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2) 국내지도의 제작
  • (1) 조선 초기에 제작된 지도

(1) 조선 초기에 제작된 지도

 우리 나라에서 本國地圖가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였는지는 그 관계유물이나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알 길이 막연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국경이 확정된 후 영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지도제작의 필요성이 일어났을 것이다.373) 金良善,<韓國 古地圖 硏究抄>(≪梅山國學散稿≫, 崇田大 博物館, 1972).

 먼저 고구려에 대해서는≪舊唐書≫에 고구려 영류왕 11년(628) 唐에 사신을 파견할 때 封域圖도 함께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구려에서는 그 이전부터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의 한 고분에 그려진 遼東城의 벽화는 이 사실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이 벽화지도에는 요동성 내외의 지형, 城市의 구조, 도로, 시설물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건물은 기와집과 민가·누각 등이 유형에 따라 그려졌고, 하천과 개울·산 등이 적·청·백색 등을 써서 회화적 수법으로 묘사되었다.374) 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正音社, 1979), 299쪽. 이러한 기법은 조선시대 여러 성시의 회화적 지도와 매우 비슷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림지도의 형식이 이미 4세기 무렵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의 지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三國遺事≫의 관련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때 圖籍 안에 餘州 2字가 있었다. …여주는 지금의 扶餘郡이다. 百濟地理志에 말하기를…(≪三國遺事≫권 2, 南夫餘).

 위에서「圖籍」이라고 한 것은 그 내용으로 보아 지도를 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삼국유사≫를 집필할 때에는≪백제지리지≫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백제는 武王 때 일본에 역·천문·지리에 관한 서적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백제에 지리지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고구려의 州郡縣 164곳이 있는데, 신라에서 고친 이름과 지금의 이름이 新羅志에 보인다”라는 기록으로부터 지리지의 편찬을 짐작할 수 있다.375)≪三國史記≫권 37, 志 6, 地理 4, 고구려. 그리고 문무왕이 薛仁貴에게 보낸 답서에는 (咸亨 원년) 7월에 이르러 入朝使 金欽純 등이 와서 界地를 확정하려 할 때, 지도를 살펴 조사하여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나누어 돌려주려 하였다376)≪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7월 26일.는 기록을 보면 지도를 보고 백제의 옛 땅을 나누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지도를 실제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다. 또 신라는 삼국을 통일 한 후 9주를 설치했는데, 古山子 金正浩의≪靑邱圖≫부록에 삽입된 新羅九州郡縣總圖를 참고해 보면,377) 金正浩,≪靑邱圖≫附錄 新羅九州郡縣總圖. 신라에서도 9주의 강역을 나타내는 지도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의 지도제작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다.≪高麗史≫에 의하면 목종 5년(1002)에 거란에 高麗地圖를 보낸 일이 있었으며,378)≪遼史≫권 11, 列傳 45, 外紀 高麗傳. 의종 2년(1148)에 李深·智之用 등이 宋人과 공모하여 고려지도를 소의 秦檜에게 보내려다가 들켜서 처벌당한 것을 보면,379)≪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2년 10월 정묘. 행정구역을 10도에서 현종대에 5도양계로 개편한 후 지도를 작성한 듯하다. 이<5도양계도>는 조선 성종대 양성지의 상소문에 나타나듯이,380)≪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려지고 조선 초기의 지도 제작에 많은 영향을 준 듯하다. 또≪청구도≫범례에 의하면, 柳公植의 집에 지도가 있었으며 공민왕대 羅興儒가 고려지도를 만들어서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381) 金正浩,≪靑邱圖≫凡例. 고려말에 제작된 나흥유의 5도양계도는 조선 태조 5년(1396)에 李詹이 그린 三國圖나382) 李 詹,<三國圖後序>(≪東文選≫권 92, 下). 태종 2년(1402)에 李薈가 그린 八道圖의 바탕도가 되었을 것이며, 그 편린을 歷代帝王混一疆理圖의 조선도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에 천도하고 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의 5도양계가 8도로 개편되었고 여기에 알맞은 지도의 제작도 추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결실이 태종 2년 5월 태종의 탄신일에 의정부에서 바친 本國地圖이다.383)≪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5월 무술. 이 지도는 조선이 건국된 후 10년 만에 제작된 지도이기 때문에 그 동안에 개편된 행정구역을 반영했을 것이며, 의정부 檢詳이었던 이회가 만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년 8월에 역대제왕혼일강리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하단에 기록된 權近의 발문에 이회가 이 지도 제작을 담당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384) 權 近,≪陽村集≫권 2,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그 후 태종 13년 8월에 의정부는 또 한 차례 본국지도를 태종에게 바쳤다.385)≪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8월 갑술. 이는 태종 13년에 있었던 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전국 주현의 명칭 가운데 계수관을 제외하고는「州」자를 모두「川」자와「山」자로 개명한 주현 명칭을 반영한 전국주현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386)≪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0월 신유. 태종대에 만들어진 두 지도는 고려의 5도양계도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반영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지도는 새롭게 달라진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실정을 충분히 반영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세종은 16년(1434)에 戶曹에 새로운 지도의 제작을 명하였다. 세종은 앞서 제작된 지도가 틀린 곳이 많아 새롭게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387)≪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5월 경자. 뿐만 아니라 새로이 제작할 지도에 필요한 사항을 전국 각 주현의 수령들에게 보내서 다음 사항들을 확인하여 올려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즉 수령들은 경내의 관사배치, 산천의 형세, 도로의 원근과 이수, 그리고 인접한 군현의 이름을 표시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이를 취합하여 국가에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을 量地하여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특히 새롭게 행정구역이 개편된 평안도와 함경도, 그리고 4군6진 지역을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18년에 鄭陟에게 相地官과 畵工들을 데리고 함길도와 평안도 등을 자세히 살펴서 산천형세를 그려 오도록 하였다.388)≪世宗實錄≫권 71, 세종 18년 3월 을축. 이러한 노력으로 고려의 5도양계의 영역을 벗어나 압록강과 두만강 등의 유역과 4군6진 지역이 명확해졌다. 그 후 문종 즉위년(1450)에 각 주현과의 道里를 자세히 조사하여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하려 해도 정확한 거리를 알지 못하여 병력동원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확실한 里程을 파악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389)≪文宗實錄≫권 5, 문종 즉위년 12월 무술.

