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4) 해시계와 물시계의 제작
  • (1) 세종대의 해시계

(1) 세종대의 해시계

 조선시대 해시계 제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세종실록≫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仰釜日晷·懸珠日晷·天平日晷·定南日晷 등이 그것이다. 세종 19년(1437) 4월에 끝난 일련의 천문기기 제작사업에서 만들어 낸 해시계들이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여러 가지 해시계들이 제작된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며, 해시계에 대한 자세한 구조가 공식 기록으로 설명된 일도 이례적인 것이다. 세종 때의 해시계 제작은 그만큼 史官들의 주목을 받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해시계들 중에서 앙부일구는 특히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세종 16년 10월에 ‘우매한 백성들’도 보고 시간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 해시계는 그 모양과 구조가 독특한 점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것이다.≪세종실록≫에는 이 해시계가≪원사≫에 기재된 곽수경의 법에 따라 만들었다고 하고, 金墩의 仰釜日晷銘을 인용하여 그 구조와 제작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처음으로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여 해그림자를 관측하다. 집현전 직제학 김돈이 명을 짓기를, ‘모든 시설에서 시간에 관한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지름에는 둥근 송곳을 설치하여 북에서 남으로 마주 대하게 했고, 움푹 패인 곳에서 (선이) 휘어서 돌게 했으며, 점을 깨알같이 찍었는데, 그 속에 度를 새겨서 半周天을 그렸다. (時)神의 모양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으로, 시각이 정확하고, 해그림자가 명확하다. 길가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백성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世宗實錄≫권 66, 세종 16년 10월 기사).

 김돈이 설명한 앙부일구의 구조는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중기에 제작된 청동제 앙부일구와 그 이후에 제작된 여러 개의 앙부일구와 기본적으로 같다. 앙부일구란 가마솥 또는 대접 모양의 그릇이 위를 향해 있는 모양을 한 해시계라는데서 붙은 이름이다. 그 半球形의 대접과 같은 모양의 時盤에는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緯線을 그려서 절기를 나타냈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자오선)을 그었다. 그리고 時標는 북극을 향하여 비스듬이 세워졌다. 다만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서 그 시에 해당하는 동물의 형상을 그려 넣었을 뿐이다. 지금 탑골공원에 남아 있는 앙부일구대로 미루어 볼 때, 종묘 앞과 혜정교에 설치했던 앙부일구는 비교적 큰 공중 해시계였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김돈이 쓴대로 그 때부터 백성도 그런 해시계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앙부일구의 제작이 많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남아 있는 앙부일구 중에 자기로 만든 것이 여러 개가 있다는 사실은, 조선 초기 이후의 도자기 생산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여러 가마에서 앙부일구를 만들어 보급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앙부일구는 원의 곽수경이 만든 仰儀에서 그 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세종 때의 학자들이 쓴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해시계로서의 앙부일구는 세종 때 천문학자들과 이천·장영실 등의 창조적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해시계는 중국에서는 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는 세종 때 이후 조선의 대표적 해시계로 정착되어, 조선 후기까지 계속 제작 사용되었다. 그리고 휴대용 앙부일구로까지 발전하여 양반들에게 사랑받는 해시계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江戶시대의 일본 지배층에서도 그것을 모방해서 만든 휴대용 해시계가 사용되었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해시계였다. 이에 대한≪세종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또 현주일구를 만들었다. 밑바침은 네모나게 했고 그 길이는 6촌 3푼이다. 밑바침 북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남쪽에는 못을 팠다. 북쪽 (기둥 앞에는) +字를 그리고 그 기둥 머리에 추를 달아매서 (그 추가) 십자와 서로 닿게 하여 水準을 보지 않아도 자연히 수평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작은 바퀴(원반)에 1백각을 그려 넣었는데, 바퀴의 지름은 3촌 2푼 (바퀴에 붙은) 자루가 비스듬히 기둥에 꿰어져 있다. 그 바퀴의 중심에 구멍이 있어 한 가닥 가는 줄을 꿰어 위는 기둥 끝에 매고 아래는 밑바침의 남쪽에 매어, 그 줄의 그림자 위치로 시각을 알게 되어 있다.

천평일구는 그 제도가 현주일구와 거의 같은데, 단지 밑바탕의 남쪽과 북쪽에 못을 파고, 그 중심에 기둥을 세워 노끈을 기둥 머리에 꿰고 이것을 들어서(기둥을 세워서) 남쪽을 가리키게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세종실록≫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의 휴대용 해시계 제작에 대한 첫 공식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이 해시계의 구조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주일구는 적도식 해시계이다. 100각의 시반을 받침대에 수직으로 세운 기둥에 적도와 평행하게 끼어 고정하고 시반의 중심과 기둥의 윗 끝, 그리고 받침대의 한 끝을 잇는 실을 시표로 해서 해그림자를 측정하는 장치인 것이다. ‘현주’라는 이름은 시표와 시반을 지지하는 기둥이 수직으로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구슬을 매달아 일정한 위치에 드리우게 한 장치를 특징으로 한데서 지어졌다. 그리고 천평일구는 평면 해시계이다. 이동할 때 언제라도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받침대에 2개의 못을 만들어 거기에 물을 부어 시반의 수평을 제대로 잡기 위한 장치를 특징으로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시표는 수직으로 세운 막대 끝과 밑받침대를 잇는 끈으로 된 삼각시표의 원형이었다. 아마도 이 해시계들은 세종 때 관료 과학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휴대용 해시계였다고 생각된다. 조선정부는 이 두 휴대용 해시계를 다른 시간 측정기기와 함께 함길·평안도 도절제사 營과 경원·회령·종성·온성 등의 변방에도 보내서 시간을 측정하는데 쓰게 했다. 그리고 그 일부를 서운관에도 두었다고 했다. 여러 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세종실록≫은 또 말을 타고 가다가 시간을 알고 싶을 때에도 쓰기 위해서 이들 휴대용 해시계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시간 측정기기의 제작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창조적인 작품이었다.

