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1) 재이현상으로 본 전통적 자연관
  • (2) 그 밖의 재이 몇 가지

(2) 그 밖의 재이 몇 가지

 마찬가지로 수많은 자연현상이 모두 이렇게 여겨졌다. 하늘의 현상으로 해와 달·별들에 대한 이상현상이 기록되고, 가뭄도 포함한 그 밖의 많은 이상현상들은 땅의 이상으로, 그리고 또 많은 현상이 인간에 대한 이상현상으로 기록되었다. 땅이나 인간의 이상은 당장 인간에게 그 의미가 크든 작든 있을 수 있지만, 하늘에 관한 이상의 경우는 대체로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점성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앞의 통계에서 곧 알 수 있는 것처럼 압도적으로 많다. 하늘의 이상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땅의 이상기록이며, 인간에 얽힌 이상기록이란 극히 적은 수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천-지-인의 三才라 부르던 바로 그 순서라 하겠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이상현상을 하나 예로 들어 보자면 流星을 들 수 있다. 세종대의 대표적 천문학자 李純之가 펴낸≪天文類抄≫에는 유성이 하늘의 심부름꾼이라 적혀 있다. 별이 크면 큰 일을, 작으면 작은 일을 맡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경우를 들어 상세한 설명이 있는데, 모두 유성의 크기와 밝기 등을 근거로 하는 설명이다.010) 李純之,≪天文類抄≫下, 流星.
유성에 대한 논의는 박성래,<한국과학사상사>(≪과학사상≫13, 1995), 254∼269쪽.
유성은 자연 속의 여러 이상현상 가운데 그리 중대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書雲觀志≫에 의하면 유성은 다른 여러 가지 천문현상과 함께 일괄적으로 모아 보고하게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초에는 유성을 관측하지 못한 죄목으로 처벌을 받은 천문관도 있었다. 태종 6년(1406) 정월에 유성을 관찰하지 못한 서운관 관리 한 사람을 순금사에 하옥시켜 장 60을 때린 후 파직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꼭 유성을 중시해서라기 보다는 천문관의 근무태만에 대한 처벌이었다고 생각된다. 연산군은 11년(1505)에 유성의 경우는 아예 관찰해 보고할 필요조차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이다. 유성이 그래도 역사 기록에 남는 경우는 아무래도 그 정치적 의미를 강조했을 경우로 보인다. 명종 15년(1560) 8월 1일 밤 7개의 유성과 1개의 飛星이 관찰되었다. 또 이어서 4경과 5경에는 유성과 비성이 사방에서 비오듯 했다. 이를 기록한≪明宗實錄≫에는 史臣의 논평도 붙여져 있는데, 유성이란 백성이 떠나고 흩어지는 조짐이니 임금은 이런 비상시를 당하여 일대 각성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유성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역시 정치적 의미가 강한 재이로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유성은 서민들 사이에서는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조짐으로도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글이기는 하지만, 李圭景의 글에 의하면 유성은 그 시작과 흐르는 방향에 따라 비가 올 때와 비오는 정도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유성은 비오는 것을 예측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011)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33, 流星占蔭晴辨證說.

 다음은 인간에 관한 이상현상 한 가지만을 예로 더 들어 보자.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로는 위의 통계 가운데 세 쌍둥이·유언비어·동요·불구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세 쌍둥이의 경우만을 예로 들어 보자. 조선초 세 쌍둥이 출산에 관한 기록은 73건이나 될 정도로 제법 많다. 그리고 이 경우는 다른 이상현상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른 이상현상이 나쁜 것으로 여겨졌던 것과는 달리 이 이상현상은 좋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三産이란 길조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길조 가운데에는 이것 말고도 몇 가지 경우가 더 있는데, 舍利·감로·사슴이나 노루 등의 흰 동물·老人星 등이 있다.

 세 쌍둥이의 경우는 또한 다른 기록과는 달리 아주 충실한 기록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다. 다른 기록이 여러 가지 이유로 왜곡될 가능성이 높은데 비하여 세 쌍둥이의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고 생각된다. 세 쌍둥이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임금이 상을 주게 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이 관행이 지켜졌다. 이런 시상이 더욱 그 보고를 확실하게 보장했고, 또 거짓 보고는 어렵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 쌍둥이에 대해서만은 거의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이 또한 왜곡되지 않은 이상현상의 가능성을 높게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 쌍둥이가 이렇게 상당수 기록되고 있고 시상하고 있건만 그 원인이나 그에 따른 의학상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고려 때까지는 세 쌍둥이를 낳은 집에는 때로는 200석까지의 제법 많은 곡식을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초에 이르면 그 시상액이 상당히 줄었다. 중종 때에는 아예 임금의 직접 시상은 없어지고 지방 수령이 시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 경사스러운 이상현상에 대해 세종 13년(1431) 7월 궁중에서 있었던 세종과 신하들 사이의 논란은 흥미있다. 초계군에 사는 私婢가 “남자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둘이 바로 죽었다”고 경상도감사가 보고해 왔다. 이에 대해 代言司는, “남자 세 쌍둥이의 경우 쌀 10석을 주지만, 그 가운데 둘이 죽었을 경우는 쌀을 내려준 예가 없다”고 아뢰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옛 사람 이야기로는 남자 세 쌍둥이 가운데 현명한 사람이 많다는데, 비록 이 여자의 경우 둘이 죽었다지만 쌀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물으면서 예조에 검토를 지시했고, 예조가 이 경우는 반만 지급하자고 건의하자 임금은 이에 따라 5석을 내렸다.012)≪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7월 정묘.

 정종 원년(1399) 8월에는 경상도의 계림과 함양에서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남자 쌍둥이들로 되어 있는데, 서운관의 조사에 의하면 이는 태평을 뜻하며, 또 어떤 설에 의하면 3년 이내에 외국에서 조공이 올 것이라고도 하였다.013)≪定宗實錄≫권 2, 정종 원년 8월 계미.

 연산군 8년(1502) 4월에는 강원도감사가 강릉에서 2남 1녀가 태어난 것을 보고하고, 이에 대해 곡식(미두)을 내렸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 문제에 대해 이는 ‘怪變’일 뿐인데 어찌 곡식을 내리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조사하라는 임금의 지시에 따라 예조는 조사 결과 곡식을 내리는 이치는 밝히기 어려우나 애들 기르기 어려운 것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연산군은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014)≪燕山君日記≫권 43, 연산군 8년 4월 무신·임자.

 이와 같이 정종대의 세 쌍둥이 해석에서 1세기가 지난 연산군대의 해석까지에는 어느 정도 상황이 바뀌어 상당히 합리적인 태도로 변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세 쌍둥이라는 인체의 작용에서 오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별다른 의학적 내지는 과학적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조선초의 세 쌍둥이 기록은 일종의 상서로운 자연변화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서로운 경우로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들 모든 상서는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갔다. 그리고 이들이 왜 중요성을 잃어갔는지는 조선사회가 유교화해가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이 부분은 다음의 유교적 자연관을 다루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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