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밝혀서 불덕을 찬양하고 복을 얻고자 했던 燃燈佛事는 민간의 신앙행사로서 신라시대부터 행해져 왔다. 처음에는 八關會와 더불어 국가적인 행사로 운영되었으나, 연등불사는 민간에 널리 확산되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佛誕日인 4월 초파일에 집집마다 등불을 화려하게 달았으며, 나중에는 觀燈놀이라는 민속행사가 되기까지 이르렀다.
연등법회는 특히 고려시대에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해마다 上元節인 정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2월에 행해지기도 하다가, 고려말에 와서 4월 8일에 불탄 경축행사와 함께 행하여지게 되었다. 이 연등행사는 그 후 사월 초파일의 봉축불사로 정착되었고 아울러 서민층에도 자리잡아 일종의 명절 민속행사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대표적인 행사가 관등놀이와 훗기놀이(呼旗戱)이다.
훗기놀이는 고려시대부터 행하여졌으며 공민왕은 대궐 뜰에서 훗기놀이를 하게 하여 직접 관람하고 상을 내렸다고 한다.669)≪高麗史≫권 40, 世家 40, 공민왕 13년 4월 신축. 조선시대의 연등행사는 계속되는 폐지건의 속에서도 답습되었다. 즉 태조가 즉위한(1392) 바로 다음달인 8월 초에 都堂에서 팔관회와 연등을 폐지할 것을 청했으며, 태종과 세종대에도 연등을 금지해야 한다는 건의와 상소가 있었다. 그러나 4월 8일의 연등행사는 여전했고 훗기놀이와 관등놀이도 계속되었다.670)≪世宗實錄≫권 39, 세종 10년 3월 갑진조에 의하면, 左司諫 金孝貞은 “복을 맞아들이려는 무리들이 밤새워 관등하고 논다”고 하고, 또 “무뢰한들이 옛 습속을 버리지 않고 旗를 잡고 북을 치며 떼를 지어 외치고 다니며 연등의 비용을 마을사람들로부터 구걸한다”고 하며 연등행사를 금할 것을 청했다.
성종대 禮曹判書 등을 역임한 成俔도 훗기와 관등에 관하여 간략하게 당시의 풍모를 전하고 있다.
釋迦如來가 탄생한 날인 4월 8일에 연등한다. 봄이 되면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旗를 만들고 생선 껍질로 북을 만들어 무리를 지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연등에 필요한 물건을 구걸한다. 이를 훗기라 이름한다.
이 날이 되면 집집마다 나무 장대에 등을 단다. 잘 사는 부자는 크게 彩棚을 설치하여 층층으로 만개의 등잔(萬盞)에 불을 켜므로, 마치 별이 하늘에서 내려와 배열한 것 같다. 도성 사람들은 밤새도록 노닐며 구경한다. 짓궂은 소년들은 쳐다보거나 지탄하면서 즐긴다. 지금은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비록 연등은 하여도 옛날처럼 성황을 이루지는 않는다(成俔,≪慵齋叢話≫권 2).
여기에서 앞 부분은 훗기놀이를 설명한 것이고, 뒷부분은 관등놀이에 대한 언급이다. 이 기사를 보면 조선 초기에 이미 연등은 민속행사로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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