 定南日晷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진 해시계였다. 지남침을 쓰지 않아도 남북이 스스로 정해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정남일구라는 이름이 붙었다.≪세종실록≫에는 그 구조와 크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밑바탕의 길이가 1척 2촌 5푼의 이 해시계는 수평을 정확하게 잡기 위해서 물도랑과 둥근 못을 만들어 놓았다. 받침대의 양쪽에 기둥이 있고 거기에 地平環과 四遊環을 설치했다. 사유환에는 규형이 있고, 지평환에는 아래 쪽에 半周天環을 설치했다. 그리고 북쪽 축의 한 끝에 추를 매달아 기둥의 수직을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러니까 정남일구는 현주·천평일구의 특징과 간의의 일부를 하나로 해서, 그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북이 정해지면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든 매우 정밀한 해시계이다. 말하자면 간단한 간의가 달린 해시계인 것이다. 15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들 3가지 해시계는≪세종실록≫에 자세한 구조설명이 기술되어 있고, 그것들이 원의 곽수경 천문기기 중에서 본떠 만들었다는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세종 때 천문학자들의 발명품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곽수경이 제작한 천문기기 중에 이러한 해시계는 없다. 새로운 해시계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맑은 날이 많아서 해시계에 의한 낮시간의 측정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우리 나라 날씨의 특징을 세종 때의 천문학자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하려고 시도한 결과였다. 이렇게 해서 시간의 측정은 훨씬 쉬워지고 보편화되었다. 적어도 낮시간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언제라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계의 보급이 크게 늘어난 것은 조선 초기 사람들의 규칙적인 생활과 관료사회의 통제에서 시간에 의한 규범이 설정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해시계는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시간에 의한 규칙적인 생활규범을 자리잡게 했다.

 세종 때에 만들어진 또 다른 시계 중에 日星定時儀가 있다. 이것은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이른바 ‘밤낮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기’라는 색다른 시계이다. 시계라기 보다는 관측기기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 시계는 세종 때의 천문학자들이 매우 중요한 천문기기로 여겼던 것 같다.≪세종실록≫의 기사는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종 때에 만든 일련의 천문기기 제작사업의 완성을 말하는 세종 19년(1437) 4월 15일의 공식 기록은 일성정시의의 완성을 보고하는 글로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김돈이 지은 序와 銘을 인용하면서 그 제작 경위와 의의, 그리고 구조에 대한 설명을 매우 자세하게 쓰고 있다. 또 이례적으로 “≪元史≫에도 별로써 시각을 정하는 말이 있으나 그 측정하는 방법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에 밤낮으로 시각을 재는 기기를 만들 것을 명하여 그 이름을 ‘일성정시의’로 하였다”고 말해, 곽수경의 星晷定時儀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일성정시의는 적도와 평행하게 설치한 직경 2척의 원반에 周天度를 새긴 고리, 100각을 새긴 해시계 시반의 고리와 100각을 새긴 별시계 시반의 고리 등으로 이루어진 3개의 고리로 구성된 관측기기이다. 그래서 ‘밤낮으로 시간을 아는 기기’라고 했다. 곽수경의 성귀정시의를 밤낮으로 다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시계로 탈바꿈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밑받침대의 수평을 정확히 잡기 위한 물도랑과 못, 그리고 시표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서 기둥의 수직을 잡는 구슬추 장치 등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경복궁에 설치한 궁정용 일성정시의는 구름과 용을 장식하여 궁정 관측기기로서의 위용을 갖추기까지 했다. 용을 장식한 관측기기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모두 4벌을 만들어 하나는 경복궁의 안 뜰에, 나머지는 서운관 관측용으로, 또 함길·평안 두 도의 절제사 營에서 ‘군중의 경비하는 일’에 쓰게 했다.086)≪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Needham, J. et.al, 앞의 책(1986), 44∼64쪽.

 일성정시의는 세종 때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만들어 서운관에서 관측용으로 사용되었고, 각 도 감사의 청사에서 시간 측정용으로 쓰이게 했다. 또 휴대용으로 ‘小定時儀’라고 부른 축소된 모델도 만들어 시간 측정기기로 활용되었다. 지방에서는 이것을 써서 물시계의 오차를 교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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