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1) 서운관·관상감의 설치와 그 기능
  • (2) 관아와 관측규정

(2) 관아와 관측규정

 서운관은 경복궁 안 尙衣院 남쪽 迎秋門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태종에서 세종초에 북부 廣化坊에도 설립되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것이 本監이고 북부 광화방에는 별감이라 할 수 있는 청사와 관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두 서운관이 서로 어떤 기능과 역할 또는 관장업무를 분담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별로 없어서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경복궁의 서운관(관상감)을 본감 또는 內관상감으로 부른 것으로 보면, 그것이 본부였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의 서운관 청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청사들과 관측시설들이 모두 불타 없어진 후 숙종 14년(1688)에 창덕궁 金虎門 밖에 재건한 청사의 규모가≪서운관지≫에 적혀 있을 뿐이다. 북부 광화방의 서운관 자리에 새로 지은 청사에 대한≪서운관지≫의 기술내용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 관상감의 본감이 들어선 광화방 청사의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청사는 10칸인데 東室과 西室로 나누어졌고, 2칸이 公事堂이었다. 그러니까 관상감의 본청은 4칸 크기의 방 2개와 2칸 크기의 방 1개의 건물이었다. 이 청사의 동쪽에 天文直盧가 있었는데 7칸 반이다. 또 三曆官이 회동하여 업무를 의결하는 三曆廳이 있었는데 크기가 6칸이었다. 관천대의 동쪽에 역시 6칸 크기의 日課廳이 있었는데, 임금에게 바칠 것과 임금이 나누어 주는 것들을 담당하여 관리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관천대의 동쪽에는 또 하나 官廳이 있었다. 4칸의 건물인데 공적인 物貨를 출납하는 곳이었다. 관청의 동쪽에 5칸 반의 印出所 건물이 있었는데 역서와 천문 관련 서적의 인쇄를 감독하는 곳이다. 일과청 옆 관청의 동쪽에는 또 6칸 크기의 吏廳 건물이 있었다. 건물들은 대문 1칸, 행랑 4칸의 門廊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숙종 41년에 경희궁에 세웠던 관상감의 설치규모는 금호문 밖의 것과 대략 같았으나 청사의 크기는 조금 작아서 청사가 7칸 반, 이청이 3칸, 대문 좌우의 행랑이 각각 1칸이었다고 한다.071) 成周悳,≪書雲觀志≫ 권 1, 官廨.
兪景老,<書雲觀志의 번역과 해설>(≪한국과학사학회지≫12-1, 1990), 120∼123쪽.

 서운관은 이런 건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시설로 관측대를 가지고 있었다. 경복궁에는 세종 16년(1434)에 경회루 서북쪽에 大簡儀臺가 축조되었고, 광화방 서운관에는 觀天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운관의 이런 시설의 전통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어져서 창경궁과 경희궁에는 소간의를 설치하여 관측에 임하기 위하여 관천대를 돌로 쌓았다. 지금 창경궁에 남아 있는 화강석으로 축조된 관천대는 그 중의 하나이다. 서운관의 기능은 그 핵심인 천문학 분야에서, 천문의 연구, 역서의 편찬, 천문관측과 시간의 측정, 그리고 천문학 교육과 훈련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천문관측과 시간의 측정은 기술직으로서의 서운관 관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확하게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그것은 엄격한 업무규정에 따라 조직적으로 수행되었다. 그 관측규정은 매우 근대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체관측은 일식과 월식,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5행성, 그리고 혜성과 신성·유성 등이 특히 중요시 되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국가와 지배자의 안위와 직결된다고 생각한 천문사상의 영향이었다. 관측 결과는 그대로 기록되고 보고서로 작성되었다. 일식과 월식은 식이 시작된 시각과 시간, 그 방향, 정도 등을 관측하고 그림으로 나타냈다. 혜성은 그 출현 일시, 수도의 위치 및 이동상황, 몸체의 크기와 색, 꼬리의 길이, 소멸 일시 등에 대하여 관측하고 기록과 그림을 겸하여 쓰도록 했다. 5행성의 운행에 대해서는 행성과 달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 행성과 혜성 상호간에 일어나는 현상, 행성 특히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 등이 주로 관측되었다. 일·월식의 계산, 5행성 위치의 계산은 세종 때≪七政算內外篇≫이 편찬되면서 그 立成 즉 수표에 의하여 복잡한 계산을 매우 정확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일식과 월식의 정확한 예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왕조의 권위를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천체관측과 함께 기상현상의 관측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白虹貫日과 白虹貫月, 日暈과 月暈, 地動地震, 그리고 강수현상 등이다. 이러한 자연현상들은 농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강수현상과 기온의 변화, 바람의 변화 등은 면밀하게 관측되었다.≪서운관지≫에는 33종의 천문기상 현상에 대한 관측규정이 구체적으로 예시되어 있다.

 ≪서운관지≫의 그 규정들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그 관측규정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기록들이≪세종실록≫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서운관의 관측규정은 세종 때에서 세조 때 사이에 이루어지고 지켜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운관지≫에는 또 관측자의 복무규정과 보고서의 작성 및 보고의 규정도 기술되어 있다. 관측자는 하루 3교대로 관측에 임하고 3일 간격으로 돌아가며 시간을 바꾸어 복무하게 된다. 비상현상으로 분류된 천문기상현상은 구두 및 보고서로 승정원과 홍문관, 시강원, 내각에 즉시 보고되었다. 세종 20년(1438) 3월부터는 경복궁 대간의대에서 매일 밤 5명이 관측에 임했다.072) 成周悳,≪書雲觀志≫권 1, 番規.
全相運,<書雲觀과 簡儀臺>(≪鄕土서울≫20, 1964), 37∼51쪽.

 그런데 서운관의 기능에는 이러한 과학적인 천문학 분야만을 관장하는 일뿐만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업무가 있었다. 신비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 천문이라는 學이 그것이다. 흔히 점성술로 불리우는 점성의 學분야에 속하는, 하늘의 현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서운관의 관장업무 중에 천문과 함께 占籌가 있는 것은 그런 기능을 규정한 것이다. 또 서운관의 핵심 三學이 천문학·지리학과 함께 命課學이었던 것도 이 관서의 성격과 기능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관상감을 떠받들고 있는 미신적인 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는 관상감에서 편찬된 曆書에서도 발견된다. 길흉과 관련된 사항이 역서에 들어 있는 주요 내용의 하나라는 사실은 그 보기이다.

 지리학에도 그런 요소가 주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지리지의 편찬, 지도의 제작과 함께 서운관의 핵심을 이루는 학문인 풍수지리학에서 발견되는 신비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풍수지리학은 자연지리학적인 요소와 相地技術學的인 요소가 복합되고 거기에 신비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지리 또는 땅과 인간과의 관계, 특히 길흉과 관련된 풍수지리설에 의한 相地는 서운관의 주요 기능의 하나였다.

 서운관과 관상감이 조선 초기에 매우 중요한 관서로의 역할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帝王의 學으로서의 천문학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영의정이 책임자를 겸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관상감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운관이 우주를 다루고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관장하는 기구이고, 그 학문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종2품 이상의 제조 2인을 두고, 정원의 제한이 없는 당상관을 둘 수 있게 한 것도 다른 나라에는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관제였다. 서운관의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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