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4) 사전의 건축
  • (3) 학교 건축

(3) 학교 건축

 서당은 사설의 초급 교육기관으로 인근 자제들이 모여 훈장에게 초보교육을 받았다.701)≪增補文獻備考≫ 권 209, 學校考 8, 鄕學. 일정한 교과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校舍가 따로 설치되지도 않았다. 살림집의 일부 시설을 활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당에서 초보교육을 이수하면 서울에서는 四學, 지방에서는 鄕校에 들어가 수학을 계속하였다. 小科에 합격하면 생원·진사의 칭호를 얻고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4학·향교·성균관은 국가설립 교육기관이며, 4학·성균관은 중앙정부에서, 향교는 지방관청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소정의 교육시설을 구비하였므로, 명륜당을 비롯한 제반 교육시설과 함께 文廟가 구내에 병설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성심껏 연찬한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설학교 설립이 증대되어 중기 이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書院이 사설학교의 중심이 되었다. 저명한 학자와 덕망있는 자를 배향하기 위한 사당을 짓고, 그 일곽내에 서원을 건설하였다. 廟學의 제도에 따른 것이다. 교육시설로 쓰일 여러 채의 건축물이 일곽내에 경영되었다.

 조선시대 서원은 豊基郡守 周世鵬이 처음으로 설립하였다. 그는 부임지 順興이 고려시대 유학자 安珦의 고향이었으므로, 文成公廟를 개설하였다. 신라시대의 절인 宿水寺가 마침 폐사의 지경에 있었으므로 이를 이용하였다.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의 교육을 목표로 서원을 열고 ‘白雲洞書院’이라 하였다. 그 때문에 최초의 서원에는 불교가람의 우뚝한 당간지주와 석조물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702) 보물 제59호인 높이 3.65m의 당간지주가 서있고, 경내외에는 절에 사용되던 불상대좌나 석등의 잔재들이 있다. 1953년도에 25구의 불상이 출토된 바도 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李滉은 정부에 건의하여 ‘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고 서원의 재정 뒷받침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기반을 굳히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유구가 남아 있다. 소나무가 잘 자란 숲 속에 자리한 소수서원에는 강당을 비롯한 서원의 교육시설과 안향의 사묘, 중종 39년에 추배된 문정공 安軸과 문경공 安輔, 그리고 인조 11년(1633)에 주세붕을 배향한 사당이 들어섰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중기 이후에 들어선 것이지만 강당 등은 숙수사 당시의 법당이었다는 구전이 있고 강당이 동향인데 비하여 후대에 건축된 사당과 서원건축물들이 남향으로 당초의 형상을 잘 지니고 있다.

 이황은 예안에서 易東書院을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그 밖에 10여 곳의 서원건립에 참여하였다. 이로부터 서원 설립이 성행하여 중종 때에 4개소, 명종 때에 18개소, 선조 때 63개소나 되었다. 이런 추세는 숙종대에 이르러 166개소가 신설되는 폭발적인 증가 양상을 보여 모두 약 417개소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이 밖에 祠宇의 명칭으로 서원과 유사한 기능을 지닌 것이 492개소 더 생겨났다. 이들 중 서원은 200여 개소, 사우는 70여 개소가 사액을 받고 공인되었다.

 이들 중에는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에서 존속하도록 허가된 47개소에 포함된 것들도 있다. 따라서 그 중 일부는 지금도 건축물을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그 중에 陶山서원·玉山서원·筆巖서원·藍溪서원·西嶽서원 등이 유명하다.

 도산서원은 선조 7년(1574)에 이황의 제자와 유림들에 의하여 창건역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황이 명종 10년(1555)에 향리에서 돌아갔을 때 지은 陶山書堂을 중요시하였고 이황을 배향할 尙德祠를 지었다. 보물 제211호인 상덕사 일곽은 낮은 담장과 신문이 있고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家廟 유형의 담박한 작은 건물이다. 앞쪽의 반 칸을 퇴로 개방하였고 팔작의 기와지붕이며 홑처마 구성이다.

 강당인 典敎堂(보물 제210호)이 서원의 중심에서 높은 댓돌 위에 위풍당당하게 위치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그 중 閑存齋라 편액한 2칸의 방을 제외하고는 마루깐 대청으로 기둥간살이가 개방되어 있다. 역시 홑처마이며 팔작의 기와지붕이다. 앞뜰 좌우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동서재가 있는데 동편에 博約齋, 서편에 弘毅齋라 편액하였다. 陶山歌가 있어 유명할 뿐만 아니라 豹菴 姜世滉이 강가에서 멀리 서원을 바라다보며 그린 陶山圖가 있어 당대의 서원 전경을 엿볼 수 있다.

