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에서 전대 왕조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보편화하는 단계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전대 왕조도 자기 왕조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이루어가는 하나의 주체였다는 인식은, 먼저 자신이 역사를 이룩해 나가는 주체라고 하는 인식이 성립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접 조상이 아닌 보편적인 역대 왕조의 시조들을 역사의 한 시대를 주도했던 주체로 인식하고 그에 대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제례를 베푸는 일은 훨씬 후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기록상으로는 고구려가 箕子神에게 제사하였다는536)≪舊唐書≫권 199, 列傳 上, 東夷 高麗. 것이 우리 나라 역사에서 전대 왕조의 시조에 대한 제례의 시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국가적으로 불교를 크게 숭상하고 있던 고려왕조에서도 한편으로 그 정치체제에서는 유교이념을 수용하고 있었으므로, 그같은 유교적 교화의 근원을 기자에서 찾아 일찍부터 기자를 숭앙하기 시작하였다.
(숙종 7년) 10월 임자 초하루에 예부에서 아뢰어 청하기를 ‘우리 나라 禮義의 교화가 箕子로부터 비롯하였는데도 祀典에는 실려있지 않습니다. 그 墳塋을 구하여 祀宇를 세우고 致祭하소서’라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즉 예의의 교화가 역사적으로 箕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에서 숙종 7년(1102)에는 그 사우를 세우고 제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의란 곧 유교적인 도덕규범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실제 교화가 기자에게서 비롯하였다는 사실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교적 교화 즉 문명과 문화의 역사가 기자로부터 비롯하였다고 인식하는 고려 귀족정권의 가치지향을 반영하는 처사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것은 고려 후기 충숙왕대에 국가사전의 정비를 말하면서, “기자는 비로소 本國을 受封하였고, 예악의 교화가 이로부터 행하여졌으니, 마땅히 平壤府로 하여금 사우를 세워 치제토록 한다”537)≪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2년 10월 을미.고 한 조처에서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기자의 분봉에서 비롯된 유교적 예의의 교화야말로 우리 나라 문명사의 시작을 이루는 획기적 사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왕조에서는 기자에 대한 제사를 제도적으로 계속하였다. 기자의 사우가 있는 西京에 先聖 즉 기자의 油香田으로 公廨田 50결을 절급했다는 사실53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公廨田.이 곧 그것을 말한다.
한편 고려왕조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에 대해서도 국가적으로 치제하였다. 동명왕에 대한 제례를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이미 현종 2년(1011)에 平壤木覓神 등과 함께 동명왕신에 대해서도 勳號를 더하였다는 기록539)≪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5월 을해.이 보인다. 고려는 일찍부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자처하였거니와, 따라서 동명왕에 대한 제사도 일찍 제도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西京의 仁里坊에는 동명왕의 사우가 있는데 고려에서 때맞추어 御押을 내려보내어 제사를 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또 그 고을에서 제사를 행하였으며,540)≪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西京 東明王廟. 때로는 사신을 보내어 東明聖帝祠에 衣幣를 바치는 일도 있었다.541)≪高麗史≫권 63, 志 17, 禮 5, 雜祀.
