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2) 사림파의 한문학
  • (2) 사림파의 품격론

(2) 사림파의 품격론

 ‘溫柔敦厚’는 李滉이, ‘優柔忠厚’는 李珥가 중점적으로 강조한 문학의 지표였다. 品格은 風格과 같은 말이지만 우리 선인들은 풍격보다 품격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 것 같다. 조선 전기 한문학에서 논의된 품격은 주제의식과 形象意識을 포괄하는 미학용어인데 반해, 요즘의 한문학 연구는 주제론에 경사되어 있다. 주제론이 학계에 기여한 공적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되지만, 이제는 진일보하여 미의식의 토대 위에서 주제론이 전개될 때가 되었고, 아울러 우리가 거의 도외시하고 있었던 형상의식도 심도있게 논의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주제의식과 형상의식을 미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함께 검토해야 하는 당위성은, 수레의 바퀴가 적어도 두 개인 사실에 비견된다. 한국 한문학도 지금부터는 품격론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품격론은 성정미학의 하위 영역이다. 이황은 ‘冲澹蕭散’의 품격 용어를, 이이는 ‘온유돈후’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은 흥미를 끈다. 이 점은 이황·이이 양현의 문학관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이가 온유돈후를 몰랐을 리 없고 이황이 충담소산을 몰랐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 용어를 가급적 기피한 이유는 소아적 발상이 아니라, 문학의 정당한 세포분열로서의 심화 확충의 의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림파문학의 맥락과 융기는 이황·이이에 의해 양대 산맥으로 양분되어 더욱 활발하게 펼쳐졌다. 분파작용을 덮어놓고 蛇蝎視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분파는 세포분열로서 영역의 확장을 가져온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품격론은 중국 唐代의 可空圖에 의해 ‘詩品 二十四則’의 확실한 논리로써 제시되었다. 사공도의 품격론은 우리 나라에 일찍이 유입되어 읽혔던 것 같다. 그의 24시품은 송대 嚴羽의 ‘妙悟說’과 청대 王士禎의 ‘神韻說’의 모태가 되었다. 사공도의 24시품은 이황·이이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이에게 보다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한다. 이이가 第一格으로 삼은 충담소산은 사공도의 冲澹과 접맥되어 있다. 온유돈후가 동양의 가장 오랜 고전적 품격인데 반하여 충담소산은 당시로서는 참신한 인상을 주었던 품격으로 생각된다. 온유돈후가 충담소산의 품격보다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아니다. 온유돈후는 사림파문학의 기본 틀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보수운운의 의미로 파악할 수는 없다. 이황이 온유돈후의 품격으로 일관했다고 본다면, 이이는 얼마간 다양한 면모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황·이이 이후,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사인들의 문학양상이 변별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품격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南人으로 통칭되는 퇴계학파의 문학이 이념적인 면이 강한 것도 온유돈후의 품격과 관련이 있다. 온유돈후의 주제의식은 시를 통한 성정의 순정과 계몽의식 및 用事의 적절한 구사 등으로 발현되었다. 이황은 고려가요를 비롯한 민중가요와 당시의 한시가 온유돈후의 품격이 부족함을 개탄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430) 李滉,≪退溪全書≫陶山十二曲跋.

 시는 言志 또는 言學의 주제의식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는 주제영역의 경계설정은 퇴계학파의 변함없는 지표가 되었다. 퇴계의 모든 작품이 성리학적 志와 주자학을 지칭한 學만을 형상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서정시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퇴계문학의 핵심은 성정미학에 기틀을 둔 인간 감정의 최고 정수의 하나인 지에서 찾아야 한다. 지를 시 속에 형상한다는 퇴계의 주장은 역사가 오랜 전통적 시의식이다. 이황은 언지라는 해묵은 시의식을 새로 단장하여 16세기 조선 사단에 유포시켰다. ‘溫古而知新’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전통적인 시의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고양하는 과정에서, 동양 사단의 가장 오랜 온유돈후의 품격이 찬연한 광휘가 발휘될 것은 당연하다. 온유돈후의 품격의 구체적 실상을 구명하기는 쉽지 않다. 이황의 門人 鄭惟一은 스승의 詩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 글에서 16세기의 士人들이 이미 주제론에서 벗어나 품격론을 개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주제파악에 매달려 이것만이 실증적이며 가치있는 연구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일군의 학자들과는 雲泥의 격차가 있다.

