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6) 민가의 건축

6) 민가의 건축

 ≪大東輿地圖≫의 水系圖法 표현은 우리 나라 지형을 기록하는 적절한 방법이다.≪대동여지도≫에서 實査한 각 지역의 특성을 갖춘 집들을 기록하다 보면 큰 산이 막힌 골짜기 문화현상이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골짜기 물은 내를 이루어 흐르며 내와 같이 이쪽 지역과 저쪽 지역을 구분한다.

 살림집은 풍토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춥거나 풍우가 대작하거나 山谷間729) 산곡간이란 표현은 고구려 특징적 형상을 두고 산이 많아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三國志≫ 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에 큰 짐승이 횡행하는 고장의 집은 폐쇄적인 구조인 것이 보통이다. 고온다습하고 넓은 들에 연하여 있으며 玉畓에서 수확이 풍요로우면 집구조는 매우 개방적 성향을 지닌다.

 지역적 특성의 예를 낙동강 연안에서 살필 수 있다. 낙동강 서쪽 연안은 尙州·善山·龜尾·漆谷 등지로 넓은 들에 잇대어 있는 고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하여 동쪽 연안은 산곡간이 첩첩한 지형으로, 安東·奉化·英陽·靑松 등은 깊은 산골 마을들이다. 안동과 봉화 일대의 보편적 살림집 구조는 지극히 폐쇄적이다. 한 채로 이룩된 집으로는 까치구멍집, 도투마리집, 귀틀집이 있고, 여러 채가 일곽을 이룬 ㅁ자집·트인ㅁ자집·날개집 등도 대문만 닫아 걸면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운 특징을 지녔다. 선산·상주 일대는 다분히 개방적으로 一자형집이 대부분이다. 골짜기의 집 중에 겹집이 혼재한다고 해도 앞에 퇴를 두고 개방하여 누구나 걸터앉을 수 있을 만큼 접근이 손쉽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상반된 두 지역의 성향이 河回마을 일대에서는 미묘하게 절충되고 있다. 하회마을의 기와집과 원초형 초가들에서 그런 점이 발견된다. 폐쇄성향이 짙은 집과 一자나 ㄱ자형의 개방성향을 지닌 집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낙동강 양편 연안의 보편적 성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 두 요소가 절충될 수 있는 인자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절충의 사례는 상주 養眞堂에서 극명하게 살필 수 있다. 양진당은 명종 10년(1555)에 출생한 趙靖을 위하여 그의 장인인 金克一이 지어준 것으로, 상주 낙동면 승곡리 낙동강가에서 약 1.5km 떨어진 나즈막한 蠶頭山을 등지고 남향판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문앞이 문전옥답이고 들이 펼쳐져 있다. 폐쇄성향이 짙은 안동에 세거하는 안동 김씨가 사위를 위하여 낙동강 서안에 집을 지어준 것이다. 그런데 파견된 도편수가 재치가 있어, 폐쇄적인 고장에서 성장한 사람이 개방적 고장에서 순화되며 살 수 있게 절충형 집을 지었다. 안동지방의 폐쇄성향을 겹집 두줄배기로 처리하면서 땅에서 뚝 떨어진 공간에 마루를 깔아 거처를 삼는 다락집을 지어 마무리하였다. 개방적인 상주지방 형태에, 폐쇄적인 안동지방의 형상이 연합한 형용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런 연합의 性情은 한옥의 중요한 품성이기도 하다. 한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구들 들인 온돌방과 마루 깐 대청은 전자가 지극히 폐쇄적이라고 하면 후자는 아주 개방적이다. 전자는 추운 지방에서 발현하였고 후자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이 이질적 요소가 오랜 세월 절충하다가 마침내 연합하여 한옥이란 새로운 유형을 탄생시킨 것이다. 연합한 후에도 폐쇄적인 방은 벽체로 폐쇄시키고 대청에서는 기둥간살이를 탁 터주어 개방을 유감없이 지속시켰다. 상주 양진당은 마루 들인 다락집에 두줄배기 겹집을 올려 앉히면서 구들 들인 방을 설치한 데 특징이 있다.

 조선 초기는 가까운 산에도 원시림이 남아 있던 시절이어서 비록 엄격한 禁松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피해목이나 궁실용재 벌채 등의 기회를 통하여 입수되는 듬실한 松材가 있어 장대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현존하는 조선 초기의 살림집들은 대체로 규모가 당당하다. 특히 안동·봉화·영주·영양·영덕·청송 등지는 태백산이란 거대한 원시림이 있는 고장으로, 이른바 ‘춘양목’이라 부르는 양질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목조의 집을 당당한 규모로 지을 수 있었다.