물론 고려도 그 이전의 신라나 백제의 역사를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다. 현종대에 고구려·신라·백제의 왕릉과 묘에 대하여 그 소재지 주현으로 하여금 修治하도록 하고 樵採를 금하며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리도록 조처한 일도 있었다.542)≪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8년 12월. 그러나 신라와 백제의 왕릉·묘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더 이상의 보편적·제도적 조처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계기에서 촉발된 일시적 예우에 불과한 일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왕조 전시기를 통하여 역대 시조로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오직 기자와 동명왕뿐이었다. 이른바 三韓을 통합한 고려왕조가 전대 왕국의 시조로서 기자와 동명왕만을 사전에 올려 받들었다는 것은 그 지배층이 자국 역사의 궁극적 근원이라든가 구체적 전개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극히 관념적인 차원의 이해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터이라고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와 동명왕이 비록 제도적으로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사전에서 소사로, 그 중에서도 잡사로 일괄 취급되고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고려 지배층의 전대 왕조의 시조에 대한 관심의 비중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先農·先蠶 따위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제사는 중사로 예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대 왕조의 역사시조를 잡사로 취급하였다는 사실은 고려 지배층의 역사의식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고려 지배층의 몰각 여하에 관계없이 기자 이전의 역사시조로서의 단군에 관한 인식은 혹은 역사기록으로 혹은 민간신앙의 형태로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몽고의 침략이라는 전에 없던 큰 시련을 겪으면서 드디어≪三國遺事≫·≪帝王韻紀≫등에서 敍事化하기에 이르렀다.543) 그 중 특히≪帝王韻紀≫의 단군에 대한 인식의 進境은 대단하여, 우리 나라 역사의 廣範性·悠遠性·多樣性의 모든 출발을 민족 시조인 단군에게로 귀일시키게 되었다고 한다(李佑成,<高麗 中期의 民族敍事詩>(≪成均館大 論文集≫7, 1962;≪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그리고 그 새로운 인식은 고려 후기에 계기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신진 사류층에 의하여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가령 그 사류 가운데 한 사람인 白文寶는 홍건적이 휩쓸고 지나간 난세의 수습을 공민왕에게 진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天數는 순환하여 다시 시작하는데 700년이 하나의 小元이고 쌓여서 3,600년이 하나의 大周元이 됩니다. 이것이 황제와 王者·覇者의 理亂과 興衰의 주기입니다. 우리 동방은 檀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3,600년이니, 곧 周元의 會運을 맞았습니다(≪高麗史≫권 112, 列傳 25, 白文寶).
즉 백문보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역사는 분명히 단군으로부터 起算한다는 檀君紀元의 역사의식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신진 사류세력이 성장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되자, 그들은 지금까지 사적으로 전승해오던 국조에 숭앙관념의 현실화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개국한 바로 다음달에 국가사전의 정비를 처음으로 발의하면서 단군에 대한 국가제사를 요청하였다.
예조전서 趙璞 등이 상서하여 ‘…조선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입니다.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맞추어 제사 드리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즉 기자에 이르러 비로소 교화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보다 앞서 단군은 천명을 받아 동방의 역사를 창시한 역사의 시조이니, 이에 마땅히 국가에서 공적으로 제사하는 의례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앞서 살펴 본 ‘天子祭天之禮’라는 圓丘의 혁파 주장과 같은 대목에서 일괄하여 제기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한편으로는 제후국의 명분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성리학적 이념의 강조와 또 한편으로는 자국의 역사에 관한 독자적인 천명의식의 강조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조선 초기 지배층의 명분관념과 자기 역사의 독자적 실재에 대한 긍정의 관념이라고 하는 二元的 지향을 나타내 보이는 처사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명분을 지키는 것은 사류정권이 자기 존립을 위한 외적인 보장과 내적인 일원화를 도모하려는 성향이 나타난 것이고, 자국의 역사 시조로서의 단군의 受命을 강조한 것은 새로운 천명을 받아 새 왕조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류정권 자신의 국가의식의 투영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군에 대한 숭앙의 의례가 실현되는 데에는 아직도 좀 더 논의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우선 개국 초기에는 유교적 문화질서에 대한 지향이 더욱 컸던 것 같으며, 태종 11년(1411) 5월에는 기자에 대한 치제만이 먼저 결의되었다.544) 조선 초기 기자에 대한 치제를 최초로 결정한 것은 태종대였다. 즉 예조참의 許椆가 기자에게 제사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기자만 못한 자에게도 오히려 모두 치제하는데 유독 기자같은 성인에게 제사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금부터는 마땅히 제사를 지낼 것이다”라고 하였다(≪太宗實錄≫권 21, 태종 11년 5월 정사). 그리고 뒤이어 다음해에 단군에 대한 치제도 제도화되었지만, 여기에는 아직도 기자 우위의 관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예조참의 許椆가 상서하여 ‘신이 생각하건대 본국에 기자가 있음은 중국에 堯임금이 있는 것과 같으니, (중국) 조정에서 요임금에게 제사하는 예에 의거하여 기자의 廟에 제사지내소서’하니, 임금이 이를 예조에 하명하였다. 河崙이 또한 일찍이 ‘청컨대 조선 단군에게 제사지내소서’라고 건의하였다. 예조에서 (두 가지를) 참작하여 아뢰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에 올려 봄·가을로 치제하여 숭덕의 뜻을 밝힐 일이요, 또한 단군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같은 묘에서 아울러 제사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6월 기미).