 문종 원년에 정척은 양계지방을 그린 大圖와 小圖를 바쳤다.390)≪文宗實錄≫권 7, 문종 원년 5월 병인. 이는 그가 세종 18년에 왕의 특명을 받고 양계지방을 조사한 지 14년 만에 맺은 결실이었다. 이 지도를 본 문종은 각 주현간의 거리가 표시되지 않은 점, 동서남북의 4방위법에 의한 지형지물을 표시한 데서 오는 부정확한 점을 탈피하기 위하여 泛鐵을 이용한 12방위에 의한 방향표시의 필요성, 경내의 명산대천·大嶺·古關防·古邑 등이 상세히 묘사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고, 양게의 각주현 수령에게 명하여 이를 보완하여 다시 양계도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조선 초기에 지도 제작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왕은 세조이고 그를 도와 이러한 목적을 이룬 인물은 양성지이다. 양성지는 단종 원년(1453)에 首陽大君으로부터 조선전도·8도도·각주현도 등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391)≪端宗實錄≫권 8, 단종 원년 10월 경자. 정척과 마찬가지로 화공과 상지관을 데리고 하3도의 산천형세를 조사하였다.392)≪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10월 신묘 및 권 13, 단종 3년 2월 을유. 그는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야심차게 이 사업을 추진한 듯하다. 그의 독주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간원 등에서는 흉년을 명분으로 내세워 지도 제작사업은 급하지 않으니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청했지만393)≪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10월 신묘. 세조의 후원으로 이 작업은 적극 추진되었다.

