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2) 풍수지리로 본 자연관
  • (2) 태종의 음양지리

(2) 태종의 음양지리

 태조가 새 서울을 정하기 위해 풍수설에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태종은 풍수설 등을 포함한 邪說을 정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태조의 새 서울 결정 문제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미 풍수설은 모호성을 충분히 드러냈을 뿐 아니라 풍수가마다 다른 이론을 내세우고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은 이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풍수설은 당연히 도참설과 손을 잡고 왕조의 쇠왕을 예언하는 등의 위협으로 작용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이미 조선초에는 지식층 사이에 고려 때까지 지나치게 풍수설과 도참설이 강하게 작용한 데에 대한 반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태조가 홀로 새 서울의 자리를 잡으려고 집착하고 있을 때에도 서운관의 지관 劉旱雨 같은 사람은 풍수와 도참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태조가 군신을 거느리고 무악에 현장답사를 갔을 때인 동왕 3년(1394) 8월의 일이다. 현장을 둘러 본 군신들은 무악을 적당한 새 서울 자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태조는 書雲副正 유한우를 불러 “정말로 여기가 서울로 알맞지 않은가”라고 다그쳤으나 유한우는 안되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에 임금이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어디가 좋으냐고 묻고 송도지기의 쇠왕설을 듣지 못했느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유한우는 “이는 도참설인데, 신은 다만 지리를 배웠을 뿐이지 도참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018)≪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무인.

 왕자의 난으로 새 왕조의 앞길이 불안한 가운데, 자연의 여러 가지 재이까지 겹쳐 정종은 즉위와 함께 다시 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말았다. 새 서울에서 불편한 생활에 질린 많은 사람들은 옛 서울로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개경에서도 골육간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태종이 정종 2년(1400) 11월에 즉위했으나 12월에는 壽昌宮에 화재가 나는 등의 불행이 그칠 줄 몰랐다. 서울을 다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나게 된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였다.

 당시 인심이 아주 흉흉하고 풍수·도참 등의 온갖 술수가 널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연말에 태종은 드디어 술수에 관한 서적을 금하라고 명하고,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는 문제를 상의하기 시작했다.019)≪定宗實錄≫권 6, 정종 2년 12월 임자.

 태종은 문신 10여 인에게 서운관에 비밀 수장되어 있는 서적들을 참고해서 천도의 이해를 따져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자리에서 태종은 지금 참위 술수의 책들은 종잡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고 그래서 더욱 인심을 어지럽힌다면서 이를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 대신들의 의견은 이를 따를 것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논란은 분분했고, 하륜은 다시 무악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

 또 이 자리에서 태종은 구태여 부왕이 새로 만든 서울을 버리고 새삼 새 도읍을 건설하여 백성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였으나 논란 끝에 천도 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이 때 그 단서를 제공한 것은 하륜의 무악으로 옮기자는 상서였다. 태종 4년(1404) 9월 하륜이 다시 지리도참서를 참고해서 주장했던 옛 주장을 다시 들고 나와 무악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자 태종은 몸소 현장답사를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0월 4일 현장에 도착한 태종 일행은 조사를 마치고 각각 의견을 발표하게 되었다.020)≪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10월 임신.

 그런데 무악과 한양 가운데 어느 곳이 더 좋은지 숨기지 말고 의견을 말하라는 임금의 지시에 자기 의견을 밝힌 사람은 지리학자들 뿐이었다.≪太宗實錄≫에는 당시의 대표적 풍수가인 尹莘達·閔中理·劉旱雨·李陽達·李良 등의 이름과 의견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윤신달만이 무악을 지지하고 나섰을 뿐, 나머지는 대체로 무악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었고, 한양 또한 마땅치 않다는 의견이었다. 특이한 점은 이 기록에는 당시 함께 있었던 대신이나 언관 등이 아무 반응도 나타내지 않은 것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태종은 한양이 적당하지 않다면서 왜 태조가 한양을 건설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면서, 어떻게 한양에 도읍을 세우게 되었느냐고 趙浚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조준은 “신은 지리를 모른다”고 응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서울을 어디로 결정할 것인가를 두고 태종은 그 이틀 뒤 한양에 세워 놓은 종묘에 행차하여 동전을 던져 점을 쳐서 도읍지를 결정하게 되었다.021)≪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10월 갑술. 태종은 자기가 송도에 있는 동안 재변이 많았고, 그 때문에 신하들의 의견을 물은 즉 新都로 다시 옮기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신도에서 역시 변고가 많았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도읍이 정해지지 않아 인심 역시 안정을 얻지 못하니, 신도·송도·무악 세 후보지 가운데 점을 쳐서 결정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점괘에 따라 새 도읍이 결정되면 이론을 달지 않기로 하자면서 임금은 동전을 던지게 했다. 그 결과는 신도가 2길 1흉, 송도와 무악은 각기 2흉 1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신도 한양으로의 이사는 태종 5년(1405) 10월 시행되었다. 태종 자신이 신도·송도·무악 가운데 어디를 더 좋은 곳으로 여겼던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로 도읍을 확정하기까지에는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시간이 걸렸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지배적 사상으로 풍수지리학과 도참사상이 강하게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태조가 갖고 있던 새 도읍을 정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은 태종에게도 어느 정도 전파되어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태상왕으로 살아있던 태조는 자기가 지은 새 도읍으로 돌아갈 것을 바라고 있었다. 태종으로서는 도읍을 신도로 확정함으로써 자기 집권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자기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도읍이 결정되자 태종은 음양술수에 관한 허황된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태종 17년 6월 강계에서 무녀 2명이 妖言 사건으로 처형될 경우 감등해서 처벌하라고 지시한 태종은 “나는 참위에 관한 책을 믿지 않은 지 오래이다”라면서 구체적 예를 들어 말하였다. 이어 “종묘사직의 화복과 길고 짧음이 어찌 이로써 알 수 있으리오”라고 하고, 일찍이 서운관에 이따위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명했는데 어찌 되었느냐고 채근하였다.022)≪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6월 경인.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참서를 금하는 교서를 내렸다. 참위술수는 혹세무민의 원천이어서 이미 서운관에 불태우라는 지시를 했으나, 혹시 아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런 서적이 있다면 내년 정월까지 자진해 바쳐 태우도록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이를 고발한 사람에게는 그 죄인의 재산으로 상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023)≪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1월 병진.

 실제로 그해 12월 서운관은 소장하고 있던 참서 2상자를 불태워 버렸다. 소장된 음양서 가운데 妖誕不經의 것들을 모두 골라 태워버리라는 왕명을 따른 것이다. 또 이≪태종실록≫기사에는 “당시 사람들은 전왕조 때의 습관 때문에 陰陽拘忌를 혹신한다”024)≪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2월 병신.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으로 보아 모든 풍수학 책을 태웠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특히 고려 때와의 차별화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새 왕조의 지배층은 고려 때의 지나친 풍수지리 사상을 극복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있었고, 태종 자신이 아버지 보다 합리적인 풍수사상을 지니려 애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듬해 2월 4일 태종이 끔찍하게 사랑하던 넷째 아들 誠寧大君이 두창으로 14살에 죽자 태종 부부의 슬픔은 나라를 기우릴 정도에 이르렀다. 어린 아들의 질병 치료에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태종이었지만 장례일을 잡는데 지나치게 풍수설에 따라 길일을 고르느라 장의일이 늦춰지자 단호하게 4월초로 잡을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음양지리법은 언제 시작된 것이며, 중국인들도 장지를 고르는데 우리처럼 이에 따르는가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신하들의 대답은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025)≪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2월 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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