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1. 농업과 농업기술
  • 1) 농업과 그 환경
  • (2) 인구와 농업노동력

(2) 인구와 농업노동력

 조선 전기 농민들의 계급구성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 시대의 인구와 농업노동력이 어떠했는지 파악해야 한다. 먼저 조선 초기(1392년)의 인구를 약 555만 명 정도로 보고, 조선 전기의 인구증가율을 전근대사회에서는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치인 약 0.47%였다고 추정한 연구가 있다.155) 권태환·신용하,<조선왕조 시대 인구추정에 관한 일시론>(≪東亞文化≫ 14, 1977). 그에 비해 최근의 연구에서는 1392년의 인구가 대략 750만 명이었는데, 이 인구가 선조 25년(1592)경에는 1,012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므로 그 성장률은 0.15∼0.2%였다고 추정하였다.156) 李鎬澈 외,<朝鮮時代의 人口規模 推計(Ⅰ,Ⅱ)>(≪經營史學≫ 2·3, 1988). 이처럼 비교적 정확한 추정이 가능한 1910년의 인구수 약 1,750만 명과 비교할 때 조선 전기의 인구는 그 절반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이로 보아 조선 전기는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았음이 분명하다. 최근의 추정에 의하면, 농경지 1ha당의 인구밀도는 2.19명으로, 이는 조선 후기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었다.157) 이영구,<17·8세기 인구규모와 그 변동의 특질>(慶北大 碩士學位論文, 1988). 더구나 조선 전기의 인구밀도는 지역간의 격차가 매우 컸는데, 특히 명종 5년(1550)경 下三道의 인구밀도는 2.46인으로, 다른 지역의 인구밀도 2인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었다.

 다음으로 조선 전기 인구의 계급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조선 전기 인구 중에서 농민은 적어도 전체 인구의 85% 이상을 차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초에 국가가 파악한 호는 평균적으로 자연호 3戶가 하나의 法制戶를 이루는 編戶였으며, 당시 호구통계에 나타난 口는 男丁만을 의미하였다.158) 李鎬澈,<戶口와 農業勞動力>(앞의 책), 288∼293쪽.
金載珍,≪한국의 戶口와 경제발전≫(博英社, 1967), 39∼45쪽.
또한 현존하는 호적 가운데 조선 전기에 가장 근접한 숙종 16년(1690)경의 大邱府 호적을 살펴보면, 이 시대 이 지역의 계급구성은 양반호·평민호·노비호가 각각 9.2%, 53.7%, 37.1%로 이루어져 있었다.159) 四方博,<李朝時代の都市と農村とに關する一試論 -大邱戶籍の觀察を基礎として->(≪京城大學法學會論集≫12-3·4, 1941). ‘양반호의 증가’ ‘노비호의 감소’라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변화과정을 거꾸로 추정할 때, 조선 전기의 인구는 이보다 훨씬 적은 양반호와 훨씬 많은 노비호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상당한 규모의 양인호도 존재하였을 터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적어도 전체 인구의 40∼50%를 넘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조선 전기 농업노동의 상당 부분이 노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최근에 조선 전기 노비의 존재형태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들이 조금씩 진행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分財記를 중심으로 한 고문서의 분석 결과 이 분야에 대한 오랜 통설들이 허구임이 증명되고 있다.160) 金安淑·李鎬澈,<朝鮮前期의 農莊經營과 奴婢>(≪經營史學≫ 1, 1986).
김건태,<16세기 재지사족의 농장경영에 대하여>(≪成大史林≫ 7, 1991).
이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노비들은 率居奴婢가 外居奴婢보다 많았다. 또한 이들 솔거노비들은 비록 主家의 강한 경제적·신분적 압박을 받았지만, 지금까지의 통설로 이해해온 것처럼 그 모두가 ‘家內使喚奴婢’적 존재로만 구성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즉 양반사대부가가 소유한 노비가 적으면 수십 명이었고 많을 때는 수천수백 명에 달하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가내사환적인 존재일 수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솔거노비들은 主家의 농장 주변에 거주하면서 “제한된 형태나마 자기의 독자적인 경영을 가지면서 수시로 부역노동만을 제공하는 형태”인 率下奴婢가 지배적이었다.161) 李鎬澈,<農莊과 小農民經營>(앞의 책), 452∼458쪽. 그러므로 독자적인 자기의 농업경영을 가지면서 주가에 身役으로서의 부역노동을 주로 제공하였던 솔거노비가 바로 조선 전기 노비의 주류였던 셈이다. 한편 주가에 身貢이란 이름으로 그들의 잉여생산물을 제공하였던 외거노비들도 奴婢佃戶(佃戶的 奴婢)·노비자작농·노비지주 등의 여러 형태로 존재하였다. ‘조선 전기 노비의 전형’이라고까지 지칭되었던 이 노비전호의 수나 비중은 실제에 있어 생각보다 작았다고 여겨진다. 솔거노비가 전체 노비의 70∼80%를 차지하였던 상황에서 외거노비의 한 유형인 노비전호가 갖는 비중은 작을 수밖에 없었으나, 의외로 노비 자작농이나 노비 지주의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선 전기(1392∼1592)의 인구는 대략 학자에 따라 550만∼1,374만 명, 또는 750만∼1,012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이들 인구는 농업생산 및 조세·부역 때문에 국가에 의해 편호의 형태로 묶여 있었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비중이 비교적 컸는데, 그 주류는 자기의 경영을 가진 채 주인의 집에 부역노동을 제공하였던 솔거노비였고, 외거노비로서 타인의 토지를 소작하였던 노비전호가 그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외에도 양인자작농·양인전호·양인지주 등 양인신분의 농민도 함께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조선 전기 농업노동력은 보다 집단적으로 존재하였으며, 개별적·자립적인 성격은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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