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4) 민간의 불교신앙
  • (2) 미타신앙

(2) 미타신앙

 阿彌陀佛은 뜻으로 옮겨서 無量壽如來라고도 한다. 彌陀라 약칭되는 이 如來(佛)는 10劫 이전에 성불하여 현재 이 세계에서 10만억 국토를 지난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극락세계(安樂·安養國)의 主佛이다. 이 미타불의 이름을 지극히 稱念하면, 현재 세상에서도 편안하고 죽은 뒤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극락은 죽음·아픔·괴로움·슬픔·가난·굶주림이 없는 절대 안락만이 있는 淨土이므로, 그곳에 태어나기를 회원하는 신앙을 정토신앙이라 하며 아미타불을 칭념하기 때문에 미타신앙이라고도 한다.

 이 신앙은 죽은 뒤의 정토왕생을 주로 기원하고 있기 때문인지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불교행사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국왕과 왕비의 사후에 절에서 7재를 베푸는 등 불교의식으로 명복을 비는 행사가 없지는 않으나, 정토신앙이 표면으로 드러난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祈福攘災的인 고려의 신앙풍습을 그대로 답습한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현실의 불행과 빈곤을 벗어나 내세에는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자 하는 정토신앙을 큰 희망으로 의지하였다. 그래서 민간에는 미타염불의 정토신앙이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 왔으므로, 조선 초기에도 여전히 서민계층에 퍼져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미타신앙을 이해할 만한 직접적인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조선왕조실록≫에 두 건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세종 5년(1423)에 충주에 사는 船軍 李龍의 妖言이 보고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즉 이룡은 항상 미타불을 칭념하였는데 하루는 陰城 땅의 迦葉寺 골에 이르러 큰 소리로 염불을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으므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자세히 들어보니 작은 목소리로, “너는 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와 같이 염불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공중을 쳐다보니 노랗고 희고 검은 세 빛깔의 구름 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에 세 부처가 함께 앉았는데 모두가 흰색이었다. 깜짝 놀라 꿇어앉아 정신없이 합장하고 3佛의 물음에, “집안이 몹쓸 전염병을 만나 부모를 잃고 가난하여 걸식하므로 해마다 풍년이 들어 國泰民安하도록 소원하여 염불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667)≪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정월 갑오.

 당시 조정에서는 이룡의 말을 요언이라 하였으나, 이 이야기를 통하여 가난한 서민층에서 염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염불의 목적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고, 현재의 풍년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데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물론 이 사례는 가난한 선군 한 사람에 국한된 이야기이므로 당시 서민층 전부에 해당시킬 수는 없으나, 그의 염불과 소원은 당시 서민들의 염불과 그 염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성종 2년(1471) 5월에 司憲府 持平 金首孫이, 社長 등이 僧尼들을 불러 모아 여염에서 염불을 일삼아 범패 소리가 나라 안에 넘치며, 남녀들이 분주하게 모여들고 있다고 보고한 사실이다.668)≪成宗實錄≫권 10, 성종 2년 5월 계유. 또 같은 해 6월에 사헌부 대사헌 韓致亨 등이 상소한 건도 같은 사례이다.

아미타불을 칭념하면 불도를 이룰 수 있고 죄악을 없앨 수 있다하여 大都의 여염 가운데, 創社하여 念佛所라 일컬으며, 할 일 없이 분잡스레 무리지어 모여서 검은 옷에 검은 관을 쓰고 남자는 동쪽이며 여자는 서쪽이니, 그 모양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며 그 거처하는 곳은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닙니다. 아침에는 市利를 속이고 저녁에는 佛에 귀의하며, 기이하고 괴상한 모양새로 뒤섞여 둘레를 돌면서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뛰놀면서 춤을 추므로 거리의 아이들과 마을의 아낙네들이 둘러서서 흠모하듯 봅니다(≪成宗實錄≫권 10, 성종 2년 6월 기유).

 이 상소를 통해 당시의 염불소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것은 미타염불신앙이 변형된 것이다. 민간에 널리 전파된 ‘禮念彌陀 往生淨土’의 신앙은 염불소라는「社」를 중심으로 승니와 속인이 뒤섞여서 염불하고 범패를 하며 북치고 징울리며 뛰고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미타불의 자비원력에 힘입어서 현세에 편안하고 사후에는 극락정토에 왕생하려는 아미타불 신앙은, 여염의 골목을 휩쓸고 떠도는 염불패로 전락하고 놀이패처럼 속화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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