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1. 농업과 농업기술
  • 2) 농업기술
  • (4) 시비법

(4) 시비법

 동아시아지역의 시비법은 처음에 糞種·糞科라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시비하였던 데서 점차 농경지 전체를 시비하는 糞田이란 시비법으로 발달하였다. 이 시비법의 발달사 가운데서 조선 전기의 시비법이 어떠한 위치를 점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수전농업에서의 시비법을 살펴보면 客土와 草木肥가 비료로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初耕과 再耕의 사이에서 시비되었다. 이른바 수전에서는 물이 담겨 있는 상태에서 분전되었다는 특징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객토와 초목비를 중심으로 한 시비가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척박한 열등지에서는 糞이나 牛馬糞, 누에똥 등 충분히 부숙되지 못한 비료들도 시비되었다. 다시 말해 수전에서의 분전은 犁耕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진행되었는데, 초경된 수전의 저습한 토양에 완전히 부숙되지 않은 비료를 넣어 쟁기질함으로써 골고루 시비하는 효과뿐 아니라 부숙을 촉진하는 효과도 함께 추구하였던 것이다.198) 林和男,<朝鮮農業技術の展開>(≪朝鮮史叢≫ 4, 1980).

 또한 한전농업에서의 시비법은 초경 전후의 시비법, 그리고 파종시와 파종 후의 시비법으로 나뉘어진다. 전자의 경우에 행해진 시비법은 녹두·팥 등 綠肥作物을 이용한 肥田法과 무성하게 난 잡초만을 쟁기로 갈아엎어 시비하는 掩耕法이 있었다. 또한 후자의 경우에는 산림개간지와 윤작으로 지력이 소모된 한전에 행해진 세 종류의 火耕法이 존재하였다. 또한 한전에서 가장 많이 시비가 행해진 때는 ‘파종할 때’였는데, 이 때에는 糞種法과 種子相和法, 그리고 분종의 일환으로 종자를 액체형태의 비료에 담그는 漬種法 등의 시비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다 발달된 형태의 시비법으로서 파종 후에 추가로 비료를 주는 追肥法이 행해진 경우는 삼밭과 보리·밀밭의 두 사례에서만 발견된다.199) 李鎬澈, 앞의 책, 198∼204쪽. 이 때 각각 우마분과 외양간거름이 주요한 비료로서 사용되었는데,200)≪農事直說≫ 種麻.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시비법이 여전히 조방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많이 행해진 분종을 중심으로 살펴보아도 이 시대에는 주로 열등지만을 중심으로 시비가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삼밭에서는 최우등지의 경우에도 계속적으로 파종 전후에 우마분을 농지 전체에 시비하였는데 이러한 발전적인 시비법은 16세기의 농서인≪農書輯要≫ 단계에서 더욱 보편화되어 나갔다고 생각된다.201) 李鎬澈, 앞의 글(1990).
林和男, 앞의 글.

 이처럼 이 시대에는 비옥한 우등지에는 거의 시비를 행하지 않았고 척박한 토지를 중심으로만 여러 종류의 비료가 제한적으로 시비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결국 부족한 비료사정 때문에 전체 농지에 시비하는 糞田法보다는 종자에 대해서만 시비를 행하는 糞種法이 널리 성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시비법은 우등지를 더욱 집약적으로 경작하는 집약농법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경작의 외연적 한계를 넓히는 조방적인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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