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2. 훈민정음의 창제
  • 3) 훈민정음의 반포

3) 훈민정음의 반포

 새 문자를 반포한 시기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두 견해가 대립되어 왔다. 일부 학자는 세종 25년(1443) 12월에 정음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때를 반포의 시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왔고, 일부 학자는 세종 28년 9월에≪훈민정음≫(해례본)이 간행된 때를 반포의 시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왔다. 오늘날 정음 반포를 기념하는「한글날」은 후자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즉<정인지 서문>이「九月上澣」으로 되어 있어 음력으로 9월 10일을 반포일로 잡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이다.

 일차적인 중요성은 창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포를 중요한 문제로 삼은 것은 현대에 와서 반포를 기준으로 하여 한글날을 정하려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세종 25년말에 정음을 창제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 이듬해에 이와 관련된 사업이 시작되었으니 이 때에 반포를 한 것으로 본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한다. 그 때의 자세한 기록이 없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떤 절차를 밟기는 밟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에 반포를 문제로 삼는다면, 반포라는 말에 어울리는 절차와 격식을 갖춘 때가 언제였는가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세종 28년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그 때에≪훈민정음≫(해례본)이 간행된 것도 반포의 한 절차로서 중요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그 첫머리에<어제문>이 실려 있음이 결정적인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은 창제자인 세종이 정음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훈민정음≫(해례본)의<해례>앞에 있는 부분을<정인지 서문>에 나오는「例義」에 해당한다고 보아 세조 2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본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부분이<어제문>과 함께≪세종실록≫(권 113, 세종 28년 9월)에 실린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의<어제문>을 3년이나 뒤에 실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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