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2. 국문학
  • 3) 악장과 경기체가

3) 악장과 경기체가

 조선 전기 국문 시가문학은 樂章·景幾體歌·歌辭·時調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조는 서정시이고, 나머지 셋은 敎述詩이다. 그 시기 문학의 갈래체계에서 교술시가 다른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우리말 노래인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등장했다. 경기체가와 가사는 고려 후기에 생겨났으나 조선 전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악장·경기체가·가사는 교술시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악장과 경기체가는 자취를 감추고, 가사만 계속 번창한 것이 또 한 번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악장은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다. 목적으로 하는 바나 나타내는 내용은 아주 뚜렷하지만, 독자적인 형식을 형성하는 데 이르지 못했으며, 자연스럽게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기체가는 형식이 다른 어느 것보다 까다롭기 때문에 나타내는 내용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결함을 지녔다. 사물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대상과 직결된 감흥을 노래할 따름이지, 사물의 총체적인 관련에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을 깊숙이 개입시킬 수는 없어서, 가사와 좋은 대조가 된다. 心·身·人·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 성향이 한결같지 않음을 납득할 수 있게 분석할 수 있다. 경기체가는 심·신·인이 자아를 물인 세계로 나타낸다면, 가사는 심인 자아를 신·인·물인 세계로 나타낸다고 하겠다. 경기체가를 창안하던 단계에서는 사물의 의의를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흥겹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는데, 사물의 세계를 더욱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표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경기체가와 가사의 경쟁에서 가사가 승리하는 것이 필연적인 추세였다.

 악장·경기체가·가사는 모두 노래로 부르는 시이고,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그런데 음악으로서의 구실과 문학으로서의 구실을 견주어 본다면 단계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악장에서 경기체가로, 경기체가에서 가사로 올수록 음악으로서의 구실은 줄어들고 문학으로서의 구실이 확대된다.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통치질서의 상징인 禮樂을 정비하고자 해서 새로 지은 노래이다. 악기 연주가 따를 뿐만 아니라, 呈才로 편성된 것도 있다. 노래 사설은 음악이나 춤이 무엇을 뜻하는가 설명하는 구실을 맡았다 하겠으며 그 자체로서 문학적인 형식을 갖출 필요는 없었다. 경기체가는 기악반주나 춤을 들이지 않고 불렀다. 가사는 원칙적으로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읊기에 알맞은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음악의 비중이 낮은 것일수록 오래 지속되었다. 건국사업에서는 음악을 더욱 중요시했지만, 사대부 문화로서 지속적인 의의를 가지고 거듭 창조된 것은 음악이 아니고 문학이었다.