즉 우리 나라에서 기자는 중국의 요임금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문화의 元祖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 파악되고 있으며, 단군은 다만 우리 동방의 시조라는 막연한 지위를 가진 자로 인식되었다. 이에 기자를 主享으로 하고 단군은 거기에 배향하는 형식의 祭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단군에 대한 치제가 제도화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 시조에 대한 숭앙이 유교적인 교화시조로서의 기자의 우위성을 전제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실현에 급급하고 있던 의식의 소치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질서의 한 핵심을 이루는 명분의 관념에 비추어 보더라도 立國世系의 선후관계는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물며 우리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국가시조로서의 단군은 중국에서 역사의 원조로 숭앙하는 요임금과 동시대의 대등한 천명을 받은 군주라는 인식이야말로 고려 후기이래 사류층 자신이 체득하고 또한 전승해 온 역사의식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敬承府 小尹 卞季良이 상서하여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입니다. (단군은) 하늘로부터 내려왔지 천자가 분봉하지는 않았습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은 요임금의 무진년이니 지금까지 삼천여 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6월 신유).
즉 단군은 天과 직결되어 요와 같은 시대에 독립 대등한 동방의 역사를 개창한 시조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단군이 중국 천자의 분봉을 받은 군주가 아닐뿐더러 그 자신 또한 天으로부터 내려온 天帝의 아들이었다는 인식이 강조되고 있는 듯하여 흥미롭다.
태종 12년(1412) 6월에 단군과 기자의 제향을 제도화한 후, 그 다음에 11월에는 다시 예조의 건의로 사전의 몇 가지 조항이 정리되었는데, 여기에 단군에 대한 예우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一. 삼가 당의 禮樂志를 살펴보니 옛 제왕들은 모두 中祀에 배열하였고, 國朝에서도 先農·先蠶·文宣王을 中祀에 배열하였으니, 단군·기자·전조의 태조도 중사에 승격함이 마땅합니다.
一. 종묘의 奉祀는 5室에 그치는데, 전조의 임금들은 그 봉사하는 것이 8위에 이르니 예에 합당하지 않는 듯합니다. 태조 이하 7위 가운데 현종은 遼賊을 이겨내어 民害를 제거하였고, 공민왕은 명을 섬겨 민생을 편안히 하여 동방에 공이 있으니, 의리상 둘 다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나머지 5위는 혁거하도록 하소서.
一. 삼가 校書館 祝板式을 보니 단군과 기자에 대해서는 국왕이라 칭하고 전조의 태조에 대해서는 조선국왕이라고 칭하는데, 이치에 맞지 않은 듯합니다. 단군과 기자에 대해서도 조선국왕이라 칭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이에 따랐다(≪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1월 경진).
우선 전통적으로 중사의 제례로 우대해 온 선농·선잠 및 공자와 마찬가지로 이제 단군·기자·고려 태조를 중사로 승격시켜 제향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자연신이나 교화신 못지 않게 국가와 정치에 비중을 두는 역사의식의 반영이었다. 그리고「제후5묘」의 성리학적 명분에 맞는 제의를 따르기로 하면서도 고려 태조와 함께 특히 거란을 격퇴한 현종과 또 처음으로 반원친명의 정책을 내세운 공민왕을 봉사하자는 제안은 조선 초기 사류정권의 보다 실제적인 역사의식의 반영이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제사드릴 때의 祝文式에서 단군·기자 앞에는 ‘국왕’, 고려 태조 앞에는 ‘조선국왕’이라고 다르게 써 오던 국왕의 호칭을 이제 다 같이 ‘조선국왕’으로 통칭하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비록 지금까지 숭앙은 해왔으나 좀 막연한 왕조의 시조로 생각해 온 단군·기자를 이제 고려 태조에 대비되는 확실한 왕조의 시조로 그 객관적 실재를 확인하고 그 역사성을 공인한다는 의식의 반영이었다. 그러한 의식의 출현은 바로 자국 역사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구체적으로 진척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 사류정권에서 살펴볼 수 있는 보다 역사위주·국가위주의 역사의식의 발전은 이에 필연적으로 단군에 대한 인식의 발전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기자에 못지 않게 단군의 역사적 실재에 관한 인식의 비중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정운영상의 제도 일반을 종합적으로 검토·정리한 세종대에 이르러, 기자의 主祀에 단군을 배향시켜 온 종래의 관행을 고쳐서, 단군을 正坐 南向의 독립 주사로 모시기에 이르렀다.
