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5) 사찰재산과 승려의 경제활동
  • (2) 승려들의 경제활동

(2) 승려들의 경제활동

 승려들은 원래가 무욕청정한 생활을 실천해야 하므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승려는 판매나 무역을 해서는 안되며, 전답과 가옥을 갖지 않으며 노비가 가축을 두지 않고 오직 옷 한 벌과 바리때 하나로 생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행하는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식사 때에 마을로 가서 걸식하는 것을 불교에서는「淸淨自活」이라고 하였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생활양식이 달랐으므로 승려들의 청정자활의 생활방법도 외형적으로는 적지 않게 변화가 있었으나, 그 내면의 생활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청정자활의 정신에서 본다면 고려나 조선 초기 승려들의 생활자세에는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승려들은 사찰의 전답과 노비 또는 佛供設齋 등에 의존하여 대부분이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일정한 소임도 거처도 없이 이 절 저 절을 다니면서 재를 올리거나 초상난 곳에 가서 의식을 얻어 생활하는「遊手僧」676)≪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2월 계미조에서는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기 위해 승려들을 동원하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 그 속에서 승려들을 上·中·下品 세 종류로 구분하여 이들을 하품으로 분류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2)의 (2) 승려의 부역과 그 신분하락 참조.들은 국가의 공사장에 부역승으로 동원되어 음식과 의류를 제공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 승려들은 사원생활이 비교적 풍족하고 절에 예속된 노비들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을 하거나 생산성 있는 경제활동에는 별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조의 尊信을 받은 3和尙 중의 한 명인 學悅의 경우처럼 재물 늘리는 일에만 힘을 써서 민간에 피해를 심하게 끼친 사례도 있다.677)≪睿宗實錄≫권 3, 예종 원년 2월 을묘 및 권 4, 예종 원년 3월 정해. 특히 학열이 세조 13년(1467)에 洛山寺 중수를 감독하였을 때 일꾼 중에 도망자가 생기면, 그는 언제나 그 죄값으로 물건을 징수하였는데 바가지나 솥까지도 가져갔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는 것이다. 또 3화상 중의 한 명이며 학열과 동문인 學祖도 나중에 金泉 直指寺에 은퇴해 있으면서 산업을 크게 경영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하는데,678)≪成宗實錄≫권 161, 성종 14년 12월 무자. 그 산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또 학열·학조와 같이 信眉의 제자였던 津寬寺의 幹事僧 覺頓은 전라도 각 관청의 田稅紙와 草芚을 대납하고 그 대가로 쌀 1,150섬을 싣고 오는 등679)≪文宗實錄≫권 1, 문종 즉위년 3월 임신. 지방 여러 고을의 공납을 청부받아 대납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태종과 세종대의 억불이 좀 누구러지고, 국왕이 숭불하게 되는 세종 말기에서 세조대에 이르는 동안 승려들 중에는 각돈·雪正 등과 같이 공납처부를 전문적으로 행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보았던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상에서 본 학열의 殖貨나 학조의 산업경영 및 각돈 등의 공납청부업은 분명히 승려들의 경제활동이기는 하나, 그것이 당시 승려들의 일반적인 경제활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조선왕조실록≫등 사료에는 위의 승려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기록뿐이므로 또 다른 승려들이 그 밖의 방법으로 경제적 이득을 올리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들 승려들 또한 모두가 세종과 세조의 존경과 신망을 받은 慧覺尊者 신미의 문하들이었고, 학조와 학열은 세조의 존경을 받은 승려들이었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왕실과 가까웠던 몇몇 승려들의 이재활동을 당시 승려 일반의 경제활동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태종 이전의 국초에는 불교계의 경제구조가 고려말의 상황을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에 사찰 소유의 전토와 노비가 풍족하였다. 따라서 승려들은 경제(생산)활동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초의 억불책에 의해 절과 승려의 수가 제한되고 그 재산의 대부분이 국가에 몰수당한 후부터 승려들의 이재에 대한 의식이 새롭게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각돈·설정은 세종말에서 문종대, 학열은 세조에서 예종대, 학조는 성종대에 각각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는 시기의 억불과 폐불책을 거치면서 寺社의 재산은 모두 국가에 몰수당하고, 조정으로부터 그 지위도 인정받지 못했던 승려들은 산 속의 절을 중심으로 전답도 일구고 노역도 하며, 간혹 탁발과 佛供齋費의 수익 등으로 山中僧團 나름의 새로운 경제구조를 형성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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