 제왕의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인 악장은 그전부터 있었으나,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漢詩는 물론 우리말로 된 것까지 힘써 지어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논의의 대상이 된다. 악장을 頌禱歌·頌祝歌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며 새로운 갈래인 듯이 여기지만, 그 연원은 멀리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중국 고대 왕조의 악장은≪詩經≫에 흔적을 남기고 공자가 못내 찬양한 것이어서, 유학에 의한 통치를 하고자 할 때면 언제나 규범으로 등장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신라 유리왕 때<兜率歌>를 지었다는 데서 우리대로의 전통의 출발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조정도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역대 제왕을 칭송하는 악장을 갖추었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창건되자 예악을 정비해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철저하게 확인하고, 악장을 제정하는 데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태조는 즉위하자 관제를 정하면서 예악을 관장하는 부서를 두어, 예악의 정치적 기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하는 데 주도적인 구실을 맡은 사람은 물론 鄭道傳이었다. 정도전은 건국의 이념과 제도를 갖추는 작업의 일환으로 태조의 공적을 찬양하고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드높이는 악장을 스스로 지었다. 그런데 가사는 새로 지었어도 악곡은 쉽사리 창작할 수 없어 고민이었다. 고려 말엽에 궁중에서 채택한 속악이 온통 음란해서 볼 것이 없다고 비판을 하면서도, 악곡은 쉽사리 바꿀 수 없기에 가사만 새로 제정하는 방침을 취했으며, 세종 때에 아악 정비를 서둘렀어도 사정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왕조 창건을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 사업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경기체가 중에 그런 내용을 갖춘 것이 여러 편 있고,≪용비어천가≫도 악장 제정사업의 일환으로 이룩된 최고 성과라고 할 만하다. 제왕이 아닌 부처를 찬양한≪월인천강지곡≫ 또한 악장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기체가는 독자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갈래이면서 얼마동안 악장으로 이용되었을 따름이다.≪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은 길게 이어지는 서사시이므로 단형의 교술시인 좁은 의미의 악장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물론≪용비어천가≫나≪월인천강지곡≫도 교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서사시로서는 다소 특이하다 하겠으며, 특히≪용비어천가≫는 단형악장을 연결시키고 다듬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앞뒤의 사건전개는 갖추지 않고 특정한 사실 자체를 들어서 칭송하는 노래를 계속 마련할 필요가 있어 정도전의 전례에 따른 악장 창작이 성종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악장은 끝내 문학적인 안정을 얻지 못했다. 음악을 선결조건으로 삼아야 했던 점이 계속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미 있는 악곡에 가사를 맞추어 넣으려 하니 문학으로서는 독자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어려웠다. 장이 나누어져 있고 餘音이 붙은 것은 고려 속악가사의 전통을 이었다 하겠으나, 율격이나 표현방법은 그 전례를 따를 수 없어서 모호한 상태에 머물렀다. 한시에 토를 단 것에서 우리말 악장이 시작되었는데, 악곡에 맞추려니 토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시가 5언인 것은 세 토막으로, 7언인 것은 네 토막으로 분석할 수 있겠으며, 한시를 기본으로 하지 않은 것에도 그 두 가지 형식이 보이기는 하나, 어느 쪽이든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정착되지는 못했다.

 정도전은 태조 2년(1393) 7월에<納氏曲>또는<納氏歌>·<窮獸奔>·<靖東方曲>을 지었다. 모두 다 태조의 武德을 칭송한 것이어서<武德曲>이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다시 그 해 10월에는<文德曲>·<夢金尺>·<受寶籙>을 지었다.<문덕곡>은 모두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을 開言路·保功臣·政經界·定禮樂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문덕곡>은 태조가 실행해야 할 정치의 도리를 제시한 점에서<무덕곡>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상 여러 작품은≪三峰集≫에 한시 형태로 전한다.<궁수분>·<수보록>은 4언이고,<납씨곡>은 7언이며,<몽금척>은 글자 수가 일정하지 않다. 한시의 여러 형식이 두루 쓰였는데, 그 가운데<문덕곡>은≪樂學軌範≫에,<납씨가>는≪時用鄕樂譜≫에,<납씨가>·<정동방곡>은≪樂章歌詞≫에 국문 토가 달린 형태로 실려 있다.<新都歌>라고 하는 것 한 편이≪악장가사≫에 더 있다. 국문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납씨가>·<정동방곡>·<문덕곡>·<신도가>의 네 편이다.

 <납씨가>는 태조가 일찍이 元의 잔당 納哈出의 침공을 물리친 공적을 찬양한 노래이다.≪시용향악보≫에 전하는 악보를 보면 고려 속악가사<靑山別曲>의 가락에 얹어서 불렀음을 알 수 있다.<궁수분>은 궁한 짐승이 도망친다는 말로 제목을 삼고서 태조가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서술한 노래인데, 한시로 된 것만 전한다. 나중에≪용비어천가≫에서도 특히 중요시된 내용이다.<정동방곡>은 동방을 편안하게 한 공적을 기린다 하면서 위화도 회군을 다룬 것이다. ‘偉’로 시작되는 반복구가 있어서 특이하며, 경기체가와 상통한다 하겠다.<서경별곡>의 곡조를 따서 불렀다.