선생은 시 짓기를 즐겨했고,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朱子의 시에 심취했다. 선생의 시는 처음에는 淸麗에 치중했지만, 얼마 후 화려하고 미려한 꾸밈을 제거시켜 한결같이 典實하고 장중하고 簡淡한 것으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또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 六經에 근본을 두고 諸子는 참고로 했다. 華와 實이 서로 겸비하여 文質이 중정에 부합되었다. 雄渾하면서 典雅했고, 淸健하고 和平했다. 요컨대 그 귀착점은 粹然하여 하나같이 正에서 나왔다(李滉,≪退溪全書≫言行錄, 권 1, 言行通述).

 정유일은 이황의 시와 문을 평하면서 이미 당당한 품격론을 전개하고 있다. 사공도의 24품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와 약간의 변화를 준 어휘로 구분된다. 雄渾과 典雅는 전자의 경우이다. 정유일은 사공도의 품격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특히 웅혼은 사공도의 제일 품격이다. 웅혼의 품격은 탁월한 재주와 뛰어난 학문이 없으면 성취가 불가능한 것으로, 산문에는 오로지 莊子와 司馬遷, 시에는 오직 李白과 杜甫만이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431) 洪瑀欽,≪漢詩韻律論≫에 수록된 詩品集解 참조. 정유일은 스승 이황을 평하여, 시는 이백과 두보에 필적하고 산문은 장자와 사마천에 비견된다고 격찬했다. 정유일은 주제론에만 치중하지 않고 ‘華實’의 양면을 강조했다. 화는 수사학이요 실은 주제론으로 간주된다. 실의 경우는 유가문학의 중요한 부문으로, 환상과 초세속의 관념이 아닌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이라고 풀어진다. 꽃과 열매는 공존해야 한다. 꽃만 탐스럽고 열매 한 알 맺지 못하는 모란과, 꽃은 볼품없으나 과일은 튼실한 사과나무는 모두가 값진 것이다. 열매를 달지 못하는 모란을 뽑아버려도 안되고, 꽃이 보잘것 없다고 사과나무를 베어서도 안된다. 정유일은 이 둘을 긍정하면서 이황은 화실을 겸비한 작가라고 격찬한 것이다. 주제의식과 형상의식을 함께 긍정하는 객관적 문예의식이 16세기 사단에 통했다는 사실은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정유일이 지적한 퇴계 시문의 품격 전아는 高古의 품격이 지닌 약점을 보완하여 고상한 운치와 예스런 색채를 주로 한다. 蘭亭과 金谷, 洛杜와 香山에 모인 명사들의 풍류가 눈앞에 전개되는 듯한 면모가 있다는 것이다. 웅혼의 품격이 지닌 호방성에 전아가 어울린 시문이면 여기에서 더 나아갈 바가 없다. 위의 인용문에는 품격과 관계있는 淸麗·典實·莊重·簡淡·淸健 등의 단어들이 열거되었다. 수사학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剪去華靡는 문장의 조탁이나 화사한 꾸밈을 배제한 것으로 간담과 연결된 것이다.

 온유돈후는 시를 통한 교육 또는 교양을 고취시키는 시의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황에 있어서 온유돈후는 교육적·계몽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격조는 온유하고 돈후하게 형상화되었고 내용 역시 은근하게 스며있어 쉽게 간파되지 않는 부문이 많다. 시의 주제는 외물의 긍정적인 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유일은 이황의 시를 평하여 하나같이 ‘正’에서 나왔다고 했다. ‘정’은 ‘性情之正’의 준 말이다. 퇴계 시가문학에 있어서, 그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山水詩이다. 특히 은거지 도산서원 주변의 강호를 작품 속에 의욕적으로 형상시켰다. 퇴계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황이 하나의 세계로 인식했던 陶山의 산수를 제재로 한 작품의 고찰은 필수적이다. 이황은<陶山雜詠>에서 장문의 記를 짓고 18絶의 7언시와 26절의 5언시를 남겼고, 유명한 단가 陶山十二曲을 창작했다. 이로써 보건대 온유돈후의 품격은 산수시를 통하여 보다 적의하게 구현될 수 있는 듯하다. 도산의 산수는 상당 부분이 이황의 사유재산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느 산수보다 더욱 애정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는 산수시가 온유돈후의 품격과 잘 부합된다는 면만을 우선 지적해둔다. 퇴계의 시풍에 대해서 문인들의 평을 몇 가지 더 제시하여 온유돈후의 구체적 실상에 대해 좀더 검토하겠다.