(儀禮詳定別監을 맡고 있는) 司醞主簿 鄭陟이 상서하기를 ‘…단군은 요임금과 더불어 竝立하여 조선이라고 自號한 자이며, 기자는 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해진 자입니다. 제왕의 歷年의 수로 볼 때 요임금으로부터 무왕에 이르기까지는 무릇 천이백 삼십여 년이 됩니다. 그런즉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앉히고 단군을 동쪽에 배향하는 것은 실로 立國 傳世의 선후와 어긋나는 일입니다. …또 듣건대 기자는 祭田이 있는데 단군은 없는 까닭에 기자는 초하루·보름 때마다 奠禮를 드리지만 단군은 다만 봄·가을에만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지금 이미 단군을 기자에 배향하여 두 신위가 한 당에 앉아 있는데, 홀로 (단군은) 초하루·보름에 전례가 없으니, 역시 미안한 듯 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워서 그 신위를 남향하게 하고 봉사한다면 대개 예의에 맞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예조에 하명하여 상서한 대로 시행케 하였다(≪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9월 신유).
즉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를 개창했다고 하는 요임금으로부터 1,230여 년 후에, 그것도 무왕의 명에 의하여 분봉을 받은 기자에 비하여, 그 요와 같은 시대에 나란히 자주의 역사를 개창하여 스스로 조선의 시조로 군림한 단군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긍정의식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곧 자국역사의 유원성과 독자성에 대한 긍지이며, 그 모든 것이 현존할 수 있는 계기를 이룬 역사시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긍정의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조선왕조라는 새로운 역사의 개창과 수성을 자임하고 있던 사류정권 자신의 긍정적인 역사의식의 투영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세종 7년(1425)부터는 기자묘에 단군을 배향시켜 오던 관행을 고쳐 그 故地인 평양에 단군묘와 기자묘를 별도로 건립하여 국가사전에 따른 제사를 받들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세종 12년에는 各道 山川壇廟 巡審別監의 조사보고를 받아 예조가 다시 건의한 대로 단군의 신위는 ‘朝鮮檀君’으로, 기자의 신위는 ‘後朝鮮始祖箕子’로 각각 고쳐쓰도록 정리하였다.545) 이전까지는 ‘朝鮮侯檀君之位’ 및 ‘朝鮮侯箕子之位’라고 동일하게 ‘조선후’로 칭해오던 것을 이 때 와서 고쳐 썼다는 것이다(≪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계유). 그 뒤 세종 19년 다시 전국의 壇廟 및 神牌制度를 詳定하면서 각기 ‘朝鮮檀君’ 및 ‘朝鮮始祖箕子’로 개칭하게 되었는데(≪世宗實錄≫권 76, 세종 19년 3월 계묘), 칭호로써만 말하자면 단군에 대한 역사시조로서의 인식은 아직도 좀 막연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뒤 세조대에 가서 다시 ‘朝鮮始祖檀君之位’, ‘後朝鮮始祖箕子之位’로 각각 고쳐 쓰게 되었다(≪世祖實錄≫권 4, 세조 2년 7월 무진).
