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4) 사전의 건축
  • (1) 사단의 조영

(1) 사단의 조영

 태종은 11년(1411) 3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강 南郊에 圜丘壇을 다시 쌓았다. 태조 때 쌓은 단이 협소하여 불편하였으므로, 고려와 송나라 제도를 참작하여 장중하게 조성해 단과 신주, 재궁이 완비되었다.676)≪太宗實錄≫ 권 21, 태종 11년 3월 정축. 태종은 卞季良에게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그는 “우리 동방은 단군이 하늘에서 하강한 곳”이므로 당연히 제천단에서 치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677) 李肯翊,≪燃藜室記述≫ 別集 권 4, 祀典典故.

 국초에 단군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었다. 예조전서 趙璞은 종묘, 籍田, 사직, 산천, 서낭, 문묘 등에 제사할 일과 함께 평양부로 하여금 ‘東方始受命之主’인 단군과 ‘始興敎化之君’인 기자에게 제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678)≪太祖實錄≫ 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또 이조에서는 명산대천·서낭신들을 鎭國伯·啓國伯·護國伯으로 봉하자고 하였다.679)≪太祖實錄≫ 권 3, 태조 2년 정월 임술.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하자 백악산을 진국백,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였다.680)≪太祖實錄≫ 권 8, 태조 4년 12월 무오. 이에 따라 태종은 송악서낭신에 주던 녹봉을 백악서낭신에게로 돌렸다.681)≪太宗實錄≫ 권 11, 태종 6년 정월 무술.

 국가에서 大祀를 받드는 제천단 외에 중·소사를 받드는 雩祀·풍운뢰우·선농·선장단·靈星·노인성·司寒·馬步·厲壇 등이 조성되었다. 이 중 여단은 사직단·서낭당과 함께 지방 고을마다 설치되었다. 풍운뢰우단은 사방 2장 3척, 높이 2.7척이고 사면에 돌층계를 쌓았다. 바깥둘레에는 낮은 담장 壝를 한겹 축조하였는데 1면의 길이가 25보, 환구단의 세겹 유 중에서 제일 안쪽에 쌓는 담장 길이와 같게 하였다. 영성단은 높이 3척, 동서 길이 1장 3척, 남북 길이 1장 2척, 사방의 계단, 유 한겹 길이 25보의 규모였다.682)≪太宗實錄≫ 권 21, 태종 11년 정월 임신.

 도성 사직단은 태조 4년(1395) 정월에 착공하여 곧 준공하였다.≪국조오례의≫에 의하면 社는 동쪽에, 稷은 서편에 있는데, 두 단의 사면은 2장 5척이고 높이는 3척, 사방에 계단이 있었으며 3급식이었다. 이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 규격에 대한 기록과 부합하고 현존하는 유구를 실측해 보아도 별 차이가 없다.683) 서울特別市,≪서울社稷壇考證調査 및 復元基本計劃報告書≫(새한建築文化硏究所, 1985), 9∼10쪽 참조. 세종 때 집현전에서 사직단이 좁으므로 개축하고 周尺을 營造尺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세종은 태조 때의 것이 엄연한데 어찌 고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유보시켰다.684)≪世宗實錄≫ 권 57, 세종 14년 9월 병진.

 한편 태종은 태조가 정한 유의 바깥을 넓혀 남·서·북은 산기슭에 이르도록 하고 동쪽은 140보를 확보하였다.685)≪太宗實錄≫ 권 27, 태종 14년 4월 경신. 또 담장을 쌓고 정문을 내 사직서가 경내에 들어올 수 있게 하였다.

 사직단 단의 구성은 장대석 세벌대를 약간 되올림하면서 쌓은 것이다. 아래 위의 장대석에 비하여 두벌대의 돌은 무사석만큼 높아졌다. 마치 건물의 기단을 형성하듯이 한 것인데 이는 중국 사직단이 층급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는 것과 다른 구조로 조선적인 특색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지금은 보기 어렵게 된 다른 祀壇들도 그와 같은 구조였으리라 추정된다.

 태종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좌명공신들과 더불어 馬巖壇에 가서 歃血同盟의 의례를 지냈고,686)≪太宗實錄≫ 권 1, 태종 원년 2월 신축. 세종 때 朴堧은 환구단 부근에 風師·雨師의 단이 있었다고 하였다.687)≪世宗實錄≫ 권 83, 세종 20년 12월 기사. 그렇다면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구조물들이 당시에는 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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