선생은 시 짓기를 즐겨하여 평생을 두고 공력을 경주했다. 선생의 시는 勁健하고 典實하여 화려하고 현란한 꾸밈이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無味하게 보이지만, 읽을수록 더욱 좋아하게 된다. 일찍이 선생께서 ‘나의 시는 枯淡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다. 그렇긴 하나 애쓰고 심사숙고하여 창작한 까닭으로 처음에는 냉담하게 여겨지지만 오래 볼수록 깊은 뜻이 있다’라고 하셨고, 또 이르기를 ‘시는 학자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아니지만, 경관을 만나서 흥이 일어나면 시가 필요하다’고 했다(李滉,≪退溪全書≫言行錄, 권 5, 類編).

 이황은 자신의 시를 일러 ‘枯淡’이라고 규정했고, 문인들은 스승의 시세계를 ‘勁健典實’하고 ‘不衒華彩’하다고 평했다. 경건은 사공도의 시품에 나오는 품격의 명칭이다. 고담과 경건은 서로 모순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언뜻 부합되지 않는 상충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경건은 洗鍊의 품격이 잘못 적용되어 나타날 수 있는 주제의 무기력과 형상의 나약을 지양한 것이다. 세련은 사공도의 시품 典雅 다음에 나오는 품격이다. 정유일은 앞서 퇴계시의 품격을 ‘雄渾而典雅’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16세기에 이미 품격론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품격 세련은, 외물의 청결은 洗濁을 해야 얻어지고 외물의 정미로움은 鍜鍊을 거쳐야 되기 마련인데, 품격 세련의 洗와 鍊은 이같은 의미를 취한 것이다.432) 司空圖,≪二十四詩品≫詩品集解. 품격 세련은 자칫 문장을 조탁이나 분식으로 꾸며서 발랄한 패기를 상실케 할 소지가 있다. 세련 다음에 경건을 배치한 사공도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 퇴계시의 품격을 경건이라고 평한 점은 주목된다. 사인이 景物을 만나서 우러난 성정을 興적인 미의식으로 형상해야 한다는 이황의 시의식을 문인들이 웅혼·전아·경건의 품격으로 규정한 듯하다. 이황이 자신의 시를 고담이라 자평한 것은 그의 확고한 품격의식에 근거한 것이다. 고담은 이황의 경우 주제의식보다 형상의식에 보다 비중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황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부각시킨 온유돈후의 품격 속에 웅혼·전아·경건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틀림이 없다. 위의 용어는 사공도의 24품에 들어 있는 것이고, 여타의 많은 용어들에서도 품격론과 상관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담을 위시해서 간담·청려·전실·청건 등의 어휘들 모두가 품격론에 포용되는 것들이다. 품격론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품격론에 사용된 용어의 의미망을 천착해야 한다. 이들 용어는 미학적 논리를 깔고 있기 때문에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중국측의 자료들을 섭렵할 필요가 있지만, 관계문헌들이 호한하여 난감하게 느껴지긴 하나, 그렇다고 이를 마다할 처지가 아니다. 중국측 자료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기록물도 가히 汗牛充棟이다. 시비평 정도로 범범하게 규정된 방대한 광맥 중에서 그 정수에 해당되는 품격론의 연구부터 우선 시작해야 한다고 제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 한문학, 다시 말하면 穆陵盛世의 한문학은 이황·이이의 문학과 그들의 품격론을 고찰하면 그 근간을 알 수가 있다. 實學派 지식인이 등장하기까지는 위 양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황뿐만 아니라 이이 역시 참신한 품격론을 사단에 제시했다. 이이는≪精言玅選≫의 序와 總叙를 통하여 품격론을 체계화시켰다.≪정언묘선≫은 중국 한시를 ‘元·亨·利·貞 仁·義·禮·智’의 8편으로 분류한 시선집이긴 하나, 분류의 척도를 품격론으로 했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 나라의 작품이 한 수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유감이지만, 중국문학의 방대한 품격론을 소화하여 조선 사단에 제기한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정언묘선≫은 후학들에게 필사되어 상당히 넓게 유포된 흔적이 남아 있다.433)≪精言玅選≫은 규장각과 연세대도서관에 목판본 또는 필사본으로 남아 있고, 근래에 완질에 가까운 것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栗谷集≫에서 總叙 가운데≪禮字集≫부문은 결락되었다. 근래 발견된 것에도≪예자집≫은 빠져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이의≪정언묘선≫은 당시 사단에 품격론을 활발하게 전개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품격론의 체계화 및 논리화에 기여했음은 물론이고 품격론 전개의 선편이 되기도 했다.≪정언묘선≫의 서문과 총서에 개진된 품격론은 단순한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 재정리와 조합 그리고 이이 특유의 혜안에 의해 훨씬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이가≪정언묘선≫을 통해 제시한 여덟 종류의 품격은434)≪禮字集≫은 결락되었기 때문에 실재로는 일곱 종류의 품격이다. 기존의 품격론을 종합정리한 것으로 16세기 이후 품격론의 전범이 되었다. 이이는 논리화 및 체계화의 명수로서, 그가 천부의 예지로 정리한 여덟의 품격은 율곡파의 사림은 물론이고 여타의 문인들에게도 지표가 되었다. 그것은 중국 품격론의 조선화요, 조선 사단에서 양성된 조선의 품격론이었다. 사인의 의식 속에 침잠되어 흐르던 품격의식이 이이의 논리화 및 체계화로 인해 하나의 論으로 정립된 것이다. 이같은 이이의 취지는 선조 6년(1573)에 쓰여진≪정언묘선≫서문에 나타나 있다.435) 李珥,≪栗谷全書≫권 13, 序.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정언묘선≫에 우리 나라 시가 한 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중국시만 뽑혀 있는데, 그것은 平仄 등을 일상언어로 구사하는 중국 사인들의 작품에서 품격의 기준점을 찾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정언묘선≫에 우리 나라 작품이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이가 우리 시를 폄하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의 의도는 作詩의 규범을 사단에 제시하는 데 있었다.≪정언묘선≫에 수록된 중국의 시가 주제별로 편집되지 않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율곡은≪정언묘선≫의 분류 편찬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風氣는 점점 혼탁해졌고, 혼탁한 풍기가 발하여 시가 되었기 때문에 性情之正에 근본을 두지 못하고 글귀의 조탁에 의지하여 속된 독자의 기호에 영합함을 일삼고 있다. … 시의 원류가 오랫동안 막혀서 지엽말단의 여러 갈래로 흘러 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현혹되어 정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감히 가장 정수라고 인정되고 모범이 될 만한 것을 채택하여 八篇으로 엮고 圈點을 찍어서 이름하여 精言玅選이라 했다. 冲淡의 품격을 머리로 삼아서 시의 본원을 인식하게 하고, 점차로 내려가서 美麗한 작품에서는 시의 맥락이 거의 진면목을 잃어버린 실상을 보이려고 했다. 이에 明道의 韻語로써 마쳤다. 이는 시가 矯僞한 경지로 진행되는 것을 막는 데 목적을 두고 작품을 취사선택한 결과이다(李珥,≪栗谷全書≫권 13, 精言玅選序).