 세종은 집의 규모가 자꾸 커지고 사치스러워진다고 한탄하였다. 새로이 국가가 수립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경제력의 축적되어 그 바탕 위에서 능력껏 집을 지으니 저절로 듬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집의 규모를 억제시켜 낭비를 막고 국력을 더욱 견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입해 쓰는 眞彩나 朱漆의 단청과 假漆을 못하게 하고, 생산이 어려운 석회 사용을 억제하였다. 또 지맥을 손상시키는 채석과 그것을 다듬어 쓰는 돌일에도 제한을 두게 하였다. 그러나 기존 건물이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 외국인과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 장려해서 널리 보급시켜야 할 家廟는 예외로 하였다.730)≪世宗實錄≫ 권 43, 세종 11년 정월 신미·권 45, 세종 11년 3월 경술·권 51, 세종 13년 정월 정축 및 권 94, 세종 23년 12월 갑오.

 세종은 집의 격조에도 주목하여 花栱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공포를 지칭하는 것인데 살림집에서도 주심포나 다포계의 공포구성을 할 수 없다는 제한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의 궁궐에서 翼工이라는 주심포나 다포계의 공포에 비하여 소략해진 형태가 채택되었던 것처럼 절약과 검소를 위주로 하는 禁制였다고 할 수 있다. 화공을 쓰게 되면 출목이 생기고 출목과 공포가 구성되면 조각이 뒤따라야 하고 그렇게 되면 단청이나 주칠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므로 처음부터 아예 그 싹을 없애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세종 22년(1440)에 국왕은 집현전의 연구를 통하여 작성된 間閣의 규격 제한과 더불어 사용자재의 제한을 ‘萬歲之法’으로 정하였으나, 이 家舍制限令의 규제수치가 구조상 불합리한 점이 있어 동왕 31년에 개정하였다.731)≪世宗實錄≫ 권 90, 세종 22년 7월 정묘 및 권 123, 세종 31년 정월 정미.

 그러나 세조나 성종 때에도 세종 때나 다름없이 규제 이상의 집을 짓는 자들이 있었다. 이는 문제가 되어 훼철당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묵인되는 수가 많았다. 왕의 규제지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효과가 없자 성종 9년(1478)에 다시 가사제한령의 개정을 반포하였다. 간각의 크기를 증대하려는 노력이 담겼으나 이것도 지켜지기 않았다. 성종 자신도 桂成君의 집을 지어주면서 규제를 어겼으므로 규제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중종 10년(1515)에도 국왕이 규제에 어긋난 집을 한성부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더니 280여 채에 이르렀다. 정승의 집부터 법을 어겨 우의정 成希顔의 집은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고,732)≪中宗實錄≫ 권 16, 중종 7년 6월 갑인. 좌의정 宋軼은 법보다 크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단청도 하였다.733)≪中宗實錄≫ 권 22, 중종 10년 윤4월 경신. 그러나 이러한 위법은 묵인되었고 이 흐름은 곧 시세에 반영되어 적발된 280여 채의 집을 당장 다 헐어낸다면 인심이 소요할 것이므로 40여 칸씩 넘치게 지은 집만 훼철하고 나머지는 그냥 두어도 괜찮치 않겠느냐는 의견도 제시되었다.734)≪中宗實錄≫ 권 22, 중종 10년 윤4월 갑자. 이런 흐름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가 되면 초기의 흐름과는 전혀 달라진다. 현존하는 집들은 태반이 임진왜란 이후 위축된 경제상태에서 좌절된 기술을 통하여 조영된 것들이다. 7년에 걸친 전란으로 건축경제가 위축되고 축적되었던 능력이 무산되어 버렸고 기술전수 技門이 파멸하였다. 이는 전문기술인과 기능인들의 손실에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난후 복구가 진행되었어도 건축은 전쟁 전의 성관을 되찾지 못하였고 오히려 쇠미로 흐르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건축사에서 조선 전기는 삼국, 통일신라,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흐름에 연속되는 것으로,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의 후기 살림집이 예외에 속한다. 따라서 오늘날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이후의 건물을 통하여 전기의 살림집을 규명하는 일은 자칫 함정에 빠지기 쉽다. 현존하는 초기의 당당한 규격의 집과 문헌에 표현되고 있는 양상을 접합시켜야만 당대의 살림집이 당당하였다는 점을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살림집의 구조적인 유형은 전대나 후기가 별차이 없었다. 도시의 하위층이나 시골 농부 집은 훈련된 목수나 기능인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시대적인 특성보다는 풍토에 적응하는 집을 짓는 것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이다.

<申榮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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