 <무덕곡>에 속하는 세 편은 이처럼 실제로 있었던 일을 들어서 태조를 칭송하며 건국의 정당성을 밝혔고,<문덕곡>은 장차 베풀어야 할 덕치를 다루었다. 태조는 무인이라 문덕을 스스로 갖출 수 없었기에 정도전이 태조의 문덕이 훌륭하다 하고서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치방침을 그 노래에 나타냈다. 개언로라는 데서는 임금 혼자서 만사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언론의 길을 널리 열어야 한다고 했고, 보공신에서는 건국에 힘쓴 공신을 계속 우대해야 한다고 했으며, 정경계에서는 백성의 생업을 보장하고 함부로 침탈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정예악에서는 예악을 바로잡는 것이 질서 구현의 길임을 강조했다.

 <몽금척>과<수보록>은 태조가 꿈에 하늘이 내린 金尺을 받고, 지리산 석벽 속에 있는 이상한 글을 받는 등으로 해서 왕위에 오를 조짐을 보였다는 내용인데, 이것 또한≪용비어천가≫에서 다시 다루었다. 그런데 이 둘은 노래로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唐樂呈才로 편성해서 새 왕조의 궁중 무악 중에서 특히 중요시했다. 정도전이 한시로 지은 사설에 정재의 절차에 따라서 부르는 致語가 갖추어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래 곡조도 물론 당악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속악곡을 쓴<납씨가>나<정동방곡>과 성격이 다른 노래가 되게 했다.

 새 도읍을 찬양한 노래<신도가>는 한시는 없고 국문 악장만 있으니 특이하다 하겠다. 이 작품이 있기에 국문 악장이 한시에 토를 단 형태를 벗어나서 독자적인 영역을 마련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한자어가 많고, 율격이 안정되지 못했다. 서술어미는 모두 감탄형으로 되어 있어서 줄을 나누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한 줄이 몇 토막씩인지는 거의 판별할 수 없다. 전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한자와 국문 두 가지로 표기된 말은 편의상 한자만 택한다.

녜 楊州 ㅣ 올히여

디위예 新都形勝이샷다

開國聖王이 聖代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當今景 잣다온뎌

聖壽萬年샤 萬民이 咸樂이샷다.

아으 다롱다리

알 漢江水여 뒤흔 三角山이여

德重신 江山 즈으메 萬世 누리쇼셔

 전에는 양주 고을이던 곳에 세운 새 도읍은 모습이 뛰어나다 하고, 개국을 한 성왕이 성대를 일으켰다고 칭송했다. 서울의 성이 성답다고, 경치가 성답다고 감탄한 다음에, 왕조의 수명이 만 년이나 이어지는 동안에 모든 백성과 함께 즐기리라고 했다. 끝으로 앞은 한강수요 뒤는 삼각산인 경치를 들고서, 덕이 겹친 강산 사이에서 만세를 누리라고 축원했다. 천도를 하고, 새 서울 건설사업을 벌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기약하고자 하는 뜻을 잘 나타냈다. 그러기 위해서 흔히 볼 수 있는 덕담의 격식을 따랐다 하겠으며, 고려 속악가사에서 보이는 여음을 다시 썼다.

 權近의 악장도 여러 편 있으나, 노래로 부른 것 같지는 않다.<天監>·<華山>등을 지어서 태조에게 바쳤는데, 모두 다 문집에만 수록되어 있고≪악학궤범≫ 이하의 노래책에는 전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악장으로서 오랜 생명을 누렸는지는 의심스럽다. 문학적인 수식을 널리 동원하고 중국의 고사를 다수 인용해 태조를 찬양하면서 자기의 지식과 능력을 나타냈다 하겠으나, 노래부르기에는 너무 장편이다. 이 밖에 河崙·卞季良 같은 사람들이 지은 악장도 거의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 대신에 권근의<霜臺別曲>, 변계량의<華山別曲>등의 경기체가는 악장으로서 더욱 중요한 구실을 했기에≪악장가사≫에 실려 있다 하겠는데, 경기체가를 다룰 때 다시 고찰하기로 한다.

