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2)<천상열차분야지도>
  • (1) 그 성립과 구성

(1) 그 성립과 구성

 조선 초기의 천문학은 서운관의 설치와, 태조 4년(1395) 12월에 완성된<天象列次分野之圖>의 제작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의 역대 왕조는 모두 그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하여, 또 왕조의 운명과 앞날을 내다보기 위하여 천체의 관측과 天象의 변화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거기서 얻은 관측 결과는 면밀하게 기록되어 축적되었고, 쌓인 기록들과 지식의 주요 부분은 천문도로 규격화 되었다. 그래서 천문도는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고, 역대 왕조는 그 권위의 표상으로 천문도를 만들고 그것을 지켜 왔었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즉위하면서부터, 새 왕조가 하늘의 뜻에 의해서 세워진 왕조임을 천명하기 위해서 그 권위의 표상으로 새로운 천문도를 갖기를 염원했었다. 그 염원은 즉위한 지 4년만인 1395년에 이루어졌다. 權近·柳方澤·權仲和·崔融·盧乙俊·尹仁龍·池臣源·金堆·田潤權·金自緩·金候 등 11명의 학자와 천문학자들의 수년간의 노력 끝에<천상열차분야지도>가 만들어짐으로써 성취된 것이다.

 이<천상열차분야지도>는 천상 즉 천문현상을 12분야로 나누어 차례로 늘어 놓은 그림이란 뜻이다. 이것은 중국에도 없었던 독특한 이름이다. 권근은 이<천상열차분야지도>가 만들어진 경위를 천문도에 새긴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예전에 평양성에 천문도 石刻本이 있었다. 그것이 전란으로 강물 속에 가라앉아 버리고, 세월이 흘러 그 印本마저 매우 희귀해져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태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그 천문도의 인본을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태조는 그것을 매우 귀중히 여겨 서운관에 명하여 돌에 다시 새겨두도록 했다. 서운관에서는 그 연대가 오래되어 이미 星度에 오차가 생겼으므로, 새로운 관측에 따라 그 오차를 고쳐서 새 천문도를 작성하도록 청했다(權近,≪陽村集≫권 22, 天文圖詩).

 그래서 새로 中星記 한 편이 편찬되었다. 이 중성기에 따라 옛 천문도를 바로 잡은 星圖를 돌에 새겨 완성한 것이다.

 이 천문도는 가로 122.8cm, 세로 200.9cm의 흑요석에 새겨졌다. 권근이 지은 글을 偰慶壽가 썼다. 推算은 柳方澤이 했다. 권근의 글은 그의 저서≪陽村集≫天文圖詩에서도 확인된다. 이 때 만든<천상열차분야지도>는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그대로 방치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영조 46년(1770)에 왕은 그것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관상감에 欽敬閣을 지어 숙종 때에 새로 새긴<천상열차분야지도>와 함께 설치하게 했다.

 권근은 이 천문도 제작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썼다.

옛부터 제왕이 하늘을 받드는 정치는 曆象과 授時를 으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요임금은 四時의 절후를 바로잡게 했고, 순임금은 선기옥형으로 七政을 관측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권장함에 있어서 시기를 늦추지 아니한 것이다. 전하께서는 聖武·仁明하시어 선양으로 나라를 이어 받으시니, 나라 안팎이 다 평안하여 태평하게 되었다. 이것은 요·순 임금과 같은 덕이다. 먼저 천문을 관찰하여 중성을 바로잡은 것은 요·순의 정치를 본받은 것이지만, 요·순이 천상을 관찰하고 기계를 만든 본 마음을 추구해 보면 그 근본은 다만 하늘을 공경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삼가 생각컨대 전하께서도 역시 공경함을 마음에 두어, 위로는 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일에 힘쓰면, 그 神功이 성대하게 빛나서 마땅히 요·순과 같이 융성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星圖를 貞珉에 새겨서 영원히 자손 만대의 보배로 삼으려 하니 참으로 위대하다(權近,≪陽村集≫권 22, 天文圖詩).

 이 천문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천문도를 대략 2등분한 선에 접해서 직경 76cm의 원을 그려 성도를 그렸다. 원의 중심에 북극이 있고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관측지의 出地度에 따른 작은 원과, 더 큰 적도 및 황도권이 그려져 있다. 1,464개의 별이 그려져 있는 별자리 그림의 원 둘레에는 28宿의 이름과 赤道宿度가 기록되어 있고, 각 수의 距星과 북극을 연결하는 선에 의하여 개개의 별의 入宿度가 목산으로도 정확하게 읽어 나갈 수 있게 그려져 있다. 관측기사에는 24절기의 昏·曉에 자오선을 지나는 별에 대한 天象 기사, 12國分野 및 星宿分度, 日宿과 月宿의 기사 등이 씌여 있다.

 천문도의 중간 아래 쪽에는 이 천문도의 이름인 ‘天象列次分野之圖’란 제자가 새겨졌다. 그 아래에 論天說 즉≪晋書≫天文志를 인용하여 渾天說과 蓋天說을 주로한 중국의 전통적 우주설을 기술했다. 그 글에 이어 28수 去極分度를 기술하고, 그 아래 단에 이 천문도 제작경위와 태조를 찬양하는 천문도 제작의 의의를 쓰고, 끝으로 천문도 제작에 참여한 학자들의 관직과 성명을 쓰고, 제작 연월일을 썼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태조 때의<천상열차분야지도>의 각석에는 그 뒷면에 마모가 심한 또 하나의 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그것이 미완성의 각석인지, 아니면 원래의 것인지 분명치 않다.≪增補文獻備考≫권 2, 象緯考에 의하면, 세종 15년(1433)에도 새 천문도가 돌에 새겨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073) 그래서 심하게 마모된 쪽이 태조 때의 것이고 비교적 온전한 쪽이 세종 때에 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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