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2) 도첩제와 부역승
  • (1) 도첩제의 강화와 폐지

가. 태조 이후의 도첩 강화

 조선왕조가 시작되는 태조 원년부터 개국공신이기도 한 조신들은 승려의 출가와 그에 따른 도첩 발급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이 무렵에 都評議使 裵克廉·趙浚 등은 22조의 上言을 올렸는데 제18조에서 양반의 자제 중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五升布 100필, 서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을 소재지의 官司에 바쳐야만 도첩을 발급하여 출가를 허가하고,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다.597)≪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임인. 이 건의는 태조의 승인으로 곧 시행되었는데 그 액수(度牒錢)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문제가 적지 않았다.

 조정에서 도첩제를 엄하게 하여 출가를 억제하려고 한 데에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고려왕조에 승려가 너무 많아 국정이나 사회기풍을 문란시키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수를 대폭 줄여서 질적인 향상을 꾀한다는 표면상의 구실을 들 수가 있다. 둘째는 당시 승려들은 병역이 면제되고 조세와 노동력 징발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승려가 되는 것을 억제하여 국가의 군사력과 생산력의 감손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도첩제를 강화하여 전대로부터의 僧弊를 방지하고 국가의 경제와 병력면에 이익을 가져오면서 한편으로는 승려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 부담이 너무 커서 합법적으로 도첩전을 바치고 승려가 되는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그러한 절차를 밟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승려가 되는 소위 無度牒僧의 수가 많아졌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그 제도는 유명무실하였다.

 억불책을 감행한 태종은 그 문제를 그냥 두지 않았다. 태종 16년(1416) 8월 예조에 명하여 도첩 발급에 관한 문제를 재정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예조에서는 그 해 7월 이후에 승려가 되려는 자는 태조 원년에 정한 도첩제에 의해 양반은 布 100필, 서민은 150필, 천민은 200필의 丁錢을 바쳐야 도첩을 발급하되, 7월 이전에 출가한 각 종파의 大選(僧科 合格者) 외의 승려는 다음해 3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종전 도첩의 유무를 막론하고 정전 없이도 도첩을 발급해 주게 하였다. 4월 초하루 이후에는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소재지의 관청에서 잡아들여 律에 의해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598)≪太宗實錄≫권 32, 태종 16년 8월 신유. 이 때 70세 이상의 승려는 여기에서 제외시켰는데 그들은 이미 노년이므로 도첩제를 적용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도첩이 없는 승려는 행세할 수 없었다. 또 丁布(도첩전)의 부담이 워낙 컸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승려가 될 수 없었다. 이에 결과적으로 출가가 억제되었고 승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세종 6년(1424)에 교단의 규모가 양종 36사로 줄어들면서 전국 승려의 총수는 3,770명으로 제한되었다. 그 뒤 조정에서는 국가 공공의 제반 工役에 승려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대가로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세종은 태조의 願刹인 興天寺의 舍利殿과 鍾樓를 修葺하면서 거기에 동원된 役僧들에게 도첩을 주도록 한 것599)≪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2월 을묘·신사.을 비롯하여, 太平館의 造營600)≪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3월 무진. 등 노역에 동원된 승려들에게도 도첩을 발급해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14년에는 본래 도첩이 없거나 도첩을 위조하여 사용한 자 가운데서 46세 이상은 정전을 징수하여 승려가 되게 하며, 45세 이하는 죄를 다스려서 환속시키고, 위조한 도첩을 바쳐 환속할 것을 자원하는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도록 하였다.601)≪世宗實錄≫권 57, 세종 14년 9월 병진. 이러한 조치들은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으나 5승포 100필(양반출신) 내지는 200필(천민출신)이라는 과중한 정전을 낼 수 없어서 불법으로 승려가 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문종도 재위기간은 비록 2년에 불과하였으나 그 동안에 승려의 도첩문제에 관한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문종은 원년(1451)에 기한을 엄격히 정하여 기한 내에 정전을 납부하면 도첩을 발급해 주고, 그 기한을 넘기거나 스스로 머리를 깎는 자는 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였다.602)≪文宗實錄≫권 7, 문종 원년 4월 계미. 또 그 때 잡아가둔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키도록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정전을 내고 환속을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도첩을 주도록 하였다.603)≪文宗實錄≫권 7, 문종 원년 4월 병술.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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