 ≪악학궤범≫과≪악장가사≫에 전하는 악장으로는 정도전의 작품 외에 尹准의<鳳凰吟>, 작자 미상의<儒林歌>·<北殿>, 尙震의<感君恩>이 더 있다. 이런 노래는 고려 속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노래 사설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것으로서, 음악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찬양하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상투적인 내용이며, 표현을 잘 하려고 애쓴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거의 다 한시에 토를 단 정도에 그쳤다 하겠고, 그 가운데<감군은>정도는 우리말 노래로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편이다. 서두를 들어본다. 한자·국문의 이중 표기는 한자만 택한다.

四海 바닷 기픠 닫줄로 자히리어니와

님의 德澤 기픠 어 줄로 자히리잇고

 享福無彊샤 萬歲를 누리쇼셔

 享福無彊샤 萬歲를 누리쇼셔

 一竿明月이 亦君恩이샷다.

 사해 바다 깊이는 닻줄로 재려니와 님의 德澤 깊이는 어느 줄로 잴 수 있겠는가 하면서 임금의 은덕이 바다보다도 깊다고 한 말은 표현의 묘미를 얻은 드문 예이다. 이 비슷한 구절이 네 장에 걸쳐 네 번 되풀이된다. 그 다음에 향복무강해서 만세를 누리라 하고, ‘일간명월이 역군은’이라고 한 것은 여음이어서 계속 그대로 쓰인다. 그러나 악장은 기능이 워낙 한정되었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나와도 널리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경기체가는 고려 후기에 생겨났으나,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경기체가는 모두 25편인데, 그 가운데 고려 때의 것은<翰林別曲>·<關東別曲>·<竹溪別曲>세 편만이고 조선 전기 작품은 22편이며, 조선 후기 것은 느지막이 철종 11년(1860)에 閔圭라는 사람이 지은<忠孝歌>가 한 편 있을 뿐이다. 경기체가가 조선 전기의 특징적인 갈래라는 데서 이 시기 문학의 기본 성격이 확인된다. 사물이나 사실을 서술하고 전달하는 흥취를 자랑하기 위해서 조선 전기의 사대부는 경기체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승려들 또한 이에 동조하여 경기체가의 엄격한 형식을 준수하여, 음악과 문학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경기체가는 우리말 노래이면서도 한자어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서 악장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한시에서 국문시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악장은 한시이기만 한 것에서 시작해서 우리말 노래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것에 이르렀다 하겠으나, 경기체가에서는 그러한 진폭과 변이가 나타나지 않았다.<한림별곡>에서 마련하고,<관동별곡>과<죽계별곡>에서 재확인한 형식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을 따름이다. 악장은 기능 때문에 존재한다면, 경기체가는 형식을 생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기체가에서의 한자어는 사물 자체의 이름이자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기 때문에 쉬운 말로 바꾸어놓기 어려웠다. 그런 형식과 표현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고쳐 보려 하다가 갈래의 해체를 촉진하고 말았다.

 경기체가는 크게 보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악장의 구실을 하는 경기체가이다. 새 왕조의 건국을 찬양하고, 윤리적인 질서를 수립하자는 경기체가는 기능을 보아 악장이라 하겠으나, 형식은 다른 부류와 구별되지 않는다. 나라 노래를 제정할 때 가능한 형식을 두루 이용하느라고 경기체가도 끌어들였지만, 그 때문에 경기체가의 독자적인 성격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또 하나는 승려의 노래인 경기체가이다. 가사는 원래 승려의 노래였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대부의 노래로 바뀌었고, 경기체가는 사대부의 노래이기만 했던 것이 승려의 노래로도 이용되었으니, 儒佛이 다투면서도 문학 갈래는 주고받았다 하겠다. 세번째 부류는 개인적인 노래인 경기체가이다. 사대부가 자기 생활을 다루고 개인적인 관심을 표현한 작품이 차츰 많아져서 경기체가의 주류를 이루었고, 갈래 해체를 촉진하는 조짐도 여기서 나타났다.

