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2. 인쇄기술
  • 4) 서적의 인쇄
  • (1) 관판본

(1) 관판본

 고려시대의 서적인쇄는 지방관서에 명령하거나 권장하여 책판을 판각하고 이를 중앙의 秘閣과 書籍鋪(店)에 보내어 관리하면서 책을 찍어 유통하는 인쇄정책을 취해 왔다. 주자인쇄는 중앙의 서적포가 직접 책을 찍어 유통시키는 인쇄정책을 썼던 것이나 원나라에 의해 굴욕적인 억압정치가 자행되면서 인쇄기능이 마비 또는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말기에 이르러 중원에서 신흥세력인 명이 일어나 원을 북쪽으로 몰아냈고, 우리 국내에서도 배원사상이 싹트고 주권의 복구의식이 대두되었다. 그 때 우리 학계에서는 이전처럼 중앙의 서적포에 주자를 마련하여 경·사·자·집의 여러 주제분야 서적을 고루 찍어 그 동안 위축되었던 학자들의 독서를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강력하게 제기되었다.244) 鄭道傳,≪三峯集≫권 1, 置書籍鋪詩並序. 그 결과 공양왕 4년(1392) 정월에 주자인쇄가 제도상으로 다시 부활되기에 이른 것이다.245)≪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書籍店. 그러나 곧 조선이 건국되는 바람에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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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0>세종 28년(1446) 개판의 관판목판본≪훈민정음≫
<도판 10>세종 28년(1446) 개판의 관판목판본≪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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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관제를 답습하여 문적과 도서를 관장하는 校書監과 고려말에 부활시킨 書籍院을 설치하여,246)≪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인쇄업무를 맡아 보는 令과 丞을 두었다. 그렇지만 건국초라 그 토대가 아직 잡히지 않았고 또 漢陽 천도와 2차에 걸친 왕권을 둘러싼 혈육간의 싸움(왕자의 난)이 계속되어, 그 사이에는 아주 긴요한 책에 한하여 손쉽게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냈고 부수가 많이 필요한 것은 목판으로 인쇄하여 겨우 그 수요를 충당하였다. 왕조의 기틀이 안팎으로 안정된 것은 태종 때였다. 태종은 崇儒優文政策을 적극 펴기 위해 서적원의 제도를 본따서 동왕 3년(1403)에 주자소를 설치하고 銅으로 癸未字를 주조하여 중앙관서에서 서적인쇄를 시작하였다.247)≪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2월 경신.
權近,≪陽村集≫권 22, 權近鑄字跋.
이어서 세종은 동왕 2년(1420)에 계미자의 개량에 착수, 다음해 庚子字를 주조 완료하여 주자인쇄술을 크게 개량·발전시켰다.248)≪世宗實錄≫권 11, 세종 3년 3월 병술.
徐居正,≪東文選≫권 103, 卞季良鑄字跋.
그리고 동왕 16년 주성의 甲寅字에서는 창의적인 개량으로 더욱 발전시켜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을 명실공히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249)≪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정축.
≪大學衍義≫甲寅字本 卷末, 金鑌鑄字跋.
더욱이 특기할 것은 이 무렵 한글 동활자를 처음으로 부어내서 갑인자와 병용하여 국한문책을 찍어낸 점이었다. 이들 활자로 찍은 책을 볼 때 갑인자는 유려하게 운필된 筆書體이고 한글활자는 강직하게 직선으로 그은 印書體인데,250)≪月印千江之曲≫(國漢文本).
≪釋譜詳節≫(國譯本).
양자가 서로 늠름하고 조화있게 조판되어 찍혀진 판면은 참으로 우아정교하여 우리 나라의 금속활자본 중 백미임을 자랑할 만하다.

 그 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중앙관서는 실로 숱한 종류의 활자를 만들어 여러 분야에 걸쳐 필요한 서적을 찍어 1차적으로 각 관서와 서원,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고려시대의 관판인쇄정책과 비교하여 크게 다른 점의 하나였다.