 이이에 의하면 시는 시대가 진행될수록 퇴보했고, 이같은 현상을 풍기의 혼탁 때문으로 이해했다. 풍기는 품격과 관계가 있다. 미려와 文飾과 雕繪繡藻의 형상의식과, 교위와 移情蕩心의 주제의식을 포괄하여 시의 변천을 품격론을 근간으로 하여 진단하고 있다. 그는≪시경≫의 시를 최상으로 인정했다. 충담에서 미려에 이르는 시들을 분류하여 편집한 것은 詩史의 진행을 긍정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충담의 시들만 가치가 있고 여타의 것은 무의미한 작품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각자의 품격에 수반된 시들의 가치를 일정하게 인정했다. 충담을 최고로 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품격들도 충담과 또 다른 효용이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것은 인간심성의 다양성을 폭넓게 수긍했기 때문에 가능한 견해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제7의 품격 精工玅麗의 시들을 두고 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禮字集≫에 이르기를, 이는 精工玅麗한 작품들을 주로 뽑았다. 비록 문장을 다듬고 꾸민 것이긴 하나 지나치게 화려한 시들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들을 읽으면 정서가 무르녹고 의식이 준수해져, 무미건조한 사람의 정감이 살찌고 정서가 메마른 사람들은 꽃봉오리가 터지듯 풍요롭게 된다(李珥,≪栗谷全書≫拾遺 권 4).

