이 밖에 金馹孫이 자신의 교우관계를 열거하면서 도덕문사로서 교우관계를 맺고 있는 자 중에 정여창이 포함된 사실과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보여 준 정여창의 행적에서 분명히 확인된다.117) 鄭汝昌,≪一蠹先生遺集≫事實大略. 그는 이런 士人으로서의 철저한 篤行으로 성종 21년에 천거를 받아 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지만 이 또한 응하지 않았다.

 유자로서의 행동도 그러하였지만 그 전제가 되는 학문 또한 돈독한 것이었다.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그가 남긴<立志論>에서는 물론 행장 곳곳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성종 13년에≪經國大典≫·≪五禮儀注≫를 펴낸 尹孝孫과 朱書를 강론하였다. 여기서 주서는≪朱子家禮≫나≪禮記≫에 해당되는 것이다. 정여창은 폭 넓고 깊이 성리학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특히≪中庸≫이나≪禮記≫에 정통하였다. 이런 점은 오늘날 逸文으로 남아 있는<庸學註疏>의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여창은 김굉필 등이 心學의 실천과 직결되는 소학에 치중한 것과는 달리 심학에 근거한 이학에 치중하였다.

 정여창의 학행은 수학기에 이미 同學은 물론 중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미 조정에서는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수기에만 전념할 뿐 관직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에 정여창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다. 이에 정여창은 성종 14년에는 進士科에 합격한 데 이어 성종 21년 12월에는 文科別試에 합격하여 治人의 길로 나아갔다.

 사실 유자에 있어서 수기와 치인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치인에 앞서 수기가 요청될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수기로서의 이상도 치인을 통해서 구현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수기와 치인의 조화, 이것은 당대 사대부들의 공통된 바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화를 한 시대의 현실속에서 확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유자로서의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다. 정여창이 후학들에 의해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실천의 토대로 삼았기에 더욱 주목받았다. 사실 유자 개개인이 펴나가는 실천 속에서 당시대의 일반적인 지식인들이 염원하였던 道義가 구현되어 가는 사회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여창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러한 바람이 강렬하였고, 그것은 그의 학문과 실천의 디딤돌이 되었다. 바로 이런 점이 김굉필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심학 위주의 계열에서도 주목받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정여창의 치인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점은 그가 安陰縣監 당시 치적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것은 유자로서 갈구하는 이상적인 치인의 행적이었다. 사실 그가 안음현감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그가 읍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둔하리 만큼 독실한 그의 학행을 고려할 때 나올 수 있는 세론이었다. 그러나 안음현에서 보여준 그의 치적은 세인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는 현감으로 부임하자 먼저 수령의 임무는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헐하는 데 있다 하여 이와 관련된 수십 개의 항목을 설정하여 일년간 실천하였다. 그러자 공사가 일이 없고 農桑이 제대로 되었으며 縣民이 경계하여 서로 속이는 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착오가 있는 것은 반드시 찾아 확인한 연후에 시행하였고 원근의 의심스러운 사건과 일은 모두 그에게 와서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가한 때는 읍의 총명한 자제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원근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많았다. 또 봄·가을에는 養老禮를 행하였고 婚喪은 때를 놓치지 않도록 힘썼다.118) 鄭汝昌,≪一蠹先生遺集≫行狀(從子鄭希參作).

 이러한 치인의 치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으나 국초 이래 수령들의 현실상황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없이「守令七事」라 하여 수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 강조되고 있었다. 정여창의 치적도 당시 강조되고 있었던「수령7사」를 실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보기 드문 성과가 달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정여창 개인이 확보하였던 투철한 유자로서의 자세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안음현에서 보여 준 탁월한 치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정여창 본인으로서는관직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현실은 점점 도의정치와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차 관직에서 떠나가려 할 무렵 연산군 4년 戊午士禍에 연루되어 鍾城으로 유배되었다.119)≪燕山君日記≫권 30, 연산군 4년 7월 경신. 그가 사화에 연루된 이유는 김종직의 문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죄목이 ‘罪犯亂言’120)≪燕山君日記≫권 30, 연산군 4년 7월 신유.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至治의 구현을 추구했던 그의 학행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 그가 김종직과 같이 세조의 패도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이 점은 좀더 고려해야 할 면이지만 김종직·이관의와의 학연에서 정여창이 받아들인 정치적·학문적인 입장이었을 것이다.

 정여창의 간략한 생애를 통하여 유자로서의 학문과 치인의 행적, 그리고 그의 학행으로 말미암아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정여창의 학문토대로서 心學에 근거한 실천성이 어느 정도 부각되었다. 이제 여기서는 정여창의 학문, 다시 말하면 심학에 근거한 이학이 후학들에게 어떻게 평가되었으며 또 그러한 평가가 타당한 것인가를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김굉필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문이 심학 위주인 것과는 달리 정여창의 학문은 李彦迪·李滉과 같이 심학에 근거한 이학적인 것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정여창의 학문에 대한 후학의 평가는 대략 다음과 같다.121) ①은≪一蠹先生遺集≫중 李勣의 행장 중에서 ②는 林董의 鄕祠堂記에서 ③은 趙孝仝의 薦學行疏 중에서 ④는 從子 希參의 행장 중에서 각각 발췌한 것이다.

①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중용≫과≪대학≫을 연구하여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② 도덕은 높고 학문은 순정하여 性理를 탐구하고 행동은 효행과 의리를 높혔다. ③≪子史≫에 널리 통하고≪禮記≫에 정통하며 성리학에 심오하였다. 독서는힘써 실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과거공부에 얽매이지 않았다. ④ 부지런히 五經을 밝히는 데 뜻을 두었고≪논어≫에 정통하였으며 體用의 학문을 궁구하였다…한결같이 程子와 朱子를 법삼았으며 독서는 궁리함을 요체로 삼았다. 마음을 다스림은 속이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무릇 자신의 일을 행하는 데는 한결같이 誠敬을 날마다 해야 할 공부로 삼았다.