 권근의<상대별곡>은 악장 구실을 하는, 나라 노래 경기체가의 첫 작품이다. 제목에서 보이는 ‘霜臺’는 사헌부를 지칭한다. 권근은 정종 원년(1399)에 대사헌이 되어, 사헌부에서 하는 일을 칭송한 이 노래를 지었다. 사헌부는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이다. 서릿발 같은 기세로 새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찰하고,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으니, 거기서 일하는 관원은 위의가 대단하고 자부심도 남다르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자 표기로 인용한다.

華山南 漢水北 千年勝地

廣通橋 雲鐘街 건나드러

落落長松 亨亨古栢 秋霜鳥府

위 萬古淸風ㅅ 景 긔 엇더니잇고

英雄豪傑 一時人才 英雄豪傑 一時人才

위 날조차 몃분니잇고

 이것이 제1장이다. 새 왕조의 도읍터가 천년승지임을 말하고, 거리의 경치를 서술하다가 사헌부에 이르렀는데, 거기 쓰인 말이 모두 굳고도 맑은 기품을 나타내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웅호걸 일시인재’가 자기를 위시해서 얼마나 되는가 하고 뽐낸 것은<한림별곡>의 전례를 따랐으면서 새 시대의 기풍을 잘 나타낸다. 고려 고종 때 최씨정권에서 벼슬하던 문인보다야 새 왕조의 역군들이 더 큰 자부심을 가져 마땅하다. 사헌부에서 하는 일을 계속 서술하면서 자부심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나타냈다. 마지막의 제5장은 감격을 총괄하느라고 경기체가의 전형적인 형식에서 이탈했다.

 변계량의<화산별곡>은 세종 7년(1425)에 지었으며, 서울을 찬양한 노래이다. ‘華山’은 삼각산의 다른 이름이며, 서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서울이 빼어난 고장이라고 칭송하면서<상대별곡>과 비슷하게 시작해, 이하에서는 어진 임금이 들어서서 훌륭한 정치를 베푸는 태평성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열거해 서술했다. 도의를 바르게 하고, 무예를 익혀 비상시에 대비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쓴다는 것까지 강조하며 그 시대의 정치철학을 요약해 놓았다. 마지막의 제8장을 들어보기로 한다.