 활자인쇄는 한번 활자를 만들어 놓으면 필요한 책을 수시로 경제적으로 손쉽게 찍어 공급할 수 있음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출부수에 제한을 받았고 또 한번 찍으면 해판되기 때문에 다시 인쇄할 수 없는 것이 큰 단점이었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다량의 서적 공급이 필요한 경우는 목판인쇄가 필요하여 국초부터 병행 실시되었다. 더욱이 조선왕조는 숭유우문정책을 적극 실시하기 위해 유교경전을 비롯한 역사·시문의 서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간행 보급하여야 했기 때문에 필요한 책을 1차적으로 중국에서 도입하거나 주자소에서 활자로 찍어내어 그것을 다시 새기거나 또는 번각하여 책판을 잘 간직하면서 필요한 부수를 수시로 찍어 널리 공급하였다.

 목판인쇄가 활기를 띤 것은 세종이 즉위한 때부터였다. 세종 원년에 명나라에서 거질의 永樂版≪性理大全≫·≪四書大全≫·≪五經大全≫을 수입하였다.251)≪世宗實錄≫권 6, 세종 원년 12월 정축. 이 대전들은 종래의 여러 주석을 종합하여 엮은 새로운 관찬서로서 가장 권위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벌을 더 명나라에 청구하여 입수한 다음, 충청·전라·경상도 관찰사에게 책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252)≪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0월 경진. 한편 경상도·강원도·전라도에 명을 내려 번각케 하여 그 책판을 校書館이 받아 관리하면서 찍어 널리 공급하였다.253)≪世宗實錄≫권 37, 세종 9년 7월 갑진.
≪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3월 임진.
교서관은 한때 典校署로 개칭되기도 했지만, 중앙관서의 인쇄업무를 주관하였다.

 목판인쇄는 주자소에서 맡기도 했다. 그리고 奎章閣이 설치된 이후에는 본원인 내각이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특정 분야의 서적은 그 용도에 따라 여러 관서, 즉 觀象監·司譯院·春坊(王世子侍講院)·宗簿寺·內醫院·掌樂院·訓鍊都監·成均館 등이 직접 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중앙관판본은 대체로 새김이 정교하고 인쇄가 깨끗하여 책의 품이 한결 특출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중앙관판본은 처음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지방관서에 명하여 판각 진상케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앙의 인쇄업무 담당관서와 특수관서가 직접 필요한 책을 엮어 간행하거나 선정간행하여 공급했다. 이 점이 고려시대의 관판인쇄정책과 비교하여 크게 다른 점이었다.

 한편 지방관서의 목판인쇄도 국초 이후 꾸준히 활기를 띠며 진행되었다. 중앙관서에서 보내오는 활자본은 물론이고 자체에서 필요하여 입수한 책을 수시로 판각하고 그 책판을 오래 잘 간직하며 필요한 자들이 언제라도 찍어내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 전기에 전국의 각 지방관서가 새겨낸 책판은≪攷事撮要≫의 八道程途 주요 지명 아래에 간략서명으로 등재되어 있다.≪고사촬요≫의 편찬은 명종 9년(1554) 魚叔權에 의해 이루어진 뒤 수차의 교정증보를 거쳐 선조 18년(1585) 許篈에 의해 속찬되었다. 이것을 보면 8도의 지방관서가 새긴 책판은 980종이며, 그 판각의 상한시기는 국초까지 소급된다. 물론 누락된 것이 적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16세기 이전 지방관서에서 간행된 서적을 조사하고 고증하는데 유일한 서지자료이므로 지방판본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된다.254) 李仁榮,<攷事撮要の冊板目錄について>(≪東洋學報≫30­2, 1943).
千惠鳳,<攷事撮要解題>(≪圖書館≫27­8, 1972).
金致雨,≪攷事撮要의 冊板目錄硏究≫(民族文化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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