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3. 물리학과 물리기술
  • 3) 수리기술과 기계장치

3) 수리기술과 기계장치

 조선초까지도 수리기술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둑을 쌓거나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태종 15년(1415) 벽골제를 다시 쌓는 데에는 9월에서 10월까지 1만 명을 동원했는데, 그 둘레가 77,406步, 길이가 60,843尺이며, 뚝의 아래 넓이가 70자, 위넓이는 30자, 높이는 17자였다. 수문 5개는 각기 13자인데, 이로 인해 9,840結의 논에 물을 댈 수 있었다.105)≪增補文獻備考≫권 146, 田賦考 6, 提堰. 전래의 가장 확실한 수리시설은 둑을 쌓고 관리·보수하는 일이었고, 이를 잘 해내기 위해 堤堰司가 있었다. 제언사의 보고에 의하면 중종 18년(1523) 현재 남쪽 지방의 제언수는 대략 전라도 900, 경상도 800, 충청도 500개소 이상이라고 되어 있다.106)≪中宗實錄≫권 46, 중종 18년 정월 경술.

 수리를 위해 어떤 기계장치를 이용한다는 의식은 그리 발달해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세종 때 庾順道는 ‘渴烏激水’의 방법을 써서 가뭄에 물을 끌어 올리는 실험을 실시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기록이 있다. ‘갈오’란 스포이드 같은 장치를 뜻하는 것으로, 즉 구부러진 관을 써서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려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3년(1431) 5월 유순도는 임금에게 건의해서 이 실험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임금에게 자기가 작은 대나무로 만들었을 때는 성공했는데, 이번에는 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모세관 현상을 잘못 오해해서 큰 관을 써도 물이 위로 올라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107)≪世宗實錄≫권 52, 세종 11년 12월 을미. 태조 5년(1396) 문과에 급제한 유순도는 세종 3년에는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일도 있고, 일찍이 태종 때에는 왕명으로 중국에까지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자로서 천문학, 의학분야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러나 아직 모세관 현상에 대한 이해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水車를 이용하자는 제안에 대한 처음 기록은 고려말 白文寶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공민왕 11년(1362) 密直提學 백문보는 중국에서는 수차를 써서 가뭄에도 쉽게 물을 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이익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며 수차 보급을 강력히 주장했다.108)≪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태종 7년(1407)에 이르러 사헌부의 지방 수령에 대한 권장 사항의 하나로 수차 보급을 들고 있다. 농민에게 수차를 제조케 하거나 만들어 보급한 성과를 수령의 공적으로 치라는 것이었다.109)≪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2월 을사.

 세종 11년(1429) 12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朴瑞生은 귀국보고에서 일본의 수차에 대해 보고하고, 그것을 대략 만들어 올려 보급하기를 권했다. 일본의 수차는 급류에 설치하면 저절로 움직이지만 물살이 느린 곳에서는 저절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력으로 운동을 도우면 될 것이라며 倭水車 보급을 주장했던 것이다.110)≪世宗實錄≫권 46, 세종 11년 12월 을미. 세종은 수차의 개량 보급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수차가 작동 즉시 물이 새어 관개 효과가 없음을 보고받자, 세종 13년 5월에 왕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모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수차가 왜 우리 나라에서만 사용되지 못하느냐고 묻고 관계자를 각 도에 파견하여 수차를 관리하게 하였다.111)≪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5월 경진.

 다음달 박서생은 전에 이미 보고했던 일본에서의 수차 이용의 예를 들면서 그 동안 수차의 제작이 잘못되어 사용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공조참의였던 그는 일본통신사로 갔을 때 그를 따라가 수차를 연구하고 온 金愼에게 수차 제작을 감독하게 하라고 건의했다. 그는 수차 제작의 네 가지 요체는 수차의 크기, 격수판의 크기, 물통의 크기와 간격, 물살을 세게 만드는 기술 등에 달렸다고 설명하였다. 설치한 지역에 따라 수차의 모양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 해 6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세종은 김신에게 수차를 만들어 시험해 보라고 명했다.112)≪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6월 을미.

 이렇게 만들어진 수차는 10월에 시험되었고, 그 결과가 기록되어 남아 있다. 왜수차와 吳致善이 만든 수차를 시험해 본 결과 왜수차는 관개용으로 사용할 만하지만, 오치선의 수차는 우물물을 길어올리는 데에나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보급을 권고받은 세종은 각 도에서 그 모양을 보고 스스로 만들어 내년 농사에 쓸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또 그 해 11월에는 왜수차와 함께 唐水車도 제작하도록 지시한 일도 있다. 세종 때 일본과 중국의 수차를 국내에 보급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연말에는 두 가지 수차의 제조 기술자가 경기·충청도에 1명, 전라·경상도에 1명씩 파견되었다.113)≪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0월 신유·11월 기묘·12월 병진.