한편 자국의 역사시조로서 단군에 대한 사전이 정비되어 가는 것과 더불어 삼국의 시조와 고려 시조에 대한 제례도 마련되어 갔다. 먼저 새로이 왕권을 장악한 조선 태조는 그 즉위 다음달에 前朝의 태조를 麻田郡으로 이안하여 때맞추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546)≪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정사. 비록 새로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아직 고려의 수도였던 開京에서 고려 태조 이하 역대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그대로 두고 편안히 지내기는 거북하였을 터이므로, 고려 태조의 신주를 가까운 마전으로 옮겨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민심의 수습을 위해, 고려 성종은 중화를 경모하여 문물을 일으켰으며, 문종은 昇平의 치세를 이룩하여 민생을 편하게 하였고, 공민왕은 홍건적을 섬멸하여 삼한을 부흥하고 明을 잘 섬겼다는 이유로 각기 마전의 태조묘에 附祭하도록 조처하였다.547)≪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신유. 문물의 흥기, 민생의 안정, 그리고 외적의 토벌 등은 곧 새 왕조의 통치공약으로 거론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이 때의「태조묘」라는 것은 기실 사당의 형태를 갖춘 것이라기 보다는 임시 가설된 것에 불과하였고 보인다. 실제로는 태조 6년(1397)에 가서야 京畿右道 都觀察使로 하여금 麻田縣 부근의 인부를 동원하여 전조의 태조묘를 영건하도록 하였다.548)≪太祖實錄≫권 12, 태조 6년 11월 갑진. 이어서 정종은 즉위 직후 마전현에 廟宇를 세워서 전조의 태조 및 혜종·성종·현종·문종·충렬왕·공민왕 등 7王을 제사하도록 하니, 모두 다 공덕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549)≪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4월 정묘. 그리고 태종대는 전조의 태조릉에 3호, 나머지 7왕의 능에 각기 2호씩의 수호인을 두어 每戶에 토지 1결씩을 지급하였다.550)≪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4월 갑인.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교적 예제에 따라 국가사전을 정비해 가고 있던 조선 초기 사류정권으로서는 이른바「제후5묘」의 원칙과 어긋나는 제례를 운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새 왕조 개창 초기에 아마도 민심 수습책으로 이른바 공덕이 있는 전왕조의 왕들을 태조 이하 8위나 치제하도록 하였지만, 그것은 주로 새로 등극한 국왕의 뜻이었을 뿐이었고, 신료인 사류는 그같은 濫祀를 일찍부터 반대하는 편이었다.551) 태종 13년에도 예조의 진언으로 그같은 결정이 내려진 바 있었음은 이미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1월 경진). 또 예조는 고려 태조 이하 현종·공민왕의 3위만 제사하자고 주장한데 반하여, 태종은 태조 이하 8왕이 모두 백성에게 공덕이 있다고 하면서 그대로 다 제사하도록 지시한 사실도 참조된다(≪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갑인). 그러므로 세종 7년(1425)에는 드디어 議政府·六曹·春秋館의 의논에 따라 전조의 태조·현종·문종·원종만을 사전에 남겨 그대로 치제하고 나머지는 혁파하도록 하였다.552)≪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9월 계축.
한편 삼국 시조의 치제에 관한 논의는 민심의 향배가 크게 주목되는 바로 전 왕조인 고려의 경우보다도 훨씬 늦게, 국정운영의 문물법제를 정비해 가고있던 세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앞서 살핀 바 세종 7년 9월 단군을 기자와는 별도의 독립 주사로 치제한다는 결정이 있은 뒤 곧 이어 삼국 시조에 대한 국가제사가 논의되었다.
임금이 일찍이 예조에 명하여 삼국의 시조묘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判書 申商이 아뢰기를 ‘주나라 말기에 7국이 爭雄하여 일정한 統紀가 없었는데, 우리 동방도 통합되기 전에는 곧 7국의 때와 유사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그렇지 않다. 옛날을 상고해보면 우리 동방은 삼국 시조 이전에는 12韓이니 9한이니 하여 강역이 분분하였다. 그러므로 삼국 시조가 (강역을) 자못 합쳐낸 공로는 진실로 적지 않다. 마땅히 義祠를 세워 그 공로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世宗實錄≫권 34, 세종 8년 11월 갑오).
