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향악기들이 거의 그대로 선초의 향악기로 전승됐음은 세종 12년(1430) 임금께 올린 儀禮詳定所의 상소문512)≪世宗實錄≫권 47, 세종 12년 3월 무오.에서 확인된다. 즉 그 당시 악공의 취재 때 언급된 거문고·가야고·향비파·젓대·장고·해금·당비파·향피리 등 8종의 향악기 중에서 당비파를 제외한 나머지 7종은 모두≪高麗史≫樂志에 기록된 향악기와 같다. 그런데 세종대의 향악기 중에서 해금·장고·당비파는 성종대에 이르는 동안 당악기로 분류되었다.≪악학궤범≫권 7의 향부악기도설에는, 거문고·가야고·비파·젓대·향피리·小管子·草笛 등 7종만이 향악기로 설명되어 있다. 세종대에 향악기로 취급되었던 해금·장고·당비파는 모두≪악학궤범≫에서 당악기로 도설되었는데,513)≪樂學軌範≫권 7, 唐部樂器圖說 杖鼓·唐琵琶·奚琴. 그 이유는 成俔이 악기의 역사적 유래에 따라서 세 악기를 분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젓대 곧 대금의 도설에서는 “중금과 소금의 제도와 악보도 같다”514)≪樂學軌範≫권 7, 唐部樂器圖說 大笒.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금을 대표적으로 도설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금과 소금은 생략되었음이 확실하므로 고려 향악기의 뼈대를 이룬 三絃과 三竹이 조선 초기의 향악기로 모두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대에 새로 나타난 향악기는 소관자와 초적인데, 세로로 잡고 부는 횡적의 일종인 소관자는 吹孔 1개와 指孔 3개짜리의 관악기였고, 초적은 목동들이 입에 넣고 불던 풀잎피리의 일종이었다.515)≪樂學軌範≫권 7, 小管子·草笛. 소관자와 초적은 조선초 궁중에서 많이 연주되어 영조 20년(1744)까지 궁중에서 연주되었으나,516) 張師勛,≪韓國樂器大觀≫(문화재관리국, 1969), 219쪽.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초적은 민간에서 草笒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조선초의 향악기는 고려 향악기의 기둥인 삼현과 삼죽의 전통을 그대로 전승하면서, 그 바탕 위에 소관자와 초적을 첨가시킴으로써 숫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조선초의 향악기 중에서도 거문고·가야고·젓대·향비파·향피리가 대표적이었으므로, 조선초 향악도 고려의 향악을 거의 그대로 전승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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