 ≪예자집≫에 소속된 품격 정공묘려는 정치하게 문장을 다듬어 미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시들을 주로 뽑았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문장의 일정한 수식을 이이가 긍정한 셈이다. 이같은 시들이 독자에게 주는 시적 효용은 情濃意秀라고 하면서 정서가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사람을 피가 흐르는 서정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기능을 가졌다고 했다.≪智字集≫은 총서가 결락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예자집≫의 경우를 참작컨대, 오늘날의 분방한 서정시와 비견되는 작품으로 엮어졌음이 분명하다. 이이는 주자학자이면서도 현대적 의미의 서정시를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했다. 畿湖學派의 영수인 이이가 이같은 시의식을 지녔다는 사실은 이이 이후 기호학파의 문학론과 직결된다. 西人·老論으로 이어지는 율곡파 문인들의 문학이 보다 서정적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황이 웅혼·전아·경건의 품격을 중시했다면, 이이는 충담과 자연의 품격에 보다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이는 사공도의 시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사공도 이후 무수한 품격론이 중원 사단에 명멸했다. 선인들은 중국의 품격론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이황과 이이 또한 예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행이나 시문에서 품격과 직결된 용어들이 적지않게 등장하기 때문이다.≪정언묘선≫서문에서 율곡은 “시는 본래 음영성정이다. 성정이 위선이나 거짓이어서는 안된다. 聲音의 高下가 자연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이 경우 자연은 저절로라는 뜻도 있지만, 품격 용어로써 사용된 것으로 사공도의≪二十四詩品≫에서 말한 자연과 같다. 이이는 자연에 대해서 곳곳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아래의 인용문은 품격 용어로 사용된 점을 뒷받침하는 한 예이다.

≪元字集≫에 이르기를,≪원자집≫은 冲澹蕭散한 작품을 주로 뽑았다. 문장이 꾸밈을 일삼지 않고 자연스런 가운데 묘취가 있지만 古調古意한 까닭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 당·송 이후의 여러 작품의 품격이 古體에 미치지 못하나 간간히 近體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雕琢의 기교를 부리지 않았는데도 절로 성률에 적중한 까닭으로 아울러 뽑았다. 이≪원자집≫을 읽으면 淡泊을 맛보게 되고 希音을 즐길 수 있다.≪시경≫3백 편의 遺意가 결국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李珥,≪栗谷全書≫拾遺, 권 4, 精言玅選總叙).

 이이는 ‘충담소산’을 모든 품격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황이 ‘온유돈후’를 총칙으로 여긴 것과는 대조가 된다. 이이는 온유돈후와 비견되는 ‘優柔忠厚’라는 말은 했으나, 온유돈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유돈후는 웅혼, 우유충후는 충담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온유돈후와 우유충후는 품격론을 포괄하는 용어로 생각된다. 위에 인용한≪정언묘선≫총서에서의 ‘自然’이 사공도의 열 번째 품격인 ‘자연’과 접맥된 것은 사실이다. 이이는 사공도의 두 번째 품격인 충담과 관련지어 자연을 중시하고 있다. 이황이 사공도의 품격 웅혼을 중시한 것과 대비된다. 충담은 자연과 어울릴 수 있는 소지가 많다. 품격 자연은 綺麗 다음에 배정되어 있다. 華美가 극에 도달하면 기려의 품격이 지닌 본래의 장점이 상실된다. 기려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가 극대화되면, 기려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연의 품격이 창출된 것이다. 자연의 품격을 시로 형상하여 성공한 작자로 李白과 杜甫·元稹·白居易 등을 들고 있다. 이백의 ‘不可思議’, 두보의 ‘天衣無縫’ 원진과 백거이의 ‘平易’ 등은 자연의 특성으로 거론되었다. 억지로 뜻을 붙이지 않고, 시구의 짜임이나 서정의 流露가 꿰맨 흔적이 없으며, 詩意가 평범하고 쉬운 점도 ‘자연’의 속성으로 보았다.436) 司空圖,≪二十四詩品≫自然. 품격 자연은 자칫 무미건조한 범속과 평범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사공도가 그 다음으로 含蓄을 배치한 것은 주도면밀한 용의의 결과이다.

