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2) 풍수지리로 본 자연관
  • (4) 이지함과 남사고의 유산

(4) 이지함과 남사고의 유산

 李珥·南師古·李之菡은 모두 임진왜란 직전의 16세기를 살고 간 우리 역사의 대표적 명인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栗谷 이이가 남사고와 이지함 모두에 대해 그들 예언의 신통력을 인정하는 논평을 남기고 있다. 남사고는 이이가 존경하던 曺植의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지함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죽음에 임해서는 그의 기행 등을 자세히 소개하는 글을 썼다. 이이의 일기 속에 이들의 이름이 그렇게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당대에 이미 예언자로서 유명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이들은 풍수가로서 언급되기 보다는 단순한 예언가로 평가되어 있다. 적어도 그의 일기 속에서 이이는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036) 李珥,≪石潭語錄≫上, 선조 5년 정월 및 下, 선조 11년 7월.

 그러나 남사고는 원래 풍수가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붙인≪南師古秘記≫가 여러 종류 전해지고 있다. 그가 단순한 지리학자가 아닌 전반적 예언가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사실은 같은 시대의 이지함을 살펴보면 더욱 그 공통적인 특성을 이해할 수가 있다. 즉 조선 전기를 통해 풍수지리는 사대부 학자층에 의해 부정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전반적인 역학·음양사상 등에 연결되어 다시 신비스런 학문적 입장을 확립하고 있었고, 바로 이런 변형된 풍수지리학이 남사고와 이지함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사고의 경우 그가 당초 풍수가였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전설을 살펴도 분명하다. 그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駱峯과 서쪽에 자리한 鞍峴이 마치 서로 다투는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앞으로 동서의 붕당 싸움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037) 李建昌,≪黨議通略≫宣祖朝. 또한 그는 임진왜란을 미리 예고했다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의 예고는 풍수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는 임진왜란이 났을 때 豊基와 永川을 복지라고 예언했던 바, 과연 그의 말대로 그곳에는 왜군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038)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 亂中時事摠錄. 남사고는 또한 선조가 임금될 것도 미리 예언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역시 선조가 왕자 시절에 살고 있던 사직동의 지세를 근거로 한 예언이었던 것이다.039)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5, 宣祖朝故事本末 壬辰倭亂大駕西狩.

 남사고는 같은 시대를 살고 간 이이에게 칭송받았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정월에 조정에서 임금이 의정·판서·참판들과 함께 논의하는 가운데 이조판서 李山甫가 우리 나라에도 남사고 같은 예언자가 있다고 거론할 정도로 이름이 당대에도 꽤 잘 알려져 있었다.040)≪宣祖實錄≫권 34, 선조 26년 정월 정묘. 그러나 후세에 이르면 사대부 계층 사이에서 미신의 대표자 쯤으로 격하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영조 9년(1733) 9월 남원에서 일어난 凶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의 주인공인 양반출신 승려 太眞이 남사고의 비결을 들먹였고, 결국 임금이 남사고가 누군지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尹淳은 그는 성종 때 사람으로 천문·지리에 모두 통해 異人으로 소문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호남에서는 義相과 道詵 같은 神僧이 났고, 이에 따라 남쪽 지방에는 여러 가지 方書가 많이 돌고 있으며, 그 형식은 風水나 推命, 또는 相術로 서로 다르지만 특히 승려들이 더 많이 신봉하는 경향이 있고, 태진 역시 이에 속하는 셈이라고 하였다. 또 徐命均은≪남사고비기≫는 세상에 많이 퍼져 있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살을 붙이고 멋대로 해석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 많다고 평하였다. 이어 그는 이들 비기 가운데에는 고려가 5백년, 조선이 8백년이라고 기록한 것도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尹陽來가 나서서 도선이든 남사고든 비기를 가지고 인심을 현혹하는 자는 모두 목을 베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영조 또한 이 말이 옳다고 했다.041)≪英祖實錄≫권 35, 영조 9년 8월 갑술.

 이처럼 남사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미신의 대표자로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그의 저작으로는 풍수지리서 종류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비하면 같은 시대의 이지함은 시대가 바뀌어도 전통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위상이 그리 격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이는 남사고보다는 이지함을 훨씬 높였고 남사고가 이이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이가 이지함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이이가 대사간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자 이지함이 만류한 일도 있을 정도이다.042)≪宣祖修正實錄≫권 12, 선조 11년 3월 임자. 그런데 이지함의 수많은 허황해 보이는 일화들은 남사고의 그것을 능가하지만 한결같이 풍수지리가로서의 이지함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같은 예언가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더욱 유명해졌던 것으로 보이는 두 예언자들이, 남사고는 풍수지리에서 출발한 것처럼 그려지는데 비해 이지함에게는 그런 배경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지함에 대한 전설은 이이의≪石潭日記≫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고,≪조선왕조실록≫에 조차 그런 일화가 기록될 지경이다. 이지함은 처음 관직에 기용되는 과정부터 이색적으로 당대에 대한 기록인≪宣祖實錄≫에 적혀 있다. 선조 6년 6월 그는 ‘바위에 숨어 사는’ 다른 선비들 5명과 함께 천거를 받아 관직을 얻었다. 그런데 다음달 그의 형 李之蕃이 아프다고 서울에 들렀고 그 소식을 들은 이지함은 귀를 닦고는 즉각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043)≪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6월 신해·7월 갑신. 이 기록과는 달리 이지함은 이 때 관직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세 의정과 상의한 다음 이조에서 올린 천거에 의하면, 이들에게 참봉 따위 말직을 주기 보다는 높은 관직을 내리자고 건의했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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