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1)≪훈민정음≫(해례본)

1)≪훈민정음≫(해례본)

 지난 1940년에 옛책 한권이 慶尙北道 安東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127) 처음에는 義城으로 알려졌었다. 이 책의 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鄭喆,<原本 訓民正音 保存에 대하여>(≪국어국문학≫9, 1950) 참조. 그 두께는 비록 얇았으나 訓民正音에 관한 책이었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본 학자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御製文, 本文 ㉯ 解例(制字解, 初聲解, 中聲解, 終聲解, 合字解, 用字例) ㉰ 鄭麟趾 序文

 이 중 ㉮와 ㉰는 이 책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알려져 있었으나,128)≪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9월 말미와≪月印釋譜≫권 1 첫머리의 世宗御製訓民正音(諺解)이 있었다. ㉯는 이책에서 처음 보는 것으로 새로운 문자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담은 것이었다. 이것은 그 동안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하여 쌓여온 많은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의 중요성으로 해서 이 책은 解例本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해례본의 존재 가능성은≪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9월 말미)에 실려 있는 鄭麟趾의 서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鄭麟趾序’라 했으니 어떤 책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더구나 그 속에 정인지 자신과 集賢殿 應敎 崔恒, 副校理 朴彭年·申叔舟, 修撰 成三問, 敦寧府 主簿 姜希顔, 集賢殿 副修撰 李塏·李善老 등에게 “자세히 해석을 더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시매”, “삼가 여러 解와 例를 지어서 그 대강의 줄거리를 적었다”고 하였으니 그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이런 짐작을 한 사람도 없었고 그런 짐작을 했다해도 안타까움만 더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해례본은 세종 28년(1446)에 나온 바로 그 책임에 틀림이 없었다. 종래 훈민정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온≪世宗實錄≫(권 113)의 기록이나,≪訓民正音≫(諺解本)은 이 책에서 나온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訓民正音≫(原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은 이처럼 중요한 이 책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가뭇없이 자취를 감출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에 관해서 쓴 글이 많지는 않으나 성종대 成俔이 쓴≪慵齋叢話≫를 비롯하여 그 뒤에도 드문드문 있었는데 이 책을 보고 참고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책이 안동의 한 집에 500년 가까이 고이 간직되어 오다가 1940년에 홀연히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필 일본 軍國主義의 극성으로 우리 민족이 혹독한 고난을 겪고 있었고 우리 말과 글의 숨결이 가물거리던 때에 이 책이 나타난 것은 그 무한한 생명력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의 출현으로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가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발견 직후에 몇 편의 논문이 이미 발표되었지만, 광복 직후에 이 책이 영인되어 우리의 감격을 한층 더 하게 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가 줄을 잇게 되었다.129) 옥에도 티가 있듯이, 이 책은 처음 2장이 떨어진 것이 흠이다. 이 2장은 새로써 넣었으나 御製文의 끝자 ‘耳’를 ‘矣’로 쓰는 등 잘못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安秉禧,<訓民正音 解例本의 復原에 대하여>(≪國語學新硏究 金敏洙敎授華甲紀念論叢≫, 1986) 참조. 이 책은 澗松美術館에 간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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