즉 삼국의 시조는 오랫동안 통합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분열해 있던 잡다한 부족제 사회들을 일정한 규모로 통합하여 국가형태를 갖추어 냄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따라서 당연히 국가사전에 올려 숭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국왕인 세종 자신의 국가관을 피력한 듯하여 자못 흥미롭다. 그리고 세종은 다시 예조에 傳旨하여 단군·기자의 묘제를 다시 의논하도록 하고, 신라·백제·고구려 시조의 입묘 치제에 관한 일도 모두 옛 제도를 참고하여 詳定해 보고하도록 하였다.553)≪世宗實錄≫권 37, 세종 9년 8월 병자. 아마도 역대 시조 전체의 묘제를 다시 검토하여 옛 제도를 근거로 하여 확고한 사전을 정비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세종 11년(1429)에는 삼국의 시조 가운데 백제 시조묘가 먼저 稷山縣에 세워지자 箕子殿의 예에 따라 그 고을의 노비 각 2인을 정하여 이를 지키도록 하는 조처를 내렸다.554)≪世宗實錄≫권 44, 세종 11년 5월 임자. 또 같은 해에 삼국 시조의 廟宇가 모두 다 건립되자 곧 이를 사전에 등재하고 치제하는 조처를 취하였다.555)≪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7월 무신. 그리고 세종 13년에는 호조의 계청에 따라 충청도의 백제 시조, 경상도의 신라 시조 그리고 평안도의 고구려 시조에 대한 祭田을 각기 2결씩 절급하기에 이르렀다.556)≪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정월 을해. 고구려 시조묘는 평양의 단군묘와 함께, 백제 시조묘는 익산(나중에는 남한산성)에, 신라 시조묘는 경주에 각각 세웠다(李肯翊,≪燃黎室記述 別集≫권 4, 祀典典故 諸祀). 결국 삼국의 시조묘에 대한 제사도 다른 역대 시조묘와 마찬가지로 봄·가을의 중월에 향사하도록 제도화하였다.557)≪經國大典≫권 3, 禮典 祭禮.
단군·기자와 함께 고려 태조 등 역대 시조의 제사가 중사로 승격된 것은 태종 13년(1413)의 일이었는데, 이제 삼국의 시조에 대해서도 동일한 예우를 갖추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단군 이하 역대 시조 전체의 사전을 구비하면서, 조선왕조는 중사에 올라 있는 여타의 자연신보다 이들 歷史神에 대한 예우를 한층 더 넉넉히 갖추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호조에서 ‘사전에 실려있는 각 도의 산천·성황아의 神祠位田으로서 중사는 2결, 소사는 1결 50부씩을 절급하기로 하되, 평양에 있는 단군·기자의 중사위전은 각각 3결을 절급하고, 마전현에 있는 고려 시조 이하 4위의 위전도 역시 삼국 시조의 예에 의거하여 1위마다 3결씩을 절급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軍資田으로 귀속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임금이) 이에 따랐다(≪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3월 경오).
즉 단군·기자·삼국의 시조, 그리고 고려 시조 이하 4위의 역사신에 대해서는 다같이 3결씩의 祭位田을 절급하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는데, 그것은 국가사전에 동일한 등급으로 올라 있는 산천·성황 등 여타 자연신의 중사위전에 비하여 훨씬 넉넉한 규모로 책정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고려시대의 국가제사제도에 비하여 커다란 차이를 보인 것으로 판명된다. 고려시대에는 역대의 시조 가운데 기자와 동명성왕만이 소사로, 그것도 잡사로 설정되어 있었음은 앞서 살펴본 그대로다. 이제 조선왕조에서는 기자 이전의 단군으로부터 고구려·백제·신라의 시조는 물론 고려 태조 이하 소위「공덕」이 있는 4왕에 이르기까지, 즉 우리 나라 역사상 국가를 개창한 역대 시조 전체와 또한 전대 왕조의 치적이 큰 국왕들에 대해서까지도 다른 자연신보다 훨씬 넉넉한 예우를 갖추어 국가사전에 정식으로 모셔 정기적으로 치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국 역사의 상한이 그만큼 구원한다는 것과 공간적으로도 광범하다는 사실을 다 포괄하는 인식의 확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연보다 인위가 주도한다고 생각하여 인간의 역사를 더 중시하게 된 세계관의 진전으로 인하여 성취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고려 귀족지배층의 경우보다 조선왕조 지배층의 자국의 역사와 동족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가 역사적으로 한걸음 진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해석된다.
<金泰永>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