 조선 전기에 한문학을 창작했던 거의 모든 詞人들은 확고한 미학사상을 지니고 작품활동을 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좁힌다면 성정미학이 되겠고, 실제 창작활동과 접맥시킬 경우 품격론이 보다 더 밀착된다. 품격론을 하나의 ‘論’으로 정립한 자는 이이이다. 이이 이전에는 단편적이고 고립적으로 언급되었다. 16세기에 와서 이이가 하나의 끈으로 정연하게 엮고 꿰어서 논리체계를 형성시켰고, 아울러 여덟 개의 품격을 정립하여 조선 전기 사단의 詩風을 쇄신코자 했다. 표면적으로 이들 품격론을 볼 경우 성리학적 논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공도를 위시한 중국측 품격론과는 달리 성리학적 성정론, 즉 성정미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성정미학을 깔고 있으면서도 이를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이의 탁월한 면이다. 충담에서 출발하여 미려에서 마무리하는 그의 구도는 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용의 폭에 여유를 준 것이다. 그가 제시한 품격 모두를 어느 하나 폄하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각자의 품성과 노력에 따라서 선택하라는 의도였다.≪정언묘선≫총서에서 시를 배우는 사람들의 성향을 분류하고, 독자들의 성품을 구별하여 그 효용면을 밝히기도 했다.≪義字集≫의 ‘懶夫’와 ‘鄙夫’,≪예자집≫의 ‘瘐瘠者’와 ‘枯槁者’가 그것이다. 게으른 사람과 비속한 사람은≪의자집≫에 수록된 시를 읽어야 하고, 정서가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사람은≪예자집≫에 실린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미려한 시를 인정한 것은, 이이의 시의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도학자의 편벽된 경향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후세 율곡파 사인의 시의 주제영역이 넓은 사실과 관계가 있다.

 목릉성세의 조선 사단에 이이가 정리하고 재조직하고 체계화하여 제시한 冲澹蕭散·閒美淸適·淸新灑落·用意精深·情深意遠·格詞淸健·精工玅麗 등의 選詩 척도는 품격론의 전개로 인정된다. 이들 품격용어는 그 개념이 워낙 난해하여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게다가≪예자집≫의 경우는 결락된 상태이지만≪정언묘선≫의 서문을 참작하건대 미려의 품격과 明道韻語의 주제의식과 결부시켜 유추할 수 있다. 위의 용어들 중에 충담소산·한미청적·청신쇄락·정공묘려는 품격어휘로 보아도 무방하나, 용의정심·정심의원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貞字集≫의 선시 기준인 용의정심·句語鍜鍊·格度嚴整437) 뜻을 부림에 있어서 정치하고 심오하게 하며 문구를 단련시키고 격도가 엄정하다는 뜻이다(李珥,≪栗谷全書≫拾遺, 권 4, 精言玅選總叙).은 주제와 수사와 시격을 포함한 것으로 충담소산 등과는 차이가 있다.≪仁字集≫의 ‘정심의원’은 형상의식은 배제되고 오로지 주제쪽만 치우쳐 있다. 景과 사물을 만나서 襟懷를 사출함에 있어서 情意가 심원한 작품을 뽑았다는 것이다. 정의가 심원한 것의 구체적 설명으로 哀而不傷·怨而不悖438) 슬프지만 정도가 지나치지 않고 원망의 마음은 있으나 패륜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李珥,≪栗谷全書≫拾遺, 권 4, 精言玅選總叙).를 열거했다. 여하간 다소 느슨한 면은 있지만 위의 두 용례도 품격으로 여겨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이는 시의 기능과 효용으로써 淡泊·心平氣和·魂瑩骨爽·意思不淺近·穆爾長思·氣聳神揚·情濃意秀 등을 나열했다. 심기가 화평하고, 영대가 맑고, 뜻이 천박하지 않으며, 온화하고 조용한 사려, 기가 솟고 정신이 발랄해지고, 정서가 무르녹고 의기가 빼어남을 시의 중요한 효용으로 삼고 있다. 사림파의 문학을 상식적인 文以載道論으로 함부로 논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문이재도에서의 道를 삼강오륜이나 수신의 덕목 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이재도론의 조박을 핥는 것밖에 안된다. 도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위에 제기된 내용들은 많은 참고가 된다.