 이러한 평가들에 의해서 정여창의 학문적인 모습이 거의 부각되었다. 이 중에서 이학에 밝았다는 평가는 다 해당되지만 특히 ④의 경우는 좀더 구체적이다. 즉 책을 읽되 궁리를 요체로 하고 마음에 처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점은 중종대의 文廟從祀運動이 실패한 후 학문이 심학에서 이학으로 변화해간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정당하긴 하겠으나 너무나 원론적이다. 적어도 이황의 문도들에 의해 주목되어 문묘에 종사될 정도라면 이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의문은 ① 潛心庸學이나 ③의 博通子史·精於禮經 그리고 ④의 明五經·精於魯論이라는 평가를 통해 알 수 있다. 물론≪중용≫이나≪자사≫·≪예기≫등도 유자라면 의당 거쳐야 하는 기본도서에 속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여창이 이런 기본도서에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졌다고 하는 점이다. 이 중에서 특히≪중용≫·≪예기≫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庸學註疏>라는 그의 逸文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물론 정여창이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기까지에는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었다. 지리산에 들어가 오랜 궁리 끝에 얻는 결실이라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 밖에 김굉필 등과의 토론과정을 거쳐서 그의 이학에 대한 이해가 정치해졌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를테면, 정여창이 이르기를 “배우되 마음(心)을 알지 못하면 무엇으로 배운다고 하겠는가”하니, 김굉필이 말하기를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정여창이 말하기를 “있지 않는 곳이 없으며 또한 있는 곳이 없다”라고122) 鄭汝昌,≪一蠹先生續集≫師友門人錄 金宏弼. 토론한 사례도 그 하나의 예이다. 이 토론은 心處에 관한 것인데, 정여창은 학문의 근거이자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마음을 설정하였다. 이 마음은 이나 기와 같이 산재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정여창의 학문이 심학에 근거한 이학적 이해를 기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문과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공통되는 점은 至治를 실천하고자 심학에 힘썼고 또 그러한 입장에서 실천했다는 점이고, 다른 점은 김굉필 등은 심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소학·향약 등의 실천에 보다 치중했던 데 비해 정여창은 그러면서도 심학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추구해 갔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김굉필 등이≪소학≫에 관심을 집중하였다면 정여창은≪대학≫·≪중용≫·≪예기≫등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정여창의 학문은 심학에 근거한 이학적인 것이다. 그리고 정여창에게서 보여지는 이러한 학문 경향은 중종 이후 심화되어 갔고, 이언적과 이황 때에 와서는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흐름이 여타 학문 경향과 달리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 계열의 至治運動을 주도해 갔던 때문이었다. 결국 정여창의 학문은 이런 흐름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던 셈이었다. 이제 이런 점을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정여창이 남긴 글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뒤에 조사된 바에 의해서도 日記類·雜說類·韻語類와 일실되었지만 제목만은 알려져 있는<庸學註疏>·<主客問答>등이 확인된다. 일기류나 운어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잡설을 포함하여 조선 초기 士人들의 일반적인 저술형태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전해 오는 얼마 안되는 기록을 통해서 정여창의 사상경향을 보여 주는 것은 立志論123) 鄭汝昌,≪一蠹先生續集≫雜著 立志論. 정여창의 입지론은 李珥 등의 입지론의 원형과 같은 것으로서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理氣說124) 鄭汝昌,≪一蠹先生續集≫雜著 理氣說.·善惡天理論125) 鄭汝昌,≪一蠹先生續集≫雜著 善惡天理論. 등이다.

 입지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정여창이 지식인의 요건으로서 무엇보다 뜻을 강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물론 뜻을 강하게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이를 굳게 지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뜻을 세우고 지켜 나아갈 때 사인으로서 바라는 군자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이해하였다. 여기서 뜻이란 善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것, 이를 달리 표현하면 도의가 구현되는 사회와 정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 토대를 두지 않는 입지란 한갓 강자의 뜻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여창이 선을 구현하고 실천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는 학문뿐 아니라 그의 전 사상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이 점은 이기설 가운데서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이기에 있어 하나의 實과 둘의 뜻을 알아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극기복례하여 도심이 자기 몸을 지배하게 된다”126) 鄭汝昌,≪一蠹先生續集≫雜著.는 표현에서 확인된다. 그에게 있어 공부란 자기를 이기고 예에 돌아가는,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도의의 구현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기설에서도 정여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선비로서의 자세, 마음가짐이었다. 그런데 유자로서 이러한 자세를 갖는 전제로 그는 세상만물 나아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우주론으로서의 이기설은 주자계통의 이기설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기론을 하나의 실과 둘의 뜻으로 이해하였다.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우주의 본체를 이에 의해서 파악하는 주리론에 해당하는 유학자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주리론은 기와 동등하고 균형있는 상호작용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여창의 세계이해로서의 이기설은 善惡天理論에서도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 세계가 이와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듯이 인간사회도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기설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우주가 이에 근본하고 있듯이 인간사회에서 교차하는 선악도 근본적으로 선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세 편의 간략한 정여창의 글을 통해서 그가 지치의 구현을 추구하고 있었고 또 그러한 활동의 근거로 심학을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학을 실천하는 학문적 자세로서 입지를 강조하였다. 심학의 철학적·객관적인 근거로서 이기론과 선악천리론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16세기 지치운동의 실천과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중종대의 조광조계열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선조대의 이황계열에 의해서도 주목되어 그는 문묘종사되었다.

<金鎔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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