勸農桑 厚民生 培養邦本

崇禮讓 尙忠臣 固結民心

德澤之克 風化之洽 頌聲洋溢

위 長治ㅅ 景 긔 엇더니잇고

華山漢水 朝鮮王業 華山漢水 朝鮮王業

위 幷久ㅅ 景 긔 엇더니잇고

 농상을 권하고 민생을 두터이하는 것이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길이라 하고, 예의와 사양하는 기풍을 숭상하고 충성과 신의를 존중해 백성의 마음을 단단하게 묶어야, 덕택이 지극하고 교화가 흡족해 칭송하는 소리가 넘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오래 다스리는 광경, 다시 삼각산·한강수와 조선의 왕업이 함께 오래 지속되는 광경을 제시하고 찬양했다. 백성의 생업을 보장하고,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겠다는 정치철학이 집권층에서 거듭 확인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歌聖德>과<祝聖壽>는 세종 11년(1429)에 예조에서 지어 왕조의 안정과 번영을 노래한 곡이다.<配天曲>은 성종 23년(1492)에 왕이 성균관에 거둥한 것을 기념해서 지은 노래이다. 예조는 나라의 기풍을 담당한 곳이며, 노래를 관장했다. 성덕을 칭송하고 성수를 축원하는 것도 예조의 임무이다. 그런데 예조에서 지은 노래가 경기체가이니 경기체가의 대단한 위치가 공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이 성균관에 거둥하면 치하하는 것은 오랜 관습이었는데, 경기체가를 치하하는 노래로 삼아서 또한 주목된다. 그런데 그 가운데<축성수>는 형식이 유별나 경기체가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五倫歌>와<宴兄弟曲>은 작자나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악장가사≫에 전하니 널리 불렸다 할 수 있다.<오륜가>는 예조가 악부에 올리고자 했다는 기록이 세종 14년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이루어진 듯하고,<연형제곡>도 세종 때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두 노래는 윤리의식을 고취하는 것으로 내용을 삼았다. 오륜이 두루 중요하다 하고, 형제의 우애를 따로 강조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형제들 사이의 혹독한 싸움을 겪었으며, 세종 때에도 양상은 다르나 비슷한 문제가 있었기에, 형제의 우애를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경기체가가 이렇게까지 존중되자 불교계에서도 경기체가를 받아들여 신앙의 대상을 찬양하는 노래로 삼았다. 불교 승려의 노래는 시대에 따라서 양상이 달라졌다. 均如의 경우에 보건대 한때 詞腦歌(鄕歌)를 특히 중요시했으며, 慧勤의<僧元歌>같은 것은 가사가 성립되는 길을 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불교가 억불정책 탓에 수세에 몰렸다. 그래서 유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불교가 유교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주장으로 불교를 옹호했다. 경기체가의 수용도 그런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己和는 조선 초기의 불교 지도자였다. 억불론의 시련 속에서 불교를 살리기 위해서<顯正論>을 지어서 불교가 유학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면서 불교를 옹호하고자 하는 노력이 경기체가를 짓는 데서도 구체화되었다. 기화의 경기체가는<彌陀讚>·<安養讚>·<彌陀經讚>세 편이며, 모두 10장씩으로 이루어져 있다.≪涵虛堂得通和尙語錄≫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각 장에 제목이 붙어 있고, ‘…景’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구절은 없어서, 정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 미타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짓고자 한 것 같으나, 널리 공감을 얻을 만한 표현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겠다.

 義相이라는 승려가 지은<西方歌>라는 것도 전하는데, 세조 때쯤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모두 9장이며, 불교를 믿어 서방정토로 가자는 내용이다. 형식은 정격이고, 각 장의 마지막 대목은 ‘나 됴해라’는 말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세조 때의 승려 知訔이 지었다는<騎牛牧童歌>12장은 더욱 주목되는 작품이다. 작자의≪寂滅示衆論≫에 실려 있으며, 거기서 논설로 다룬 내용을 노래로 요약했다. 목동이 소를 타고 돌아가듯이 바른 마음을 찾아 괴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을 단계적으로 서술했다. ‘긔 엇더니잇고’ 대신에 ‘나는 좋아라’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말을 되풀이했으니 다소 변격인 셈이다.

 승려들의 경기체가는, 이런 작품이 나오기는 했지만 대체로 보아 불교의 관습적인 문구를 열거하는 데 그치고 작자 나름대로의 새로운 창의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기체가의 작품세계를 다채롭게 하는 경쟁에서 사대부가 앞서 나갔다. 경기체가를 자기 표현을 위한 사적인 문학 갈래로 키우는 과업은 사대부가 이룩했다. 그런 전례는 이미 安軸의<관동별곡>과<죽계별곡>에서 볼 수 있던 바이다. 왕조창업을 칭송하는 나라의 노래로 이용되던 경기체가를 본궤도로 되돌려놓은 셈이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자랑하고 돌아가 자연에 은거하는 생활을 문제삼고, 윤리도덕을 내세우는 주제도 담아, 경기체가는 사대부의 관심사를 다각도로 충실하게 나타냈다.

 그런 작품의 첫 예는 柳穎의<九月山別曲>이라고 알려졌다. 유영은 태조 때에서 세종 때까지 관찰사·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사람이다. 세종 5년(1423)에 문중 족보≪文化柳氏世譜≫를 만들면서,<구월산별곡>을 지어서 거기에 수록했다. 구월산에서 자기 가문이 일어난 것을 자랑하고, 대대로 복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기원하며, 일족이 화목하게 살고, 설사 산수에 묻히더라도 충성을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했다. 여러 모로 안축의<죽계별곡>과 상통한다 하겠는데, 임금에 대한 도리를 강조한 것은 조선시대 작품답다.