 이황의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른다”439) 李滉,≪退溪全書≫권 3, 詩 陶山雜詠.는 외물인식은 품격 온유돈후의 구체적 표현일 수 있다.<陶山雜詠>에 포용된 많은 한시들은 그같은 외물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른다”는 의미는 이이의≪정언묘선≫총서 등에서 그 구체적 개념이 포착되므로, 성정미학이 문학적으로 구현되는 전형은 품격이라고 생각된다. 이이는 그가 제시한 여덟 개의 품격에서 성정미학이 추구하는 지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는 吟詠性情이어야 한다. 음영성정은 淸和를 펼쳐내어 가슴 속에 쌓인 마음의 찌꺼기를 씻어내어 고매한 인격을 향유케 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淡泊을 맛보며 希音을 즐길 수 있어야 하며, 心氣를 평화롭게 하여 수레를 타고 꽃길을 가는 듯하여 세속의 모든 利慾을 초탈케 하고, 인간 내면의 臭腐를 세척하여 심성을 청결하게 하고, 의사를 천박하게 하지 말아야 하며, 원망이나 음란하고 방탕한 심정을 야기해서 안되며, 나태한 사람을 立志케 하며 비속한 자는 우아한 취향을 지니게 하며, 수척하고 메마른 사람들에게는 정서를 살찌게 하고 꽃피게 하는 기능과 효용이 있어야 한다(李珥,≪栗谷全書≫拾遺, 권 4, 精言玅選總叙).

 이이의 이 주장을 통하여 목릉성세를 풍미했던 성정미학의 지향점 일부를 엿보게 된다. 이이의 품격론을 사공도의 그것과 대비하면, 용어부터 시작해서 다른 점이 많다. 시대가 흘러왔기 때문에 이이는 사공도 이후 중국의 품격론에 대해서도 주의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그는 사공도의 두번째 품격 冲淡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충담과 상통되는 면이 많은 품격 자연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자연은 天然과 같은 의미이다. 이이는 일찍이 尹紀理의 아래의 시를 평하여 ‘出於天然’이라고 감탄하면서 격찬한 바 있다.

싸립문 옆 복사꽃은 햇볕 속에 정갈한데

무수한 꿀벌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다.

동자의 말소리에 낮잠을 얼풋 깨니

광주리엔 살찐 고사리가 가득하다(李珥≪栗谷全書≫권 32, 語錄 下).

 申濆이 富平縣 餘金山에 집을 짓고 당대 명사들을 불러 시를 구했는데, 윤기리가 지은 위의 시를 본 후, 참석했던 명사들이 붓을 던졌다. 이이가 이 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억지로 모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천연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440) 李珥,≪栗谷全書≫권 32, 語錄下. 품격 자연은 분식이나 모사를 극력 배제한다. 조탁이 정도를 넘으면 시의 생기가 말살된다. 이는 품격 綺麗가 지닌 함정이다. 그러므로 자연으로 이행될 것은 당연하다. 자연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멋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경계하기 위해 孟郊·賈島의 고심함이 뼈에 사무치고, 盧仝(唐 范陽人)·李賀의 험함을 추구하고 그윽함을 추구하는 것과, 李商隱·溫庭筠의 수놓은 비단을 펼친 듯한 것도 궁구해보면 모두가 자신의 개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공도는 “만약 오로지 矯僞만 일삼고 그같은 천품이 없었다면 어찌 세상에 이름이 났겠는가”라고 했다.441) 司空圖,≪二十四詩品≫自然. 위에 열거된 맹교·가도·노동·이하·이상은·온정균 등은 문장을 다듬고 퇴고하여 기려하고 贍富한 경향의 시를 지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천부의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시를 지어서 이름을 날렸고, 그것은 곧 그들의 자연이라고 했다. 이로써 보건대 품격 자연은 平凡·奇異·濃艶·淡泊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기이하고 농염한 시라고 해도 작가의 천성이 기이하고 농염하다면 그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주장이다. 이상은과 온정균의 시는 금수를 펼친 것 같이 화려하지만, 그것은 이상은·온정균의 천연에서 기인한 까닭으로 그들 작품의 품격을 자연으로 규정했다. 주제가 아닌 형상의식에 근거한 이같은 품격론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나 이황·이이는 이와 같은 중국의 품격론의 논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 같지는 않다. 이이는 특히 이같은 시들을 美麗로 분류하여 시의 맥락이 거의 단절에 이른 작품으로 규정했다. 이황 또한 화려한 분식을 제거하고 색채를 긁어내며 예리한 내용은 온건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442) 李 滉,≪退溪全書≫詩行錄, 권 1. 반면 이이는 미려의 시도 일정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여유를 보였다. 이황보다 성정미학에 있어서 서정의 영역을 넓게 잡았다는 증거이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문학의 차이점은 이것으로부터 나왔다.

