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3) 문묘

3) 문묘

 文廟는 孔子 즉 文宣王을 향사하는 사당을 가리킨다. 국가제사의 하나로서 문묘의 위상과 그 제례의 변천과정은 유학에 대한 국가의 존숭 여부와 밀접히 관련된다. 특히 성리학이 배타적 국가교학으로 정립되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하에서 이루어졌다. 또 문묘에는 공자 외에도 이른바 10哲·72賢 등 공자의 여러 제자들 및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 유현들을 배향하였던 바, 그 의례의 내용과 성격은 당대에 있어서의 이른바 유학의 학통 정립 문제와 밀접한 관련 속에 운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의 개창과 함께 문묘는 이제 사류정권의 성리학적 이념을 수렴하고 이를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정신적 본산으로 정립되어 갔다.527) 池斗煥, 앞의 글. 성리학은 인간이 본래 지닌 理의 능력을 긍정하며, 국가의 통치형태로서도 맹목적 지배가 아닌 교화에 의한 정치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중앙의 성균관을「道善之地」라 하여 온갖 교화의 원천인 곳으로 중요시할 뿐 아니라, 지방 각 군현마다 반드시 향교를 설립하고 이른바「守令七事」가운데에도 학교의 교육을 부과하여 교화에 의한 치민을 강조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균관과 향교에는 반드시 문묘를 두어 공자 이하 선현들을 향사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조선왕조의 문묘 의례는 무엇보다도 성리학의 명분론적·전통론적 가치관에 따라 이른바 道統 중심으로 정비되어 갔다는 데 특색이 있다.528) 池斗煥, 위의 글은 3개 節의 제목이 ‘도통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하 문묘의례의 정비과정은 이 논문을 많이 참고하였다. 우선 태종대에는 曾子와 子思를 顔子·孟子와 같이 공자의 配享位로 올려 이른바 4聖의 도통을 확립하였으며,529)≪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2월 정축.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문묘의 釋奠禮와 朔望祭에 국왕이 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것으로 인식되어갔다.530) 그러한 사실은 明의 사신 일행이 문묘에 배알하고 釋奠과 朔望祭를 누가 주재하느냐고 묻자, 국왕이 주재한다고 館伴이 대답하고 있는 기사로 미루어 알 수 있다(≪太宗實錄≫권 2, 태종 2년 10월 을축 참조).

 한편 세종 14년(1432)에는 국왕이 성균관에서 거행하는 養老宴儀를 제정하고, 이에 준해서 지방 군현에서도 거행하도록 하는 養老宴儀式을 제정하였다.531)≪太宗實錄≫권 55, 태종 14년 정월 정묘·병자. 비록 국왕의 양로연은 그 후 성균관 대신 궁중에서 거행되었지만, 그같은 양로연의례는 모든 교화의 근원이 학교교육에서 비롯된다는 교화중심의 정치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그것을 국왕이 솔선해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일이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세종대에는, 이전까지 유사로 하여금 설행케 하던 석전례 중심의 문묘의례를 이제 국왕이 친행하여 諸生의 講學을 살피는 視學儀를 중시하는 내용으로 강화하면서 도통중심의 문묘의례를 정비해 갔다.

 문묘의 제례에 양료례·시학의 등의 의례를 결부시킴으로써 그 자체를 하나의 성대한 유교적 행사로 발전시키고자 한 세종대의 노력은, 성종대에 이르러 거기에 大射禮·臨雍拜老 등의 행사를 도입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사례는 국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묘에서 활쏘기를 행하는 의례이다. 이것은 당시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운용되고 있던 鄕射禮와 대응하면서 성리학적 예교질서를 중외에 정착시키고자 하는 운동의 하나였다.

 임옹배로는 주나라 때 임금이 태학에 나아가 大儒인 三老五更에게 배례한다는 옛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대의 양로례가 長幼의 도를 구현하는 것이었다면, 임옹배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른바 3로5경으로 칭송되는 대유에게 국왕이 직접 배례함으로써 군신관계를 넘어서 사제관계로서 존숭한다는 것을 뜻하는 일이다. 이는 공자만이 만왕의 스승으로 존숭되던 지금까지의 관행에서 더 나아가 공자의 학통을 잇고 이를 발전시켜 온 대유에게까지 그 존숭의 예를 확대한다는 것으로, 3강을 기본으로 하여 운용하던 수직적 군신관계의 덕목으로부터 양로례·임옹배로례가 행하여짐으로써 5륜의 수평적 長幼師弟 관계의 덕목에까지 도덕적 바탕이 확대되는 변화를 뜻하는 일이다.532) 金勳埴,<16세기≪二倫行實圖≫보급의 사회사적 고찰>(≪歷史學報≫107, 1985), 107쪽. 그것은 또한 사림층의 성장에 따라 성리학이 조선 전기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더욱 심화되고, 조선사회 나름으로 그 도덕이 재해석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종대에는 성리학적 節義論에 입각하여 사육신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됨과 동시에「東方 理學의 祖」로 칭송되던 鄭夢周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과 사림세력의 대표격으로 주목되고 있던 金宏弼을 정몽주와 아울러 종사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논의 끝에 드디어 정몽주의 종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결정되지만,533)≪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9월 경신. 김굉필은 鄭汝昌과 더불어 문묘에 종사하는 대신 별도로 祀宇를 건립하여 관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는 것으로 일단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중종대에 전개된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사림세력은 金宗直·김굉필·정여창·趙光祖·李彦迪으로 이어지는 자파의 학문계통을 올바른 도통으로 확립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이들이 문묘에 정식으로 종사534) 광해군 2년(1610) 성균관 유생 등의 啓請으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士林五賢이 문묘에 종사되었다.하게 되는 현실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535) 조선 후기 정조대에 확정된 규정에 의하면, 문묘에 配享·從享한 이로는 동·서를 합해 공자의 72제자 등 漢·唐·宋·元대의 儒賢이 94位요, 신라 이래의 우리 나라의 유현이 18位이다(≪太學志≫).

 일반적으로 고려시대까지의 문묘 제례는 공자라는 한 사람의 성현에 대한 존숭의례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왕조에 이르러 그것은 공자를 만왕의 왕으로, 堯·舜보다 훌륭한 성인으로 대우하는 의례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학자를 존숭하며 도통을 중시하는 의례를 양로연·대사례·임옹배로·문묘종사 등의 여러 형태로 구현함으로써, 성리학을 유일의 교학으로 운용하던 조선사회 나름대로의 도덕적 가치질서를 정립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의 수직적 정치 지배권력만이 중심되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라든가 명분·절의와 같은 성리학적 덕목을 상대적으로 좀더 사회 저변으로까지 확산시킴으로써 수평적 사회관계와 그 가치관의 성장에 크게 기능하였으리라고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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