 세종 16년 6월 왕은 세 왕자와 도승지 安崇善에게 藏義門 밖에 설치되어 있는 자격수차를 구경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안숭선이 좋다고 보고하자 임금은 자기도 한번 가 보겠다고 다짐했다.114)≪世宗實錄≫권 64, 세종 16년 6월 임자. 그러나 세종의 이런 노력은 그리 좋은 성과를 올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1년 뒤인 세종 17년 여름에 여러 도에 설치했던 수차를 없애라고 명한 것이다. 그 이유로는 하루에 길어올리는 물의 양이 너무 적고, 멀리 끌어올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닥달로 농민들의 원성을 사기 때문이라고 밝혀져 있다. 임금은 자원하는 곳에서만 없애지 말라고 지시했다.115)≪世宗實錄≫권 68, 세종 17년 6월 정미. 세종은 이런 실패가 백성들이 옛 것을 그대로 지키려고만 하지 새 것을 싫어하는 습성 때문이라고 못마땅히 여겼던 것 같다. 세종은 수차나 제언이 모두 농사에 긴요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守舊厭新’의 태도 때문에 보급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116)≪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9월 경진.

 문종 역시 수차의 중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으나,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117)≪文宗實錄≫권 10, 문종 원년 11월 임자. 성종 19년(1488)에는 중국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崔溥가 중국식 수차를 소개하고, 이를 감독해 직접 만들었으며, 연산군 2년(1496)에는 지방에 가서 수차 제작기술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118)≪成宗實錄≫권 217, 성종 19년 6월 병진 및 권 219, 성종 19년 8월 을미.
≪增補文獻備考≫권 146, 田賦考 6, 堤堰.

 연산군 8년에는 金益慶이 수차를 만들었지만 역시 크게 환영받지 못하였다. 승지가 김익경의 수차가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니 이를 본떠 보급하자고 건의하자 임금은 백성들이 쉽게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뭄에 수차가 어찌 크게 쓸모가 있겠느냐면서 가까운 지역에서나 실시해 보라고 했고, 결국 경기·충청 지역에서만 시험삼아 해 보도록 결정했다. 그 후 시험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초부터 계속 시험만 반복하였을 뿐이지 어떤 모델도 크게 성공했다는 증거가 없다.119)≪燕山君日記≫권 43, 연산군 8년 3월 을해·병자.

 명종 원년(1546) 4월에도 비슷한 노력이 있었다. 경연자리에서 시독관이 제주도 사람으로 琉球에 표류했다가 중국에 들어가 福建 지방의 수차를 배워 돌아온 사람의 경우를 들어 그 수차를 제작해 보급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나흘 뒤 호조에서는 크고 작은 수차를 만들었는데 서울에는 알맞는 물이 없으니 盤松池에서 시험할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다시 이틀 뒤에는 호조판서가 작은 수차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할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120)≪明宗實錄≫권 3, 명종 원년 4월 기유·계축·을묘.

 이처럼 조선 초기를 통해 수차는 끊임없이 제작되고 또 보급도 시도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효과가 대단하지 못했던 것은 여러 예에서 알 수가 있다. 어느 경우도 수차의 제작 보급 결과가 어떠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수차의 제작 보급이 새삼스럽게 시작된 것처럼 기록은 전한다. 수차 보급과 사용이 실제로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차 실패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수차는 그저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산발적으로 전수되고 실시되었을 뿐이어서 당시로서는 거의 사회경제적 의의가 없었다고 생각될 지경이다.121) 李光麟,≪李朝水利史硏究≫(韓國硏究圖書館, 1961), 93쪽. 또는 가난 때문에 농민들이 수차를 만들 여유가 없었고, 우리 나라의 지세와 자연조건 및 토양이 대체로 자연수로 만족할 만했으며, 가물 때는 어차피 수차를 쓸 수도 없을 정도였다는 등의 원인을 들기도 한다. 또 수차에 사용할 알맞는 목재가 부족했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122) 全相運, 앞의 책, 176∼177쪽. 여하튼 조선 전기 동안 수차에 대한 기술상의 변화는 별로 일어난 일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수차기술은 농업 기술로써 대단히 중요할 뿐 아니라 어떤 사회의 기계기술, 자료기술,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물리적 지식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조선사회는 별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세종 때 蔣英實이 만든 自擊漏와 玉漏는 물시계 내지 천문시계장치로서 중요한 것이지만, 그 기계적 특징에서 보자면 기계장치의 중요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격루의 기본 장치는 말하자면 자동제어 시스템이어서 그 구조와 작동이 아주 복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비슷한 유물·유적이 남아 있지 않고, 작동을 설명하는 상세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오늘날 그 상세한 구조와 작동원리는 지금 전혀 짐작하기 어려운 형편이다.123) 남문현,<세종 자격루의 보시 시스템에 관한 연구>(≪한국과학사학회지≫11, 1989), 19∼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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