 丁克仁은 지방 유생의 처지에서 어렵게 진출해 관위가 종4품에 이르렀다. 세조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불교 숭앙을 반대해서 왕의 진노를 샀던 일이 있고, 52세에야 문과에 급제했다. 만년에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성종 3년(1472)에 품계를 높여주는 은전이 내리자 감격해서 악장이라고나 할 수 있는<不憂軒曲>과 함께 경기체가인<不憂軒歌>를 지었다. 스스로 설명을 달아 “임금의 은혜가 망극하다고 생각해서, 고려<한림별곡>의 음절에 의거해<불우헌곡>을 지어 영광과 은총을 읊었다”고 했다. 모두 6장이며, 물러나서 후진을 가르치고 산수 사이에서 노닐다가 더욱 큰 은혜를 입으니 감격스럽다고 한 내용이다.

 朴成乾의<錦城別曲>은 작자가 나주 고을의 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성종 11년에 지은 것이다. ‘금성’은 나주의 다른 이름이다. 그 해에 자기가 가르친 제자 10명이 소과에 급제하자 그 감격을 자랑했다. 나주는 자랑스러운 고장이라 하고, 원래 유학이 성하고 인재가 배출되는 곳인데 다시 그런 영광을 차지했다고 했다.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 경기체가는 찬양하거나 감격스럽다고 하는 내용을 일관되게 지녔다.

 金絿는<花田別曲>을 귀양가서 지었다. 김구는 趙光祖 일파라는 이유로 기묘사화가 나자 32세에서 45세까지 남해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 사이에 부모의 상을 당하고도 가보지 못할 정도의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노래 사연에는 고난이 보이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노는 풍류가 나타나 있다. 귀양살이가 괴롭기보다 즐겁다 하고 서울의 번화함과 충족함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마음의 바른 도리를 찾아 도학자다운 자세를 보인 것은 아니고, 노래·기생·술을 즐기는 취락을 내세웠다. 모두 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제1장을 들면 다음과 같다.

天之涯 地之頭 一點仙島

左望雲 右錦山 봉내고개

山水奇秀 鐘生豪俊 人物繁盛

위 天南勝地ㅅ 景 긔 엇더니잇고

風流酒色 一時一傑 風流酒色 一時一傑

위 날조차 몃부니신고

 이처럼 귀양살이를 귀양살이답지 않게 그린 것은 찬양·감격 또는 자기 도취를 노래하는 관습이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체가가 내심의 성찰에 적합하지 않고, 겸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한다. 李滉이 한림별곡류라 일컬은 경기체가는 교만하게 방탕하며 비루하게 희롱하는 것을 일삼는 노래이니 군자가 숭상할 바가 아니라고 한 말이 이 작품에도 해당한다 하겠다.

 周世鵬은 도학자답게 경기체가로 교화를 베풀고자 했다.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서원을 처음 세우고, 경기체가<道東曲>9장,<六賢歌>6장,<儼然曲>7장,<太平曲>5장을 지었다.<도동곡>은 도학을 전한 安珦의 위덕을 기렸으며,<육현가>는 宋나라 때의 도학자 여섯 사람을 칭송했다.<엄연곡>은 군자의 굳건한 기상을 노래했으며,<태평곡>은 공자를 칭송했다. 그런데 대단한 권위를 지닌 내용을 산만한 형식과 경색된 표현으로 나타내 경기체가에 대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의 제자인 權好文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獨樂八曲>8장을 지어서 산수 사이에서 노닐며 도학을 닦는 자세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자니 찬양하고 감탄할 만한 대상은 떠오르지 않고 경기체가의 관습과는 어긋나는 표현이 필요했으며, 서정적인 요소도 적지 않게 개입되게 했다. 결국 형식이 아주 산만하고 거의 산문에 가까운 작품이 되고 말아서 경기체가의 해체를 촉진했다. 경기체가는 조선 전기 사대부 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잡았지만, 생활이나 심성을 조용하게 살피며 가다듬기에 부적당해 결국 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사가 성장하자 경기체가가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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