 세조는 즉위한 후 본격적으로 양성지에게 지리지 편찬과 지도 제작을 재차 명하였다.394)≪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8월 을묘. 세조 9년(1463)에 양성지는 정척과 함께 東國地圖를 완성하였다.395)≪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12월 병인. 이는 그가 세조의 지시를 받은 후 10년 만에 이룩한 업적이고, 정척이 세종의 명을 받고 산천형세를 살피기 시작한 지 27년 만에 이루어진 지도이다. 이 동국지도는 고려시대의 5도양계도, 태종대 이회의 8도도, 세종대 정척의 8도도 등을 참고하였고, 또 정척이 이북 3도를, 양성지가 하3도의 산천형세를 조사한 결과를 종합하여 제작한 조선 초기 지도의 완성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동국지도는 鄭尙驥의 東國大地圖가 제작될 때까지 조선 고지도의 표준지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국지도는 유감스럽게 현존하지 않는다. 그 계통을 잇는 지도가 朝鮮方域圖이다.396) 朝鮮方域圖는 필자의 신청에 의하여 문화부 文化財管理局에서 국보 제 248호(1989. 8. 1)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전국도 이외에도 조선 초기에는 지역도가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특히 북방지도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정척의 兩界大圖와 兩界小圖 및 양성지의 閭延·茂昌·虞芮의 三邑圖, 沿邊城子圖, 兩界沿邊防圖, 濟州三邑圖 등이 있었다.397)≪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또 安哲孫의 沿海漕運圖,398) 위와 같음. 魚有沼의 永安道沿邊圖,399) 위와 같음. 李淳淑의 平安道沿邊圖400) 위와 같음. 등도 있었다. 하3도에는 각 감영마다 그 도의 지도가 비치되어 있었고,401) 위와 같음.≪東國輿地勝覽≫에는 東覽圖가 수록되어 있다. 이 동람도는 양성지가 제작한 지도로서,402) 위와 같음. 8도도·8도주현도·8도산천도를 말한다.

 이외에도 단종 2년(1454)에 수양대군은 8도도와 京城圖를 만들고자 친히 鄭陟·姜希顔·梁誠之·安貴生·安孝禮·朴壽彌 등을 대동하고 三角山과 普賢峰에 올라가 도성의 山形水脈을 살펴서 경성도를 만들었다.403)≪端宗實錄≫권 11, 단종 2년 4월 무술. 이 경성도는 후에 수십차례에 걸쳐 제작되는 도성도의 기본이 되었을 것이다. 이 때에 동행했던 정척은 산천형세를 잘 알고, 강희안은 그림을 잘 그렸으며, 양성지는 지도 제작을 잘하고, 안효례는 相地官으로 풍수지리의 대가이며, 박수미는 算士였다. 이와 같이 사계의 전문가가 총동원되어 제작한 지도가 경성도이다.