 옥산서원은 경주 安康面 옥산리에 있으며 李彦迪을 배향하였다. 선조 5년 이언적의 고택인 獨樂堂(보물 제413호) 이웃에서 서원건설이 착수되어 일단락되자 선조 7년에 ‘옥산서원’이라 사액하였다.

 대문 亦樂門에 이어 無邊樓가 섰는데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구조가 특이해서 가적지붕의 예도 볼 수 있다. 무변루에서 건너다보면 마당 저쪽에 강당인 求仁堂이 있는데 커다란 ‘옥산서원’의 현판이 걸렸다. 당 앞뜰 동서로 敏求·闇修齋가 있고 구인당 뒷뜰에 사당 體仁廟가 있다. 외곽에 文集板閣이라 편액한 版庫가 있다. 마루를 바닥에서 띄운 京의 형태인데 판벽을 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통풍을 고려해서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李彦迪이 저술한≪大學章句補遺≫·≪學續或問≫·≪求仁錄≫·≪晦齋集≫ 등을 판각하여 간행한 판본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서원에는≪禮記≫ 등 약 230여 종의 2,000권이 넘는 서적이 보존되어 있다.

 서원의 구조는 중심축을 설정하고 대문에서 사당에 이르는 중요 건물을 축선상에 배치하고 그 이외의 건물들은 좌우로 벌려서 늘어 놓는 법도에 따라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더러는 지형에 맞추어 비교적 자유스럽게 배치하기도 하였다. 사당은 따로 담장을 두르고 神門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조영되었고, ‘後廟前學’ 즉 뒤에 사당을 두고 앞에 講學하는 건물을 두는 규범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향교도 대략 흡사하여 樓門(風化樓 등)을 들어서면 마당에 동·서재가 있고 그 중심에 명륜당이 섰는데 前學의 일곽이다. 명륜당 뒷마당에 東西廡가 있고 그 북쪽에 大聖殿(또는 大成殿)이 있는데, 이는 대를 높여 담장으로 두르고 三門형의 신문을 내는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인 배치법과 다른 예도 있다. 밀양향교는 문묘와 좌우로 병렬되어 있다. 또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편을 차지한 예도 있다. 이런 중심곽에 祭器庫나 廚舍 등의 부속건물들이 따로 부설되는 수도 적지 않다.

 향교는 으레 지금도 옛고을마다 남아 있다. 牙山郡의 경우는 溫陽·아산·新昌縣이 합병한 것이어서 온양향교·아산향교·신창향교가 잔존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다른 유형의 건물들이 거의 사라진 현재의 입장으로 보면, 향교와 문묘는 특이한 예를 이루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이건·개건·변경된 건물들이므로, 초기의 형상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주 드물다. 겨우 몇몇이 손꼽히고 있을 뿐인데 문묘건물 중에서는 강릉 문묘 대성전이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강릉시 교동에 있는 문묘 대성전은 15세기 말엽에 조영되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花浮山 아래의 학교건물이 낡게 되자 성종 3년(1472) 과거시험에 급제한 이 학교 출신들이 주동이 되고 유력인사의 도움을 얻어 성종 17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대성전과 동서무가 먼저 이룩되고 이듬해에 명륜당·동서재·전사청·제기고·敎授衙·有司房 등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南樓와 前廊이 준공되어 70여 칸의 일곽이 형성되었다. 인조 22년(1644)에 중수되었고 그 중 12칸은 개건되었는데 대성전은 성종 17년에 이룩된 이후로 제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홑처마이고 맞배의 기와지붕이다. 구조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활달하며 花栱을 써서 구조하였다(보물 제214호).≪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고려 때에는 문묘를 둔 학교가 없었는데 강릉에 문묘를 둔 학교가 충렬왕 때 세워지면서부터 여러 고을에서 잇따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703)≪增補文獻備考≫ 권 209, 學校考 8, 鄕學.

 조선시대 학교건물의 대표는 한양의 성균관과 문묘로, 지방 향교나 서원의 모범이 되었다. 廟庭碑에 의하면 성균관은 태조 6년(1397) 3월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7년 7월에 개학하였다. 그 터는 서울 동북부에서 산이 그치고 평지를 이루며 냇물이 돌아흐르는 곳이고 陽을 面한 자리였다고 한다.

