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1. 농업과 농업기술
  • 3) 농업기술의 성격

3) 농업기술의 성격

 이상의 분석을 종합하여 조선 전기 농업기술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이는 곧 당시의 농업에 있어 각 생산요소와 제반 농업환경간의 결합형태를 밝힘으로써, 노동기술과 재배기술로 구성된 농업생산력 수준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농업생산력의 성격이 토지생산성 중심의 집약농법이었는지 노동생산성 중심의 조방농법이었는지, 부역노동에 기초한 대농법이었는지 가족노동에 기초한 소농법이었는지, 그리고 중국 하북지방의 건조지 농법과 같았는지 아니면 강남지방의 습윤지 농법이었는지에 대해서 각각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205) 李鎬澈,<農業史的 性格>(위의 책), 688∼716쪽. 그러나 이러한 여러 종류의 견해들은 보다 실증적인 측면에서 검증되고 평가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농업경영규모에 대한 성격규명에서 분명해진 것은≪농사직설≫의 농법이 다량의 축력을 기반으로 한 노동생산성 중심의 노동절약적·토지집약적 기술에 근거한 조방적인 대농법이었다는 사실이다.206) 이호철,<조선시대의 농업사>(≪한길역사강좌≫ 5, 한길사, 1987).
―――,<조선전기 농가와 농업경영 -새로운 논쟁사적 접근을 중심으로->(≪한국의 사회와 문화≫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그리고 이 대농법과 함께 이에 대칭되는≪금양잡록≫농법이라는 토지생산성 중심의 소농법이 공존하였다는 점이 명백해졌다.207)≪衿陽雜錄≫의 농법을 소농민의 농법으로 인식하는 연구는 金容燮의 연구에서도 엿보인다(金容燮,≪朝鮮後期農學史硏究≫, 一潮閣, 1988). 그렇지만 전자의 높은 생산성에 비하여 후자의 그것은 축력과 노동수단, 그리고 생산수단의 이용 등 여러 측면으로 보아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농업기술의 측면에서≪농사직설≫ 농법을 시비법에 근거하여 분석해 보면, 이는 人糞의 糞田을 주체로 한 강남농법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이른바 ‘인분은 비료로서 좋으나 많이 얻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토지에 비해 인구가 비교적 적으며 보다 노동절약적인 조방농법이었기 때문이다.208) 주 25)에서 설명한 바처럼 조선 전기에서 人糞은 누에똥과 같이 많이 얻을 수 없는 비료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는 보편적인 비료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곧 토지에 대한 인구비율이 조선 전후기간에 달랐음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라고 하겠다. 또한 농구체계란 측면에서 살펴보면≪농사직설≫의 농법은≪제민요술≫에서 나타난 漢·六朝期의 화북지방 파종법과 비교하여 두 마리 소를 기본적인 견인 동력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犁-畜力整地具-畜力覆種具-畜力中耕器’란 일관체계를 일단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그렇지만 산지나 경사지가 많다는 한국 특유의 지형조건 때문에≪농사직설≫은 그 보조수단으로 보다 많은 인력농구를 함께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축력농구와 인력농구의 적절한 결합은 곧 이 시대≪농사직설≫ 농법의 고유한 특성이었는데, 그와 같은 농작업에는 단순협업적인 노동조직이 동원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世宗實錄地理志≫의 통계를 살펴보면, 戶當口數가 5구 이상으로 많은 군현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가장 많이 분포되었고 평균적으로 하삼도의 호당구수는 약 4.2구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적인 분석을 통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이 시대 하삼도의 평균적인 호당 가족수가 16.8인에서 21.0인에 달할 정도로 많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호당 경작면적이 9.056결이나 되었다는 점에서도 널리 확인된다.

 이 밖에도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농서였던≪농사직설≫의 농법이 대농법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많다. 단적인 예로 만약≪농사직설≫의 농법이 집약적 소농법이었거나 중국 송대의 강남지방 농법에서처럼 분전의 형태로 시비를 행하였다면 그 당시의 한전은 매우 비옥하였을 것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수전농법의 경우 만도가 주로 수경 및 건경법으로 재배되었던 열등한 수전이 광범위하게 분포하였을 뿐 아니라 산림지·습윤지를 수전으로 개간하는 기술이 중요하게 취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전농법의 경우에도 ‘1년 1작’식의 한전과 더불어 휴한전도 널리 잔존하였고 이들 토지의 비옥도도 중등전이 가장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세종실록지리지≫를 이용한 토성분석에서도 ‘肥瘠相半’이 가장 많았던 점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종 26년(1444)에 일단 확립된 貢法에서는 새로이 田品을 6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에는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넓은 면적의 열등지·신개간지라고 보이는 5등전과 6등전이 포함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되어야만 한다.209) 李鎬澈, 앞의 책,<표 4> ‘貢法에서의 田品 재편성’ 참조. 이처럼 조선 전기에서는 토지생산성보다는 노동생산성이 더욱 크게 발전하였으므로 종래 耕境 이하의 토지가 이제 새로이 농경지로 편입되었던 게 아닐까 한다.

 한편 파종작업에 있어≪농사직설≫은 일부 ‘足種’된 高田作物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전작물들을 條播法에 의해 파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파법은 특히 作條犁로 길다랗게 만들어진 파종구에다 손으로 파종한 뒤, 축력 및 인력을 이용하는 여러 복종구로 흙을 덮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와 같은 파종법이야말로 두둑을 만든 뒤 파종구를 작성하여 點播하는 보다 노동집약적인 파종법이었던 足種法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대농법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로 보아≪농사직설≫농법은 단순 협업조직의 집단노동에 바탕을 둔 대농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양반사대부층이 행하였던 농장경영만이 유일하게 그러한 대농법을 널리 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중소지주층 출신의 신흥사족층을 이 시대의 농업발전의 주역으로 간주해온 기존 학계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양반사대부층의 농장경영은 토지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집약농법이기보다는 당시의 부족한 노동력으로 넓은 농경지를 경작하기 위해 주로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조방농법에 역점을 두었음이 분명해진다.

 한편 이 시대의 농업기술의 성격은 이미 밝힌 것처럼 건조지(화북) 농법과 습윤지(강남) 농법의 융합이란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전이 전체 농경지의 70∼80%에 달하였던 이 시대에는 봄가뭄 극복을 위한 농법에 주안점이 주어진 건조지 농법이 지배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와 같은 조선 전기의 건조지 농법은≪제민요술≫에서 나타나는 그것에 비하여 상당히 다른 한국적 특징을 가졌음도 물론이다. 이와 같이≪농직직설≫의 농법으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의 선진농법은 기본적으로 축력을 기반으로 한 노동생산성 중심의 조방농법, 단순 협업조직의 집단노동에 의한 대농법, 그리고 화북지방의 그것과 유사한 한국 특유의 건조지 농법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李鎬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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