 또 세조 원년(1455)에 우참찬 黃守身이 경상도지도와 熊川縣圖를 제작하였다.404)≪世祖實錄≫권 1, 세조 원년 7월 을미. 성종 12년(1481)에는 許琮이 平安道沿革圖405)≪成宗實錄≫권 128, 성종 12년 4월 계해.를 그렸으며, 성종 15년에 李封이 我國輿地圖를 진상하였고406)≪成宗實錄≫권 164, 성종 15년 3월 계묘. 성종 19년 3월에는 成俊이 永安道沿邊圖를 제작하였다.407)≪成宗實錄≫권 214, 성종 19년 3월 신묘. 같은 해 9월에는 柳子光이 義州와 東八站, 遼東·光寧 등의 산천·도로 등을 자세히 조사한 형세도를 바쳐 이 지역에 대한 지리적 관심을 증대시켰다.408)≪成宗實錄≫권 217, 성종 19년 6월 계묘. 성종 22년에는 허종이 西北面沿邊圖를 진상했으며,409)≪成宗實錄≫권 258, 성종 22년 10월 정사. 성종 24년에는 平安道體察使 韓致亨이 義州地圖를 그려 바쳤다.410)≪成宗實錄≫권 281, 성종 24년 8월 경신. 연산군 3년(1497)에는 판중추부사 李克均이 慶尙右道圖를 그렸다.411)≪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1월 임자. 세조 원년에 황수신이 제작한 경상좌도 지도는 崇文殿 화재 때 소실되었으므로 이번에 경상우도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이극균은 연산군 7년에도 西北地圖를 만들었다.412)≪燕山君日記≫권 40, 연산군 7년 7월 갑신. 중종 8년(1513)에는 순변사였던 黃衡이 함경도지도를 조정에 바쳤고,413)≪中宗實錄≫권 17, 중종 8년 2월 계미. 중종 18년에는 편안절도사 李之芳이 여연과 무창 형세도를 그렸다.414)≪中宗實錄≫권 48, 중종 18년 5월 계미. 이 지도는 의정부에 비치하고 변방의 일을 의논할 때 참고하도록 하였다. 그 후 명종 17년(1562)에는 金澍·朴忠元 등이 成川·安邊·義州圖를 제작하였다.415)≪明宗實錄≫권 28, 명종 17년 11월 경인. 이와 같이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은 고려시대의 5도 양계도에서 빠진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4군과 6진을 새로이 개척하였으며 또 국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세종대에 만들어진 정척의 양계도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변방지도가 만들어졌다.

 한편 외국지도는 역대제왕혼일강리도를 비롯하여 일본승 道安이 가져온 日本琉球國圖·大明天下圖 등이 있었고, 이외에도 遼東圖·日本大明圖 등이 있었다.416)≪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예종 원년(1469)에는 우리 나라에서 天下圖를 완성하였다.417)≪睿宗實錄≫권 6, 예종 원년 6월 계유. 이 천하도는 역대제왕혼일강리도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현존하는 혼일강리도는 이때에 만들어진 사본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혼일강리도의 조선도 부분을 검토하면 4군이 폐지되어 폐4군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권근의 발문과 상치되는데 앞으로의 연구과제이다.

 국내지도가 거의 완성된 중종 때에는 천하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중종 6년(1511)에 홍문관에서 天下輿地圖를 왕에게 진상하였다.418)≪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8월 기축. 이 천하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중종은 의정부에 명하기를, 전에 홍문관에서 바친 천하도는 중국에서 가져왔을 터인데 그 동안 그 곳의 지리적 사정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므로, 聖節使로 하여금 새로운 천하도를 구해 오라고 하였다.419)≪中宗實錄≫권 81, 중종 31년 5월 갑자. 의정부는 천하도에 대한 사항을 조사 보고하였는데, 전자의 천하도는 중국의 여염집에서 구해 왔기 때문에 그 제작연대나 출처를 알 수 없었지만, 題督主事 張鰲가 輿地圖에 관심이 많아 조선의 도로 원근까지 파악하여 제작한 천하도가 있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파견하여 모사하면 하루 이틀 정도면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 중국 조정에서 제작한 천하도가 있는데 이는 금물이기 때문에 구하기가 어렵겠지만, 혹시 여염집에서 이것과 같은 천하도를 수유하고 있으면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 오도록 하고, 이번 기회에 구해 올 수 없으면 다음 사행들이 구해 오도록 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런 보고를 받은 중종은 적극 노력해서 구해 오도록 하였다. 그 다음해인 중종 32년에 중국 사신이 입국하자 왕은 이들에게 천하도를 구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 천하도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다음 사행 때 꼭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420)≪中宗實錄≫권 84, 중종 32년 3월 계사. 그들은 본국에 돌아간 후 성절사인 許實을 통해 천하도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 때에 중국에서 들여왔던 천하도가 어떤 형태의 천하도였는지 지금은 현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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