 聖哲의 廟宇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學은 문묘 뒤에 있다. 학의 중앙건물은 명륜당이고 좌우에 협실이 있으며 그 남쪽에 행랑이 있다. 규모가 매우 큰데 대소 건물이 96칸이었다고 碑文은 설명하고 있다. 성균관은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태종 7년(1407) 3월에 재건되었다. 옛 터에 따라 중건하되 문묘 서쪽에 神廚와 西廡 아래에 동서문을 증건하였으며 이직과 박자청이 감역하였다.704)≪太宗實錄≫ 권 13, 태종 7년 2월 기해·3월 을해. 이 때 재건된 내용을 기록한 묘정비가 다시 섰으며 변계량이 비문을 지었다.705)≪太宗實錄≫ 권 20, 태종 10년 9월 계사.

 태종 13년 9월에는 예조판서 黃喜가 동서재가 좁아 생도들이 병에 걸리므로 개수해야겠다고 건의하였고 식당을 새로 짓는 일도 윤허받았다.706)≪太宗實錄≫ 권 26, 태종 13년 9월 기묘. 학생은 재에 기숙하면서 巾服을 갖추고 아침 저녁으로 식당에 모여 나란히 앉아 회식하면서 到記에 기록하는 것이 당시의 제도였으므로,707)≪增補文獻備考≫ 권 208, 學校考 7, 雜考 食堂. 식당은 중요한 건물이었다. 또 생도들이 아프자 세종은 동서재 각 5칸에 구들을 들여 온돌방을 만들어 주었다.708)≪世宗實錄≫ 권 29, 세종 7년 7월 병술. 세종 15년(1433)에 동서무 4칸씩을 증축하고, 25년에는 묘정비각을, 성종 3년(1472)에는 전사청을 신축하였으며, 6년에 泮水를 개탁하고, 존경각을 지었으며, 21년에는 향관청을 지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건물들은 전란 후 중건한 것들이다. 대성전은 선조 35년(1602) 7월에 준공되었고 명륜당 일곽은 선조 39년에 완성되었다. 지금 보물 제141호로 지정된 것은 이 때 중건한 문묘 대성전이다. 옛 자리에 다시 세워서 규모에는 변동이 없었겠지만 대성전의 공포가 다포계로 조성된 점은 혹시 중건시의 시대성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대성전 앞에 배례청이 있다. 명륜당도 그전대로 세 건물이 나란히 있되 가운데의 명륜당 좌우에 협실이 있는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공포가 익공계이다. 이 점도 중건시의 시대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건물과 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도성 안에는 四學이 있었다. 태종 11년(1411) 10월에 남부학당의 校舍가 남부 誠明坊에 건설되었다. 중부학당의 교사는 세종 4년에 북부 觀光坊에 신축되었고 서부학당의 교사는 세종 17년에 서부 餘慶坊에 마련되었다. 동부학당도 사찰을 이용하다가 독립된 건물을 확보하였는데, 세종 20년에 교사가 北平館으로 전용되어 동부 창선방 乳牛所의 건물로 옮겼다. 이들 학교의 교사가 어떤 정도의 규모였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어렵다.

 도성 안에는 특수학교도 있었다. 종친들만 수학하는 宗學도 그 중 하나였다. 세종 9년 대군 이하 왕의 8촌까지의 종친과 부마를 훈육하기 위하여 창설하였는데 교사는 경복궁 건춘문 밖에 있었다.709)≪世宗實錄≫ 권 37, 세종 9년 9월 을축 및 권 41, 세종 10년 7월 임술.

 譯學·醫學·陰陽學·算學·律學·畵學·道學·樂學 등은 각각 소관 아문에서 교육하였으므로 이들을 위한 교사는 따로 건립되지 않았다. 역학은 司譯院에서, 의학은 典醫監과 惠民署, 음양학은 觀象監, 산학은 호조, 율학은 형조, 화학은 圖畵書, 도학은 昭格署, 악학은 掌樂院에서 가르쳤다.

 세종 때 賜暇讀書制가 실시되자 독서당의 건립이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각자 집에서 글을 읽게 하였으나 번잡하여 정진하기 어려우므로 절에서 숙식하며 글을 읽었다. 그러나 명분상 문제가 있어 독립된 독서당의 건립이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성종 24년 5월 南湖讀書堂의 別搆一堂 건물이 이룩되었고 중종 때에는 한강가 豆毛浦에 湖堂을 짓고 연구소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독서당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독서당은 일종의 도서관 기능을 지녔으므로 조선 초기는 각급 학교시설과 함께 소규모이나 도서관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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