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그 원년(1392) 11월에 관음굴에서 승려들에게 반식공양을 하였는데, 그 뒤에도 왕은 관음굴에 여러 차례 행차하였으며 또 수륙재 등 불사를 베풀었다.661)≪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월 임진 및 권 9, 태조 5년 2월 정유. 물론 태조는 다른 절이나 道場에도 자주 행차하고 많은 불사법석을 베풀었기 때문에 관음굴의 경우도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볼 수 있겠으나, 사실은 태조 스스로 뿐만 아니라 그 증조부 때부터 독실한 관음신앙과의 인연이 있었다. 태조의 증조부로서 翼祖로 追尊된 李行里가 아들을 얻기 위해 부인과 함께 洛山 관음굴로 가서 기도하자, 꿈에 나타난 한 스님이 “반드시 귀한 자식이 태어날 것이니 이름을 善來라 하라”고 한 말에 따라 아들을 낳고 선래라 이름하였는데, 그가 태조의 조부였다는 것이다.662)≪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8월 경신.
그리고 태조는 일찍이 觀音畵像을 조성하여 불교를 싫어하는 아들 태종에게 준 일이 있었는데, 태종은 그 관음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그 12년에 부왕의 원찰인 개경사에 작은 전당을 세워 모셨다. 또 태종은 慶州 栢栗寺의 旃檀관음상을 개경사에 옮겨 모시게 하였다.663)≪太宗實錄≫권 24, 태종 12년 9월 갑오·10월 경오. 그리고 태종 13년 5월에는 이들을 봉안한 개경사의 관음전에서 법석을 베풀었다.664)≪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5월 정유. 불교를 싫어한다고 하였던665)≪世宗實錄≫권 8, 세종 2년 7월 계미. 태종이 그 부왕으로부터 받은 관음화상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관음전을 세워, 수백년간 신봉 받아온 백률사의 관음상과 함께 봉안하고 법석을 베풀어 개경사를 관음도량화하였던 것이다. 이로 볼 때 태조는 말할 것도 없고 태종까지도 관음신앙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도 그 초년에 모후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개경사의 관음에 기도하고 반승하게 하였으며, 그 아들 세조는 특히 관음보살이 몸을 나툰 상서로운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다. 즉 세조는 8년(1462) 10월에 중궁·세자와 함께 신하들을 거느리고 京畿道 砥平縣 彌智山 上元寺(孝寧大君 補의 願刹)에 행차하였을 때, 그 절 위의 공중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솟아올라 白衣의 관세음보살이 몸을 나투어 찬란한 빛을 비추었으므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멀리에서까지 모두 우러러 보았다는 것이다. 그 때 百官이 경하하였고 왕은 대궐로 돌아와 관음상을 조성하도록 하였고, 이를 봉안할 전당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음의 나툰 모습을 그리도록 분부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쓴≪觀音現相記≫가 지금도 남아 있다.666) 崔 恒,≪觀音現相記≫, 刊記 미상의 별책 간본.
한편 觀音現相事實은≪世祖實錄≫권 29, 세조 8년 11월 을미조에도 있다.
이상의 경우는 모두 국왕과 관련된 사례들이므로 사실 그대로가 민간의 관음신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태조의 증조부와 조부는 분명히 고려의 백성이었으므로, 그들의 신앙은 곧 당시 민간에 행해졌던 관음신앙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또한 국왕과 왕실의 信佛경향은 바로 백성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민간신앙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