 성정미학은 주제의식과 형상의식에 골고루 작용했는데, 작용의 실재는 품격론이 척도가 되었다. 특히 어떻게 주제를 형상시킬 것인가에 주의를 집중했다. 성정의 올바름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대전제였다. 그러므로 품격론의 무게는 형상의식에 주어졌다. 당시로서는 性情之正에 위배되는 주제를 시문에 담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모험을 시도한 용감한 詞人들도 적지 않았다. 吟咏性情의 주제의식이, 그것이 지닌 한계성의 극대화로 인해 풍화가 시작되자, 품격론의 전개 양상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공도의 24품 가운데 맨 마지막 품격인 ‘流動’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天機流動의 시의식의 대두가 그것이다. 유동을 천기가 흐른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유동은 미학적 용어인 품격론의 일단이기 때문이다. 웅혼에서 시작한 품격은 유동에서 마무리된다. 16세기가 지나면서 조선의 사인들은 웅혼·충담 등에 경주했던 관심을 마무리에 해당하는 유동으로 옮긴 것이다. 張維는 權韠의 시를 천기유동으로 규정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용모가 위엄이 있고 기개가 호방하고 언론이 뇌락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간간이 잡되고 해학스런 면도 있었고 특히 술을 좋아했는데, 술을 마신 후에는 더욱 방만하고 오만했다. 시를 읊으면 風神이 散朗했고, 종이를 잡고 붓을 던지는 것을 기다릴 것 없이 입에 형용되었으며 미첩에 움직여 시가 되었다. 급기야 문장이 이루어지면 情境이 妥適하고 律呂가 조화되어 항상 天機가 流動된 것이 아님이 없었다(權韠,≪石洲集≫張維 序文).

 천기는 음영성정의 ‘성정’과 변별의식을 갖고 사용한 말이다. 유동은 미의식이 깔린 품격 용어이다. 17세기 무렵에는 품격 유동이 성정이 아닌 천기와 부합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른바 성정지정의 주제의식에서 재래한 사인들의 답답함과 미진한 듯한 느낌과 관계가 있다. 규범적 서정이 음영성정의 본령이라면, 천기유동은 분방한 정감의 분출에 닿아 있다. 천기유동은 法唐派 사인들의 시적 지표였다. 三唐詩人의 혜성과 같은 출현도 載道的 局促에서 빚어진 서정의 節制와 무관하지 않다. 성정미학이 지닌 요소의 일면이 부정적 모습으로 확충되어 사단을 풍미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영원불변한 미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인식하는 순간, 보수와 반동은 시작된다. 미학의 진수는 변화와 발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정미학도 한 시대에서 올바른 기능을 한 후 변화하거나 풍화될 것은 당연하다. 성정미학이 극에 이르면 정체와 고정관념이 배태한다. 이른바 경화요 경직이다. 성정미학의 경화와 경직은 성정미학의 긍정적 본질까지 손상시켜 사인들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음영성정의 경직 내지 경화는 기존의 통용되는 품격으로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공도의 마지막 품격이면서 첫째 품격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동이 등장할 것은 당연하다. 성정의 음영이 아니라 천기가 유동해야만 시가 중흥한다는 논리이다.

 사공도가 유동을 그의 품격론에서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항상 신선하고 생명력이 발랄하게 꿈틀거린다. 시의 품격도 항상 흐르는 물처럼 변화하고 발전하라는 의도로 여겨진다. 품격 유동은 시적 서정영역의 재도적 국촉을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목릉성세가 지난 후, 천기를 형상하는 유동의 품격이 대두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유동이 이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과거부터 존재해왔지만 목릉성세 이후에 유난히 강조되었다. 이는 시의 재도적 굴레를 제거하고 물흐르듯 흘러가는 서정을 위주한 詞人群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권필과 許筠·姜籒 등을 들 수 있다. 허균과 강주는 이후에 전개되는 北人文學의 태두로서 하나의 유파를 형성했다. 북인문학의 설정은 南人文學과 老論文學의 설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문학의 서정영역의 확장은 북인문학의 두드러진 업적으로 생각된다. 이는 조선 전기 한문학 연구뿐만 아니라 후기 한문학 연구에도 검토되어야 할 커다란 과제이다. 이와 같이 목릉성세의 문학론의 주류였던 성정미학은 품격론과 어울려 그 깊이를 더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풍화되어 갔다. 품격 유동의 강조는 성정미학의 풍화와 접맥된 것으로 생각된다. 변화와 흐름을 통해 정체와 고정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사인들의 의지는 값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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